•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예전에는 화가들이나 꿈꿀 수 있었던 영원한 순간의 포착은 대중적으로 보급된 카메라 덕에 이제 모든 사람들의 꿈이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 러한 열망으로 일상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렇게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서랍이나 컴퓨터의 저장 공간만 잠식하는 시간의 파편들, 즉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곤 한다. 생의 흔적을 간직하려는 의도와 달리, 죽음의 흔적이 되어 구석구석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순간의 창을 수없이 내는 것은 영원을 향하는 열망 때문이 다. 하지만 ‘영원한 순간’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사진 찍기는 영원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끊임없이 환기 시킨다.

사진은 ‘죽어버린 순간’ (memento mori) 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혹은 다른 사물)의 죽음, 상처, 무 상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작업은 그러한 순간을 정확

144)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소멸될 수 없고 영구하고 영원하기를 요구한 다. ‘용납될 수 없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더 더욱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사랑 자체의 죽음이다. ...’” 작은따옴표 안의 글은 마르셀의 글 'Theism and Personal Relationship', in Cross Currents, Ⅰ, No.Ⅰ 1956, p.41에 실린 글을 다음 책에서 인용. 서 배식, 앞의 책, p.235.

<그림 20> [진경언니] (Jin Kyung), 2008,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13cm

하게 도려내어 응결시킴으로써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증 거하는 행위인 것이다.145)

내가 사진 매체를 통해 나타내는 시간성은 멈춰선 순간이라기보다 오히 려 소멸을 향해 멈추지 않는 시간의 모습이다. 즉, 작업 소재인 사진 이 미지는 시간의 파편(破片)으로서 인생의 유한성을 드러낸다.

존재했음의 증거

사진의 가장 특별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존재했음의 증거’다. 과거의 흔적 중에 사진만큼 자명하게 그 사람, 사물, 순간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진에서 대상의 본 모습이 왜곡되기도 하 지만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파이닝거는 존재했음의 증거가 되는 사진의 특징을 신빙성(信憑性)이라고 했다.

모든 시각적 표현 중에서 다음의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진뿐이다-즉 카메라는 표현된 주제나 사건의 산 증인이 라고. 그림이나 드로잉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지거나 상상 력을 토대로 하여 창작되는 것이어서,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조작하지 않고 직접 찍은 사진은, 첫눈에 그것이 아무리 눈 서툴고 믿기 어려워도- 즉 일그러짐이 심하거나 원근감이 매우 환 상적일지라도- 현실의 일부를 꾸밈없이 증명하고 있는 한 하나의 다큐멘트인 것이다.146)

바로 이러한 존재했음의 증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있어, 단 한 순간도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므로 사진의 최대 매력이 된다.

사진이 사람들에게 현실이 아닌 과거를 간직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된 공간을 보유하지 못했던

145) 롤랑 바르트⦁수잔 손탁, 앞의 책, p.138.

146) 파이닝거, 앞의 책, p.20.

<참고그림 15> [선생님] 자료 사진

바로 그 공간을 사진이 메워 줄 수 있게 되었다.147)

<참고그림 15>는 [선생님]<그림 6>의 소재가 된 사진이다. 몇 통의 필름을 낭비하며 찍었던 사진들 중 에서 그 나마 한 장을 고른 것이 이 것이었다.148) 그리고 지금, 사진 속 의 인물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 고 나에게 이것은 촬영 당시와는 또 다른 의미의 사진으로 변하였다. 그 는 없지만 이 사진 속에 무엇인가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하이데 거는 존재는 말씀(글) 속에 살아있 다고 했는데, 때로는 사진 속에서도 살아난다.149) 이미지뿐 아니라 인격, 혹은 존재를 증명하는 아우라 (aura; 靈氣)가 담길 때도 있는 것이다.150) 비록 그것이 뒷모습을 반 쯤 찍은 흔들리는 초점의 사진이라도 말이다.

상실(喪失)

사진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록이다. 즉, ‘존재함’이 아닌 ‘존재했음’의 증거이다. 이것은 ‘존재’에 대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증거인가? 존

147) 롤랑 바르트⦁수잔 손탁, 앞의 책, p.230.

148)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초상 사진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상 사진은 일종의 투쟁이다. 아무것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이 전쟁이 나에게는 매우 어려웠다." H. 카르티에브 레송, 자필 노트, 1994년” 클레망 셰루,『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정승원(역), 서울: 시공사, 2010, p.79.

149) 김흥호, 『서양철학 우리 심성으로 읽기Ⅰ-철인들의 사상』, p.300.

150) 발터 벤야민은 복제 가능한 사진과 같은 매체는 예술 작품의 아우라를 오히려 해친다고 보 았지만, 롤랑바르트는 사진 속에는 인체를 영혼으로 인식시키는 작은 영혼, 즉 '분위기(air)'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 두 책 참조. 롤랑 바르트⦁수잔 손탁, 앞의 책, p.109. ; “예술작품의 기 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Aura이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편역), 서울: 민음사, 1983, p.202.

<그림 21> [목도리] (Muffler), 2006, 목판화(한지에 먹), 60×79cm

재는 현존해야만 충만하다. 그런데 그 상황, 사물, 사람, 순간이 한 때 존재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상실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러한 상실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각성시킨다면 이것은 얼마나 괴로움이 되는가?

한 장의 사진은 의사(擬似) 존재이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 시하는 징표이다.151)

[목도리]<그림 21>도 나의 일상적 사진을 바탕으로 한다.152) 그런데 사진을 찍은 나는 관점의 주체지만 그 장면에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배

151) 롤랑 바르트⦁수잔 손탁, 앞의 책, p.136.

152) ‘큰언니는 늘 바빠서 가족과 함께 이런 나들이를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눈이 온 날, 우리는 함께 한강변으로 나갔다. 언니는 어머니가 떠 준 큰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필자의 작품 노트 중에서.

제되어있다. 그 이유는 내가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촬영하였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즐거운 한 때’가 연출된 전형적인 사진 이미지 로 보인다. 결국 관객은 자신이 사진이라는 사각형의 창을 통해서 누군 가의 추억(追憶)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존재했 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멀어진 과거의 허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무 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사진은 존재했음과 더불어 상실을 증명하는 것 이다.

사진작가는 현실을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사업에 참여하는 우유부 단한 인간이고, 사진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옛 유품이라고 할 수 있다.153)

한편, 사진이 아무리 사실적이고 압도적인 시각 정보로써 존재했음에 대해 강렬하게 설득한다고 해도, 이것은 대상 본래의 총체적이고 풍부한 실체를 단지 단면으로만 제시하는 것이 되므로, 왜곡(歪曲)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험이란 시간 속에서 오감(五感)을 통해 종합 적으로 하는 것인데, 사진에 담긴 것은 시간의 단면이고 시각 정보뿐이 어서, 사진이 실재를 그대로 옮겨놓았을 것이라는 믿음은 배반되는 것이 다.154)

사진은 시간의 흐름 중에서 극히 짧은 찰나만을 기록한다는 점이 다. ... 사진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인상보다는 단지 덧없이 흘러 가 버리는 한 순간-한 관점의 모습, 하나의 단편(斷片), 심지어는 특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할 뿐이기 때문이다.155)

삶의 불완전함, 한계 상황, 상실이라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찍었던

153) 롤랑 바르트⦁수잔 손탁, 앞의 책, p.205.

154) “렌즈란 생각을 할 줄 모르는 물건이기 때문에 사물을 물(物) 그 자체로 시간을 정지시킨 채 사물의 형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고 있으 며, 그 사물에 대한 기억과 경험, 또 그 사물이 갖는 운동성, 방향성, 사물의 내면과 외면, 전 면과 후면에 이르기 까지 통일되게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오윤, 앞의 글, p.71.

155) 파이닝거, 앞의 책, pp.24-25.

사진은 도리어 이것들을 가중(加重)한다.

애착(愛着)

그러함에도 이 부질없는 사진 찍기는 발명 이래 대 유행이다. 존재를 붙들겠다는 기대로, 상실에 대한 저항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또 찍 는다. 마치 인류사에 인생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듯이, 사진 찍기의 희 망과 실망의 반복도 계속될 것이다. 애착하는 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그 저 바라보기보다 이미지 파편이라도 잠시 붙들어 상실을 지연(遲延)시키 려하는 것이다. 박제, 말린 꽃잎, 사진은 모두 생명을 잃은 미라 같은 것 이어서 삶이 아닌 죽음을 공고히 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영원에의 절 실한 희망도 분명히 담겨져 있다.

<참고그림 16>은 학교에서 창밖을 보다가 우연히 포착한 어느 가족의 사진 찍는 모습을 다시 사진 찍은 것으로서, 그 중에서 네 장면만 추린 것이다. 그 가족은 서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사진 찍기 는 장난과 웃음이 가득한 하나의 놀이였고, 이곳에 와서 할 유일한 일처 럼, 세 사람은 여기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아이들 이 어머니를, 여동생이 오빠와 엄마를 사진 찍는 모습은 흐뭇해 보이기 도 했지만, 어느 면으로는 애틋해서 오히려 서글프게도 보였다. 유난히 사이가 좋아보였던 가족들의 모습에서, 내게 두드러지게 느껴진 것은 엉 뚱하게 아버지의 부재(不在)였다.

회화 작품 [1973]<참고그림 17>은 1975년 창경원(현재의 창경궁)에 서, 당시 유원지에 가면 늘 있었던 사진사에게서 찍은 기념사진을 바탕 으로 그린 것이다. 1973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였고, 그 후로 매년 어린이날 즈음이면, 우리 가족은 소풍을 갔었다. 나는 이 사진을 볼 때 마다, 다섯 사람의 모습만 보지 않는다. 당연한 듯이 부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함께 본다. 있어서 있는 것도 있지만, 없음으로서 있는 것도 있 다. 여백(餘白)의 역할을 하는 흰 숲의 공간이, 바로 ‘부재로서 존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156)

156) [1973]의 전체 모습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이 작품은 학부 졸업 때의 것으로서, 몇 년 뒤 큰 작품을 보관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인물 부분만 남기고 잘라내 버렸기 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