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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 상황은 죽음이다.7) 그리고 죽 음은 인간의 가장 확실한 장래(將來; 장차 다가올)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의 제목을 ‘예정된 한계 상황’이라고 정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행 하는 한계 상황(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죽음은 가 능태로서 항상 실존 곁에서 대기한 채, 등장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당장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편리한 ‘착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함 께, 혹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곤 한 다. 시간이라는 강의 도도한 흐름에 빠져있으면서 그 사실을 무시하고, 마치 어디 강둑에라도 서있는 것처럼 자기 삶을 방관하기 때문에, 헤엄 쳐보지도 못한 채 휩쓸려가는 것이다. 인간 한계 상황인 죽음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첫째, 현존재(인식 주체로서 의 나)8)의 죽음과, 둘째, 유대(紐帶)관계에 있는 타인의 죽음에 관하여

7) ‘한계 상황’(Grenzsituation), 또는 ‘극한 상황’이라는 용어는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인간이 스스로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곤경, 즉 싸움, 고민, 죄책, 죽음 등의 상황을 일컬어 처음 사용하였다. 나는 여기서 죽음을 중심으로 최종적 한계 상황을 논하였다. 야스퍼스의 ‘극한 상황’에 관해서는 다음 책 참조. 김흥호, 『서양철학 우리 심성으로 읽기Ⅱ-실존들의 모습』, 서울: 도서출판 사색, 2004, p.119.

8) 본 논문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용어와 개념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책에 의거하여, 스스로도 ‘세계내의 존재’이면서,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존재 이 해’라는 규정을 내리는 ‘나’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과 ‘존재 이해’는 변할 수 있기 때 문에, 현존재 또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한편, 실존이란 개념은, 현존재인 ‘나’가 자신 을 상황에 따라 규정한 그때그때의 ‘나’로서 규정한다. 즉, 본 논문에서는 현존재는 자기를 규 정하는 주체로서의 ‘나’이고, 실존은 규정되어진 실체로서의 ‘나’로서 구분한다. 현존재와 실존 개념은 하이데거의 정의에 따랐으며, 아래 인용문 참조하였다.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지닌 존재자를 우리는 술어적으로 현존재(Dasein)라고 부르기로 한 다.”(p.17).

“현존재는, 나라는 존재와 더불어 나라는 존재를 통하여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에게 열려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규정이다.”(p.22).

“현존재가 그 자신에 대해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그 자신에 관계할 수 있는 본질적 존재 그 자 체, 그리고 현존재가 항상 어떤 형태로 관여하게 되는 존재 그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이름

<참고그림 3>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Saturn Devouring One of His Sons), 1820~1823, 143.5×81.4cm 살펴보겠다.

(1) 현존재의 죽음

물리적인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결 코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멈추 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시 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존재자를 지워버 리기 때문이다. 사물도 사람도, 사건도, 그리고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생성과 소멸을 지 켜보고 있는 의식, 즉 ‘나’의 현존재를 지워버린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다 잡아먹었듯이, 시간 속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인간은 결국 시간에게 먹힐 운명이다.9)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전진하면서, 그 앞의 존재자들을 남김없 이 밟고 지나간다. 시간은 빨라서가 아 니라 잠시 멈추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 기 때문에 당할 수가 없다. 시간은 모든 존재자의 영원성을 짓밟으면서 스스로는 영원인 듯 나아간다.

여기 시간(Chronos)의 모습을 그린 고

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그림이 있다. 고야는 말년에 자 기 별장에 은둔해 14점의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는 벽화를 그렸다.10)

짓기로 한다. ... 나의 지금의 실존을 내 것으로 장악하든 또는 그것을 지워 없애버리든 나의 실존은 그 때의 현존재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pp.22~2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 간』, 전양범(역), 동서문화사, 1992.

9) 하랄트 바인리히, 『시간추적자들』, 김태희(역), 황소자리, 2008, pp.162-164.

10) Juan José Junquera, 『The Black Paintings of Goya』, Scala publishers Ltd, 2003, pp.64-65.

그 그림들은 세속적인 궁정화가로서 그렸던 왕실 초상화와도 다르고, 사 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풍자한 판화 작품과도 다른 그림이었다. 늙고 병든 고야는 세속의 명예에도 시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비밀리에 자신의 별장 벽에 그린 이 그림들은 자신만을 위한 고백서 같은 것이었 다. 그는 자신의 유한한 삶과 마주하고서, 인간의 실존적 한계 상황을 압도적인 어둠과, 어둠을 가르는 비명 같은 빛으로 표현하였다.

그 중 한 작품이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참고그림 3>이다. 크로 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다 잡아먹는 신화는 종종, 목동의 신인 크로노 스(Kronos; Crous; Cronos)가 시간의 신(Chronos)으로 혼동되면서 시 간의 은유로서 많은 문예 작품의 소재가 되곤 했다.11) 고야 역시 시간 이 자기가 낳은 존재자들을 다 삼켜버리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이런 장 면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사투르누스(Saturnus) 또는 크로노스(Kronos), 즉 시간이 제 모든 새끼를 잡아먹는 일은 항상 지속된다. 오직 끊임없이 달림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 일함으로써, 우리는 (대략 70년가량) 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우리도 잡아먹는다. 어떤 왕 이 또는 왕들의 신성동맹이 시간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있으며, 생각으로나마 시간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12)

시간의 신은 죽음의 신이기도 하다. 크로노스는 낫을 든 죽음의 신으로 묘사되곤 한 것이다. 여기서는 낫은 등장하지 않지만, 검은 어둠으로부 터 튀어나와 눈알을 굴리며 끔찍한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은 죽음 그 자 체다. 자식의 배신을 두려워하거나 복수심에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저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아귀(餓鬼)처럼 보인다. 이처럼 냉혹

11) “크로노스는 원래 농업의 신이었지만 여러 세기를 통해 시간의 신 역할을 맡았다. 많은 학자 들은 그리스 어로 ‘시간’이라는 뜻의 크로노스(Chronos)라는 단어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신 의 이름 크로노스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 자녀를 삼켜먹는 크로노스의 모습은 모든 피조물을 잡아먹는 시간의 모습과 동일시되었다.” 루치아 임펠루소, 『그리스 로마신화, 명화를 만나다』, 이종인(역), 서울: 예경, 2006, pp.171-172.

12) 토머스 칼라일, 『의상철학-토이펠스드뢰크 씨의 생애와 견해』, 박상익(역), 경기도 파주: 한 길사, 2008, pp.204-205.

한 시간의 식욕 앞에 동정을 구하거나 비난을 퍼붓는다고, 시간이 식사 를 멈출 리는 없다. 제우스의 형제들이 아비에게 안긴 채 살점을 뜯기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시간의 품안에서, 시간에 의해 생명을 잠식(蠶食)당하고 있다. 시간의 신이 곧 죽음의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일생에 걸쳐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의 노화 현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또 멀어진다. 죽음은 최후의 시각에 맞춰, 애매한 미래(未來; 아 직 오지 않은)라는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 마자 죽을 연령에 도달해 있다.”13)는 말처럼,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로 인간을 ‘죽음에 임하는 존재’라고 하였 다.14)

현존재는 존재하는 동안 스스로의 미연(미숙)을 항상 지니고 있으 며,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종말 역시 지니고 있다. ... 세계 속 존재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끝나는 것’이란 현존재가 종 말에 도달해 있는 현상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종말에 임하는 것을 말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존재양식 의 일종이 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연령에 도달해 있다 .”15)

인간의 실존 상황(삶)은 언제든지 한계 상황(죽음)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존은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상태이므로, 죽음은 그 가능 성 중에 하나로서 항상 여기 있다. 삶에 처했다는 것은 곧 죽음에도 처 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현실이다.

13) 주석15 참조.

14) “죽음에 임하여 존재하는 현존재는, 그 사망에 도달하기 전까지 사실상 끊임없이 임사(臨死), 즉 죽음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p.332.

15) 위의 책, p.315. 큰 따옴표 안의 문장은 A. 베른트 및 K. 브르다흐 편저, <보헤미아 출신 농 부> 제 20장을 재인용.

(2) 영별(永別)

죽음이 닥쳐진 현실의 문제라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죽음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유효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편, 정작 죽음의 순간에 이 르면, 그 순간 현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는 더 이상 문제될 수가 없다. 한 사람에게 죽음이 지극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죽음 때 문이라기보다, 그와 유대 관계에 있고 공동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친밀 한 사람들의 죽음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독립된 인격체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因緣)으로 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 다. 그 인연, 즉 인간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일 때, 나와 너의 경계 는 모호해져서, 타인의 존재가 자기 이상으로 소중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때, 그 관계, 즉 ‘사랑’은 심지어 그와 나보다 더 소중해져서, 생 명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가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되어준 사랑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면 고아가 되기 때문에, 현실적 인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이런 변화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도 받을 것이 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이고, 가장 큰 고통은 부모와 맺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관계가 영원히 깨졌다는 것이다. 애착하는 이들 이 죽음으로 사라질 때, 이것은 ‘영원한 이별’로 여겨지고 절대적인 상실 감을 가져온다.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병든 아이]<참고그림 4>16)는 죽음에 임박한 소녀와 그녀를 간호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다.17) 유난히도 가족의 죽음을 많이 겪은 뭉크는 질병과 죽음을 삶의

16) 1885~6년에 제작된 첫 번째, 병든 아이[The Sick Child]의 원제는 [Study]인데, 뭉크는 제목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한 작품에 여러 가지 제목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수 프리도, 『에드바르 뭉크: 세기말 영혼의 초상』, 윤세진(역), 서울: 을류문화사, 2008, p.167, 180 참조.

17) 뭉크는 이미 죽은 누이 소피와, 그녀 보다 더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 레우라를 그리고자 했 기에, 모델이 필요했는데, 전문적인 모델을 쓰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환자 중에 영양실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