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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치 않는다. 코수스처럼 개념을 중심으로 한 이지적인 작품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 즉 이데아를 직관(直觀)하는 인간의 능력 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현실의 말단을 비약시키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감(靈感)이나 상상력에 의한 통찰(洞察)로서, 이것이 발휘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개념 작품인 [세 개의 의자]조차 냉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풍자적 재기가 넘치는 것이다.

열린 마음의 자유로운 유영은 어디에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닿 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은 직관과도 만나고 경험과도 손잡으며 세 계를 연결하고 참된 삶의 의미를 조명한다.181)

오윤은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182) 그가 말 한 세계의 확대란, 경험적 현실(現實)을 확대하는 것이면서, ‘삶의 참된 의미(眞理)’, 즉 이상(理想)을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은 현실도, 이상도 인식(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해버린다. 보 이는 감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즉 물질로써 정신 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회화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상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이상을, 죽음 속에서 영원을, 거짓 속에 서 진실을 꿈꾸는 것, 이것이 ‘거짓된 회화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사진 이미지를 옮기는 드로잉, 판각, 바니시 제판을 말하며, 이것은 사진으로 수집한 현실의 단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과정이 된다. 즉, 사진 이미지를 근거로 하되, 어느 정도의 가감(加減)을 하는 것이다. 나 는 완전한 추상이나 세상에 없는 환상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현실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구 체적인 사실을 떠나지 않는다. 즉 기억(記憶)의 작용처럼 현실을 근거로 하되, 영원성의 이상(理想)에 따라 각색한다.

그림은 기억으로 그리는 것이다. 자연은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화가가 카메라처럼 단지 정보를 전달해 주길 바란다. 하 지만 그림이 풍경과 닮았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요점을 벗어나는 문제다. ... 풍경은 모티브가 아주 생생한 인상을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순간의 모습대로 그려야 한다.183)

뭉크의 이야기는 실경(實景)보다 더 생생히 살아있게 되는 한국화의

‘진경’(眞景)에 관한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진경이란, 실경 그대로도 아 니지만 거짓도 아니다. 무의미한 사실(事實)이 의미를 갖도록 음미된 것 이므로, 사람의 감흥에 더욱 진정성 있게 호소하는 진실(眞實)된 모습이 다.

사실, 뭉크는 사실로부터 아주 많이 벗어난 작업을 했다. 뭉크는 직접 대상 앞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에는 멋대로 그리곤 해서, 친구들은 풍경과 이젤 사이에 커튼을 치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184) 결국, 그의 주관주의적인 태도는 그를 표현주의에 영감을 준 작가로 만들었는데, 그 는 눈앞의 경치로부터 출발해도, 곧 그것이 무의식으로 소화되어버린 내 면적 풍경, 즉 기억을 정신없이 그리곤 했던 것이다.

기억은 관념의 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미 련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억은 변화하고 소멸하는 현실을 붙들어 생각 속에 넣어두는 것인데, 결국 생각 자체가 된다. 즉 기억은 처음에는 묘

183) 수 프리도, 앞의 글, p.364.

184) 위의 책, 같은 면.

사적 정보로 수집되지만, 결국 추상적 생각으로 남는다. 예를 들어, 구체 적이고 자세한 사건의 기억은 나중에는 기쁨, 슬픔, 공포, 사랑, 미움, 감 사 등의 추상적인 인상(印象)으로만 남는 것이다.

나는 뭉크의 잠재적 무의식이나 오윤이 말한 상상력에 완전히 의지해서 작업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삶의 지극히 현실적인 단면을 영원성 이 담긴 이상(理想)으로 만드는데 목표가 있다. 내 작업에서 바로 이러 한 목표를 실현하는 단계는 현실의 기록을 관념의 기억으로 바꾸는 회화 적 과정이다.

사진과 작품의 차이

사진이 어떻게 회화적으로 각색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보겠다.

<참고그림 24>는 사진과 판화 작품을 나란히 비교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작품들은 한 장의 사진을 자료로 하였고, 앞에서 살펴본 [기차]처 럼, 2장의 사진을 참고 하거나, 두 장 이상의 사진을 참고한 경우도 있 다.

그런데 나는 사진을 기술적으로 잘 찍지 못한다. 구도에 신경 쓰거나 연출을 하면 마음에 드는 생생한 순간이 찍히지 않고, 뭔가가 담긴 듯한

‘결정적 순간’을 우연히 찍게 되면-대부분 의도적으로 찍으려 할 때는 찍지 못했던- 사진의 밝기나 초점 등이 엉망으로 되어 있곤 한다. 후자 의 사진들은 일상적으로 찍은 많은 사진들 중에서 잘못된 사진 취급을 받고 있다가, 작업을 하기 위해 다시 살펴볼 때, 갑자기 특별하게 와 닿 는 사진들이다. 즉, 사진으로서는 단점이 많아도, 내가 원하는 원석(原 石) 같은 것을 포착하고 있다면, 나는 그런 사진들을 가지고 작업을 한 다.

예를 들어, [신부]의 자료 사진은 전체적으로는 관심이 가지 않는 사진 이었지만, 거울에 비친 신부의 표정은 무엇인가 특별하게 보였다. 그래 서 다른 멀쩡한 사진을 놔두고 하필 이 작은 얼굴을 확대하여 100호가 넘는 작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동생의 결혼식]의 자료 사진의 경우, 이 것은 너무 어둡고 흔들리게 촬영되어서, 인물의 눈동자와 코가 길게 왜

<참고그림 24> 사진과 판화 작품. [출구], [사원], [테오의 밀롱가-리아와 제이; 색], [소녀], [베란다], [푸른 저녁], [신부; 색], [동생의 결혼식; 먹]

곡되었고 손가락도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사 진에는, 인물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적인 표정과 움직임이 분명히 살아 있어서, 나는 이 사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진이 포착한 그 순간의 ‘특별함’을 담는 데 목적이 있다. 사진을 그대로 재현(再現)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내가 그리길 원하는 것은

나의 시선을 끌었던 그 ‘무엇’이기에, 그것을 표현(表現)하는 데 집중한 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각색이라기보다 잘못 촬영된 사진 속에 숨겨져 있었던 본래의 그 순간을 꺼내려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의 본래 모습이란, 사진에 담긴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촬영 당 시 느꼈던 인상(印象), 그리고 그 인상이 남게 된 그 상황의 총체적인 기억, 또 그 기억에 담긴 근원적인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 그림이나 드로잉은 대개 화가가 받은 갖가지 인상, 갖가지 순 간, 갖가지 양상을 모두 종합하여 대상을 하나의 뭉뚱그려진 형상 내지는 거의 상징적인 형상으로 보여 준다.185)

예를 들어, [베란다]에서 벽에 늘어진 그림자와 그늘 속의 미소, [소 녀]에서 일몰을 보러간 그날의 여행과 그 지역의 가난과 희망, [푸른 저 녁]에서 어슴푸레한 공기와 깊고 푸른 하늘, [출구]에서 노을과 영원으 로의 귀가(歸家)등이 바로 그런 인상적인 기억이다. 이것은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아주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여기 에 집중한 것이다.

즉 나는 사진의 외면이 아니라 사진이 포착한 어떤 특별함에 초점을 맞 추고, 그것을 매개로 한 기억, 또 그 기억을 매개로 한, 더 깊고 높은 세 계까지 표현하려 했다. 사진에서의 그 ‘무엇’이 사진의 생명이었다면, 나 는 그것을 그림의 생명으로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직접적인 표현

내 작업에서 회화적인 과정은 주로 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진 이미지 가 촬영과 인화로, 판화 작품이 종이 위의 인쇄로 생겨난다면, 회화성은 판 위에서의 드로잉과 제판 과정에서 생겨난다. 인화나 인쇄는 간접적인 표현이지만,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회화적 단계는 나의 주관적 관념(觀念)은 물론, 체득(體得)적 기술과 감각(感覺)에 의지하는 ‘직접

185) 파이닝거, 앞의 책, p.24.

<참고그림 25> 오윤, [봄의 소리], 1983, 16.5×16.5cm 적인 표현’의 과정이다. 즉, 그

리거나, 각하거나, 칠하는 물리 적 행위가 판 위에 그대로 반 영되어서, 말 그대로 직접적으 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판각의 직접성을 오윤의 [봄 의 소리]<참고그림 25>를 통 해 먼저 살펴보자. 이것은 그 의 작품들 중에서, 순수하게 서정적인 작품이다. 새 한 마 리가 입이 빨갛도록 울며 기다 리는 봄이 설령 정치적인 봄에 대한 은유였을지라도, 자연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관

객은 폭넓게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제목 ‘봄의 소리’는 죽음을 견뎌 낸 생명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었던 나무가 다시 물을 끌어 올려 새순이 돋는 소리, 그 소리에 반가워 겨우내 조용하던 새들이 지저 귀며 봄을 재촉하는 소리다.

오윤은 소박하고 단순한 몇 가닥의 각선으로 꺼칠하지만 씩씩하기도 한 생명들, 나무줄기와 여린 새순, 그리고 목을 빼고 봄을 기다리는 새를 표현하였다. 한편, 겨울의 추위를 나타내는 듯한 검은 여백과, 까만 새를 구분하기 위한 각선은 화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단순히 설명 적인 외곽선이 아니다. 칼의 날을 새 쪽으로는 세우고, 여백 쪽으로는 눕혀서, 평면적이고 폐쇄적인 테두리가 되지 않게 하고, 오히려 미묘한 공간감을 주어, 새가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져 나오게 만들었다.

사물에 대한 애정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물이 갖는 뜻과 의 미는 찾아질 수도 회복할 수도 없다. 애정이란 사물과의 진정한 대 화이다.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