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인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다. 한 손 에 늘 쥐고 생활하다시피 하는 휴대전화의 대표적인 기능 중 하나가 카 메라여서, 사진 찍기는 완전히 일반화되고 또 일상적이 되었다. 게다가 디지털카메라 덕분에, 예전처럼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 장면을 선별하고 완벽하게 연출해서 찍을 필요도 없어졌는데, 아무렇게나 찍고 나서 나중 에 삭제하거나 편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문가의 특별한 순간 포착의 노하우가 이제는 대단찮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사진을 내 작업에 도입할 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사진의 조 형적 효과가 아니라 사진이 일상 속으로 들어온 그 현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일상적 사진 찍기가 시간의 파편과 영원에의 지향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는 촬영자가 자기 삶 속에서 찰나를 건져낼 때, 그 선택에서 무엇이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겠다.
촬영자의 입장
사진 찍기가 일상화되었다고 해도 사진작가나 사진 기자처럼 전문가는 여전히 있다. 그들은 일반인에 비해, 고가(高價)의 장비를 들고 특수한 대상에 특별히 접근하도록 허락되곤 하기에, 특권 의식을 가져왔다. 그 런데 사실 일반화된 사진 찍기에서도 촬영자는 이 특별한 지위를 마찬가 지로 갖는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자는 그가 렌즈를 들이대는 모든 사물을 피사체(被寫體)라는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즉, 촬 영자의 특권은 사진 촬영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촬영자는 어느 사진가의 말처럼, 생명 없는 물체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157) 반대로 생생한 대상을 얼어붙게 하고 박제화해서 자신의 수집
157) 클래런스 존 러플린은 “나는 많은 작품을 통해서, 심지어 ‘생명 없는’ 물체를 포함한 모든 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인간의 마음을 갖도록 시도한다.”고 말했다.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 여』, 이재원(역), 서울: 도서출판 서울, 2004, p.263 참조.
품으로 소유해버리기도 하며, 또 대상의 총체적인 모습을 극도의 단면만 드러냄으로써 편협하게 만들기도 한다. 촬영자는 그의 사진에서 세상을 살리거나, 죽이고, 왜곡할 수 있는 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때로는 혐오되고 저항을 받는 이유가 이것이 다. 그는 비인간적이다. 지나치게 참견하거나 지나치게 냉정해서, 신 아 니면 기계 같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사실에 촬영자의 진짜 비밀이 있다. 촬영자는 카메라와 달리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레이(Man Ray 1890~1976)의 비문에는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무 관심하지 않았다.”158)라는 말이 적혀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입장을 이처럼 잘 대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선,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사진 을 찍는다는 것은, 눈앞의 현장과 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거리를 두 어 예외자처럼 있는 것이다. 많은 사진가들은 현장에 있으면서 현장에 관여하지 않는 이 특수한 입장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촬영자는, 사진기 의 차가운 렌즈와 같은 냉혈의 관찰자, 혹은 더 심하게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만 있고 행동할 수족(手足)은 잃어버린 괴물, 그리고 몰래 훔쳐보 는 관음증 환자 같다는 비난과 죄책(罪責)감에 혼란스러워한다.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1923~1971)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정말 못된 짓 같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했다.159)
아버스는 사진 촬영에서의 지나친 호기심과 개입(介入)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것인 데 반해, 케빈 카터(Kevin Carter 1960~1994)는 정반대의 이유, 즉 냉정한 방관자가 된 것에 대해 죄스러워했다. 남아공 사진기자 였던 그는 수단에서 아사(餓死) 직전의 어린아이를 촬영하여 퓰리처상의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진이 자명(自明)하게 드러내는 또 다른 모습, 즉 곤경에 처한 아이를 촬영의 소재로 삼고 있는 카터 자신 의 ‘경악스러운’ 태도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는 결국 자살했 다.160) 이것은 극단적 사례지만, 촬영자의 아이러니한 실존 상태를 잘
158) 최유진, 「세계사진역사전을 한국에서」, 『만레이 특별전 및 세계사진 역사전』, 김영섭사 진화랑, 2006, p.14.
159) 수전 손택, 앞의 책, p.31.
보여준다.161) 인간의 실존 명령인 ‘삶’에 처해서, 삶의 예외자로 있는 것 이 인간의 도리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촬영자가 과연 가만히 있는가? 그는 사진을 찍는다. 도움을 주 거나 불의에 항거하는 행위를 그는 사진을 찍는 행위로 행동하는 것이 다. 만 레이의 말처럼, 참여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촬영자는 사실 예외 자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관심을 표하는 행위, 즉 촬 영을 하는 특수한 행위자인 셈이다.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관심하지 않 았다’는 말은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참여도 하였 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 촬영자가 된다는 것은 냉정(冷情)이 아니라 관 심(關心)으로 뜨거운 심장, 즉 열정(熱情), 혹은 적어도 온정(溫情)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촬영자의 자기 반영
이번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만 레이의 말에서 그 관심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촬영자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그것을 주목하여 촬영했다는 바로 그 사실은, 필름이나 메모 리뿐 아니라 그의 눈과 정신에도 그 현장이 새겨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사진은 그의 관심으로 채택되고 주관으로 걸러진 이미지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보도록 요구된 것은 바로 그의 시선이며 그의 의식이다.
사진은 오직 촬영자의 시선에서 발견된 현실의 어떤 영상(映像)-거의 실재한다고 할 수 없는-을 매개로 한 그의 순간적인 의식의 반영이
160) 헬 부엘, 『퓰리처상 사진-사진으로 기록한 현대사의 맨 얼굴, 퓰리처상 사진 부문 70여 년 의 연대기』, 박우정(역), 서울: 현암사, 2011, pp.208-209.
161) 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기자의 비극적인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그가 아이를 결국 도왔느니, 아이는 구호 양식을 받으러 가는 중 잠시 쉬던 것이고, 독수리가 좀 더 다가오는 것을 촬영해 극적으로 구성하려던 것 뿐 위험은 없었느니, 등등을 말한다. 즉, 이 사진이 상황의 거짓된 단 면이어서 전체 진상(眞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그가 오해를 받았다고 두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둔에 따르면 이번에는, 그가 사실을 전하는 기자답지 않게 사실과 다른 연출된 상황을 촬영한 것이 된다. 사진의 진실에 대한 신념으로 전사처럼 행동하는 사진기자에게 이러 한 두둔은 결국, 그의 신념이 거짓이라는 이상한 변호가 되고 만다. 게다가 이것은 사진이 진 실을 왜곡했다는 것인데, 사진은 거짓을 담았을 경우, 그 거짓까지도 폭로하는 매체다. 연출이 나 오해의 소지가 사진에 있다면, 결국 그것도 다 담고 있다. 사진은 당연히 잘못이 없다. 결국 촬영자가 지나치게 개입을 꺼렸거나, 또는 지나치게 개입하였다는 이유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된다 해도, 그것이 촬영자의 몫이 아닐 수는 없다.
<참고그림 18> 로버트 프랭크, [미국인들]의 수록 사진, 1959 다.162) 우리는 사진으로부터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촬영자가 무엇을, 어떻게, 왜 보는지, 즉, 파이닝거의 말처럼 그의 정신을,163)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말처럼 촬영자의 자기표현을 보고 있을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촬영자의 관심은 결국 그 자신을 드러낸다.
...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객관적 세계를 무한히 전유할 수 있게 해주는 기법이자 단 하나뿐인 자아의 유아론적일 수밖에 없는 [자 기]표현이다. ... 드러난 현실은 [카메라로 그 현실을 찍은] 개인의 기질을 보여준다. 현실의 어느 면을 잘라냈는지에 따라 기질이 드 러나는 것이다. ... 사진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그래 야 한다면) 사진작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진이 용감하게 주 관성을 좇게 해주는 도구라면 사진작가가 가장 중요해진다.164)
1947년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진 가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1924~)는 10여 년 뒤, 미국인들의 다양한 일상적 모습을 보여주 면서 또한 공통점도 표 현한 [미국인들]이라는 사진집을 발표했다. 여 기 실린 사진들은 비전
162) 다른 사람의 사진을 함부로 차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63) “카메라는 일종의 기계이다. 그의 시각은 문자 그대로 비정(非情)하리만큼 객관적이다. 카 메라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고, 반면에 사진가가 생각한다. 카메라는 아무 의지(意志)도 없고, 다만 사진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 그런데 그렇게 하자면, ‘사진적 시각’이 절대로 필요하다. ... ‘사진적 시각’이란 피사체나 상황을 사진의 입장에서(in term of the picture) 살피는 능력이다. ... ‘사진적 시각의 목적은, 사진가로 하여금 비록 기계로 만드는 사 진이지만 거기에 피사체의 요점(要點)을 정신의 산물로서 표현케 하는데 있다.” 파이닝거, 앞의 책, pp.100-101. (밑줄: 필자).
164) 수전 손택, 앞의 책, p.180.
문가의 사진처럼 초점이 흐리고 흔들리는 등의 거친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가 개입이나 연출을 하지 않고 순수한 관찰자적 태도를 취한 것처럼 느껴진다.165)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양식을 “주관적 리얼리즘”이라 고 명명하면서, 자신의 사진이 주관적 관심을 반영한다고 말했다.166)
“관점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사물의 본성을 과감하게 일그러뜨리 는 것 때문에 나는 자주 비난을 받았다. 사진가는 무관심한 눈으로 삶을 관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관점은 어쨌든 비판의 여 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비판이란 비난이 아닌 애정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다. 그것이 희망에 관한 것이든, 슬픔에 관한 것이든 다른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 다가 사진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본능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로버트 프랭크167)
그가 취한 두 가지 태도 중 사실 그는 후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찍은 사진은 얼핏 사실의 기록물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볼 수록 시(詩)적이기까지 한 주관적인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사진 을 보고 있으면, 사진이 가진 객관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의 사진들 은 세상의 이미지를 채집해서 만든 그 자신의 극(劇)적 세계이다. 이것 은 다큐멘트가 아니라 오히려 드라마에 가깝다.
프랭크의 사진뿐 아니고, 심지어 객관적 사실성에 목숨을 걸었던 시사 사진가인 카터조차 사진에 가미(加味)된 ‘연출 효과’로 인해 스스로 함 정에 빠졌지 않은가? 사진은 의도적으로 연출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너무 많은 조건들이 촬영자의 취향과 취사선택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연 출된다.
[미국인들]에 실린 사진중 하나인 <참고그림 18>을 살펴보자. 이것은 사진에 무엇이 찍혀 있는가보다 촬영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가 더
165) 수전 손택, 앞의 책, p.181, 참조.
166) 빌프리드 바츠, 『사진: 한눈에 보는 흥미로운 사진의 역사』, 정주하⦁신금선(역), 서울: 예 경, 2005, pp.137-139.
167) 위의 책, p.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