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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그 방식을 판화로 시도해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묵화에 숙달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종이를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한두 차례의 인쇄만으로, 밝은 여백(餘白) 속의 부드러운 그림자와 강한 그늘까지, 여러 톤을 한꺼번에 표현하였다. 이것은 바니시제판이 된 판 위에 먹의 농도 차이를 주어서 찍었으므로, 모노타입이나 바림 효과라고 할 수 있지만, 조형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수묵화와 판 화의 조형성이 만나서 새로운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한편, 아이들 부분은 원래 내가 해오던 방식인 명암의 단계적인 구축 방식으로 묘사하였고, 배경도 이미지는 사실적이었다. 그리고 인쇄된 아 이들 부분을 각각 오려낸 후에 풀을 발라서 배경에 놓고, 프레스로 돌려 서 붙이는 방식(콜라주)도 활용하였다.

이 작품은 매체적으로 사진, 회화, 판화의 특성이 혼재해있고, 기법적으 로나 조형적으로 한국 전통 판화인 반차도, 수묵화, 서양화 등의 특성도 섞여있으며, 심지어 내용면에서 동서양의 정서까지도 섞여있다. [걷는 아이들]은 나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혼성(混成)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

지역적이던 각각의 전통을, 삶의 반경이 확장된 현대에 활용한다는 것 은, 종합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이고, 여기서 또 다른 새로운 전통이 생 겨나는 것이다.

<참고그림 37> 뒤러, [묵시록]의 삽화

‘네 기사’, 1498 판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점층적

으로 변화시키면서, 인쇄와 번갈 아가며 완성하는 것이다.206) 구 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판각과 바니시제판은 둘 다 음화 (陰畵; negative)적 처리로서, 판 각되거나 바니시 칠 된 부분은 인쇄할 때 찍히지 않는다. 나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소거법을 시행한다. 즉 목판에서 찍히지 말 아야 할 부분의 이미지를 단계적 으로 점점 더 넓게 깎아 내거나 바니시 칠로 지워서 제거해나가 고, 이것을 인쇄와 병행한다. 소 거법을 시행할 경우, 단계적인 명 암을 구축할 수 있어서, 입체적인 묘사가 가능하고, 다층적인 밀도 를 만들 수 있다.

물론 단도의 판화에서도 명암 처리는 가능하다. 동판화나 드로잉에서의 명암 처리 방식을 도입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목판화[묵시록의 네기사]<참고그림 37>를 보면,207)

다색 판화에서 한판을 사용하여 단계적으로 깎아내며 찍어나가는 방법.” 『판화용어순화집』, 서울: 한국현대판화가협회, 2013, p.33, 참조.

206) “한 판에서 이미지 부분을 조금씩 제거해 가면서 다색판을 찍는 방식...” 곽남신, 『목판화 와 동판화』, 예경, 1994, p.84.

피카소는 1961~1963년 사이에 소거법을 이용하여, 일련의 리놀륨 판화(linocut)를 제작하였 다. J. 로스⦁C. 로마로, 『판화 기법』, 서승원(역), 서울: 1982, p.46 참조.

207) 뒤러는 베네치아 여행 후, 이탈리아의 미술을 접하면서, 동판화 양식의 명암 처리를 목판에 집어넣었다. “초기 목판화에서는 윤곽선을 주로 했지만 나중에는 대범한 선각으로 명암을 나타 낸 것이다 동판화같이 섬세한 선을 겹친다거나 교차시킨다거나 해서 보다 매끄러운 명암과 부 드러움을 목판화에서도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은 물체 표현은 이전까지 타블로나 뎃생, 동판화 의 영역이었으나, 97년경부터 뒤러의 목판화는 그 같은 동판화의 정밀함을 갖는 동시에 ...”

사카모토 미쯔루, 『西洋版畵史 槪論』, 구자현(역), 서울: 에이피인터내셔날, 1994, p.56 참조.

<참고그림 38> 뵈히트린 [메멘토모리], 1512년경 묘로써 명암을 만들어 입체적인

표현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 만 이것은 단층(單層) 위에, 각선 의 빽빽하고 성긴 정도로써 명암 을 만드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표현이다.

한편, 3층에서 10여 층까지 다단 계의 명암을 만들어 보다 입체적 인 표현을 가능케 한 키아로스큐 로(chiaroscuro) 방식도 있었다.

이 경우, 명암 단계를 다층으로 올 린다는 점은 내 판법과 같다. 하지 만 한 판을 점진적으로 제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목판을 단계별 로 미리 만들어 두고 이 판들을 초점 맞추어 찍는다는 점에서 다 르다.208) 이것은 오히려 다색판 법과 같은 방식이다.

그런데 내가 활용하는 소거법은 제판 단계가 진행될수록 판의 이미지 를 점점 더 넓게 없애버리기 때문에, 판은 전 단계의 이미지를 잃게 되 고, 또한 완성된 후에는 최종적으로 인쇄할 부분만 남고 다 지워진 상태 가 되어버린다. 즉 각 단계별로 이미지가 담긴 판이 없으므로, 다시 같 은 판화를 제작할 수 없다. 복수 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판화에서는 이런 비경제적인 방식이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키아로스큐로 기법에서 여러 판이 이용된 이유가 이것이다. 판은 판대로 보존하고, 얼마든지 다시 그 판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키아로스큐로 방식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장의 판을 사용

208) 키아로스큐로(명암을 나타내는 이탈리아어) 목판 기법은 16C. 초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다색목판법이다. 동일한 색 계통으로 명암을 단계적으로 나타내는 기법으로서, 단계마 다 목판을 따로 만들어서 인쇄했다. 구자현, 『판화』, 서울: 미진사, 1989, pp.28-29 참조.

하면 일관된 나뭇결과 그림 이미지를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키 아로스큐로 기법을 활용한 작가들에게는 묘사하려는 이미지의 구체적인 내용 외에, 우연적인 나뭇결이나 여기에 겹쳐진 이미지가 주는 감성은 어차피 표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회화를 대중적으로 보급할 삽화 나 인쇄물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서양의 목판법에서는 칼에 의한 선묘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나뭇결은 오히려 방해가 되는 요 소로서, 드러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초기 이 기법을 잘 활용한 뵈히 트린(Hans Wöchtlin)의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참고그림 38>

에서도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묘사한 선과 면 외에, 특별히 나뭇결은 보 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나뭇결은 내가 그리는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다. 내가 목판화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런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이미지 를 작품에 도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 것이다. 소거법으로 인한 복수 제작의 한계나 판각의 어려움은 내게는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보다 한 판을 사용함에 따라 점점 강화되는 나뭇결과 그것에 겹쳐진 이 미지의 일관성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한 판을 사용하는 소거법 을 취하는 것이다.

구체적 제판 방식은 완만한 날의 둥근 조각칼로 그림을 그리듯이 판각 하는 방법, 그리고 붓으로 목판에 바니시를 칠해서, 음화(陰畵)의 그림 을 그리는 방법,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즉 판각과 바니시제판을 각각, 또는 같이, 소거법으로 시행하는 것이 나의 제판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