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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화 작품에 회화적 특성이 나타나는 것은 작업에 회화적인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회화적인 과정이란, 판 위에 드로잉을 하는 것뿐 아니라 판각이나 바니시 제판(목판평판법)을 할 때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방 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처음부터 계획된 이미지를 그대로 완성하 는 것이 아니라, 소거법의 단계에 따라 점층적이고 즉흥적으로 완성을 해나가는 데서도 ‘회화성’이 생겨난다.176)

그런데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회화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그림은 작가가 창작한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라는 점이다. 사진이 아 무리 주관적으로 연출된다 해도 없는 세계를 창작했다고까지 말하기는

175) 촬영자의 부정적인 관심인, 혐오, 비난, 고발, 조롱 등과,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정보의 기록 등은 내 작업과 무관하여 본문에서 거론하지 않았다.

176) <참고그림 22>에서 소거법에 따른, [기차]의 드로잉과 제판 과정을 볼 수 있다.

<참고그림 21> [기차]의 2장의 자료 사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회화가 극사실적인 객관성을 추구한다 해도, 사 실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회화는 현실에 대 해 꾸며낸 이야기로서 거짓이 된다. 하지만 작가의 정신에서 속속 생겨 나는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때, 이것은 진실이 될 수 있다.

사진보다도 그림이 더 참일 수 있다. 사진의 참은 죽은 참이다.

그러나 그림의 거짓은 산 참이다. 사실의 세계에서 인격의 세계로 넘어가는 데는 가상(假像)이 필요하다. 칸트는 그것을 이데[理念]

라고 한다. ... 가상을 진짜라고 생각하면 미신이요, 가상을 가상이 라고 무시하면 망상이다. 그림을 사진이라고 생각하면 유치하고 그 림을 거짓이라고 무시하면 어리석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진실하 다. 그것은 영원한 실재가 현상을 깨뜨리고 나타났기 때문이다.177)

[기차]의 소재가 된 사진은 사실,

<참고그림 21>의 두 장의 사진이다.

하나는 기차가 건 널목 앞을 지나는 사진이고, 또 하나 는 백미러에 어머

니가 고개를 약간 앞으로 돌린 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기차는 찍히지 않 았다. 기차를 보라고 외쳐도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그 광경을 놓쳤던 것 이다. 사람도 사진도 ‘결정적 순간’을 놓치곤 한다. 하지만 그림에는 얼 마든지 지나간 기차를 그려 넣을 수 있다. 시간을 쫒아갈 필요도 없고, 순간을 포착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 시간이나 순간과 관련이 있다면, 그 림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과 관련이 있다.

회화가 어떻게 영원과 관련을 맺는가? 그것은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꿈꾸

177) 김흥호, 『생각 없는 생각』, p79-80.

<참고그림 22> [기차]의 판 위 드로잉과 1~4차 바니시제판

는 예술가의 허황해 보이는 꿈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지구의 둥그런 등 위에, 이 자기(磁氣) 를 띤 식탁보와 별들 사이에 한 인간이 의식(意識)이 있어, 이 별 의 비가 거울에 비치듯이 그의 의식에 비쳐 나왔다는 그것이다. 광 물(鑛物)의 층 위에 한 꿈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178)

그런데 플라톤은 예술가의 꿈을, 이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라는 꿈에 대한 꿈, 즉 ‘꿈의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그는 재현적인 조각 이나 그림과 같은 미술이 영원의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타락한 것으로

178) 사막의 사구(砂丘) 위에 불시착한 생 떽쥐베리(Antoine de Saint Exupéry 1900~1944)는 운석(隕石)을 발견하고 한없는 우주의 신비(神秘)를 느꼈다. 그러다, 불현듯 그 신비를 음미하 고 있는 자신의 의식이 더 신비롭다고 여긴다. 즉 무덤덤한 돌멩이 하나를 별의 비, 운석으로 인식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경탄함으로써,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자기의 정신을, 상상력 으로 충만한 하나의 꿈이라고 말한다. 쌩 떽쥐뻬리, 『인간의 대지』, 민희식(역), 서울: 文學出 版社, 1985, p.70.

<참고그림 23> 조셉 코수스, [세 개의 의자], 접는 나무의자, 사진, 사전 정의를 복사한 것, 1965 보았는데, 그 이유는 감각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가는 이렇게 진리로부터 한 단계 더 멀어진다. ... 이데아는 지 적으로 직관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의 본질적인 보편성을 바탕으 로 해서 감각적으로 묘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방적 예술은 이렇 듯 결코, 말하자면 ‘꿈의 그림자’ 이상의 어떤 것일 수 없다.179)

조셉 코수스 (Joseph Kosuth 1945~)는 [세 개의 의자]<참고그림 23>에서 플라톤의 예술관을 그대로 반복한다. 즉, ‘사전 정의’가 이데아라면, 나무의자는 현 실이고, 사진은 이데아로부 터 두 단계 떨어진 재현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 코 수스의 작품은 이 사물들이 아니다. ‘이데아, 현실, 재현 적 이미지의 관계’라는 바로 그 개념이다.180) 엄밀히 말 하면, 그 개념에 대한 재고

(再考)다. 왜냐하면, 이 유명한 개념은 플라톤에게서 차용(借用)된 것이 고, 코수스는 그것을 다시 아이러니하게 비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 그는 플라톤의 아이디어(idea; 이데아)를 가시적 사물들을 가지고 그 대로 재현해냄으로써, 플라톤이 예술에 가한 비판을 전복(顚覆)하고 있 는 것이다.

물론, 코수스뿐 아니라 지금 어떤 미술가도 플라톤의 오래된 예술관에

179) 미하엘 하우스켈러, 앞의 책, p.13.

180)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는 자료 형식의 예이다. 이 작업에서

‘진정한’ 작품은 개념이다.” 토니 고드프리, 앞의 책, 1998, p.10.

개의치 않는다. 코수스처럼 개념을 중심으로 한 이지적인 작품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 즉 이데아를 직관(直觀)하는 인간의 능력 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현실의 말단을 비약시키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감(靈感)이나 상상력에 의한 통찰(洞察)로서, 이것이 발휘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개념 작품인 [세 개의 의자]조차 냉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풍자적 재기가 넘치는 것이다.

열린 마음의 자유로운 유영은 어디에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닿 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은 직관과도 만나고 경험과도 손잡으며 세 계를 연결하고 참된 삶의 의미를 조명한다.181)

오윤은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182) 그가 말 한 세계의 확대란, 경험적 현실(現實)을 확대하는 것이면서, ‘삶의 참된 의미(眞理)’, 즉 이상(理想)을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은 현실도, 이상도 인식(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해버린다. 보 이는 감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즉 물질로써 정신 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회화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상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이상을, 죽음 속에서 영원을, 거짓 속에 서 진실을 꿈꾸는 것, 이것이 ‘거짓된 회화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