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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이나 순간은 개념적일 뿐이다.

인생이 끝나기 전에는 어떠한 대단한 순간이 온다 해도, 현실 안에서 시 간이 멈추거나, 흐르지 않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영원한 순 간’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 안에서 다.

46) 하이데거, 앞의 책, p.341.

그런데 이 정신적인 세계를 다시 물리적인 공간으로 가져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 작품이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만일 영원을 위해 무엇을 심으려거든 인간의 깊고 무한한 바탕, 즉 상 상력과 마음속에 심으라.”47)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영원성은 인간의 상상력과 마음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현실에서 좌절된 영원에의 꿈은 예술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 영원, 순간의 세 가지의 시 간성을 직접 논하기 전에, 내가 작업 속에서 시간성의 문제와 씨름했던 구체적 과정을 먼저 예로 들겠다.

[선생님]<그림 6>은 최초로 시도한 대형 목판화였는데, 강의를 마치 고 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담은 작품이다.48) 그런데 나는 원래 뒷모 습을 제작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초상화를 제작하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의 수업에서 자료로 쓸 백 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보니, 그 사진들은 모두 선생님의 모습을 담고 있었지만,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은 결정적인 사진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품을 담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습이 하나로 나타난 핵심적인 순간이 필요했지만, 백여 장 중에 그런 사진은 없었다. ‘영원한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사색에 잠긴 노학자의 모습, 젊은이처럼 열정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강의하는 모습, 아이처럼 웃는 모습 등등, 모 두 그의 모습이면서도, 어느 한 가지도 그 총체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사진들 중 하나를 소재로 하여 [선생님]을 제작했다.

사진은 그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49) 두 시간 동안 찍은 사진 중에, 내 가 그의 전체적인 아우라(aura)를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사진이 가장 마지막에 촬영한 뒷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얼굴을

47) 토머스 칼라일, 앞의 책, p.337.

48) [선생님]은 프레스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아서 찍었다. 처음 100호 정도 의 작품을 시도하면서, 큰 종이와 판을 다루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작품은 기계적으로 인쇄된 것 같지 않고, 그린 듯한 회화적인 느낌이 표현되었다. 나는 붓 대신 판으 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단 한 장의 판화만을 제작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즉흥 적으로 여러 색의 물감을 거듭 찍으면서 완성하였다.

49) <참고그림 15>

<그림 6> [선생님] (Teacher), 2003,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60×112cm

그리지 못했다. 그는 ‘얼굴이 얼의 골짜기’라고 하곤 했으니, 얼굴 없는 그림을 초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그의 아우 라가 담겨 있고, 또 그가 교실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 뒤를 쫓았던 나의 시선과 그 안에 담겨있는 외경심(畏敬心)이 표현되었다. 정작 표현하려 는 것은 담지 못했지만 그 대신 저절로 표현되어진 다른 무엇이 담기긴 한 셈이다.

6개월쯤 후에, 이번에는 전형적인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그것이 [밀이 보(密移步)]<그림 54>다.50) 나는 이 그림을 통해, 실존의 성숙한 인격 을 그려 보려했지만, 결과는 그의 종합적인 인상조차 잘 표현하지 못했 다. 애초에 사진으로 제대로 된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 작품에 그대 로 나타났다. 성공적인 초상화라면, 인물의 다양한 표정 속에서도 하나 의 얼을 찾아야 하고, 한 사람이 살아온 일생의 시간이 한순간에 드러나 도록 해야 하는데, 나는 그의 얼이 담긴 순간을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붙들지 못했다.

몇 년 뒤, 나는 그의 수업을 재촬영하였다. 그리고 [연경반(硏經班)]

<그림 7>을 제작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이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 었다. [연경반]은 초상화라기보다 하나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 수업이 곧 선생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수업 풍경과 인물을 일체화하였다.

이 일련의 작업은 나로 하여금, 무질서한 시간의 단편들의 의미 없음 과,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영원한 순간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 고 한 사람의 실존적 인격을 주제로 하면서, 그의 얼이 그림 속에 살아 나기를 소망하며 작업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그림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50) [밀이보]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칠판 위에 적힌 글자인 밀이보(密移步)란, 비밀스럽게 조금씩 발은 옮긴다는 뜻으로서, 식물의 성장은 눈에 띄지 않아도 꾸준하게 지속되 는데, 인간의 성숙도 이러한 꾸준함과 확고한 지향성을 가질 때, 결국 크게 발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향상일로(向上一路)라는 말처럼, 삶은 위를 향하여 오르고 오르는 하나의 길 이니, 그 길을 무던히 나아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뜻을 새기는 의미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기 타 그림에 수록하였다.

[밀이보]에서 칠판에 쓰인 글자는 뒤집혀져있다.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DECKS]에 나타난 글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당시까지 판에 밑그림을 그릴 때, 인쇄 시 원화가 뒤집히는 것에 개 의치 않았고, 글자가 포함된 경우라도 글자를 이미지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에 뒤집혀도 상관하 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지가 담고 있는 구체적인 순간의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 밑그림 을 처음부터 뒤집어 제판하여, 원화의 이미지가 바로 찍히게 한다.

것과 같았다. 그래서 만약 이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영원성의 성 취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림은 흩어져있는 구체적 사실들 속에 서, 총체적인 하나의 이상(Idea)을 상상(想像)해서 구현하는 것이고, 이 것은 시간 속에서 영원한 순간을 구하는 노력의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첫째, 이상적 가 치로서의 ‘영원’, 현실적 실제 상황으로서의 ‘시간’, 그리고 이 둘의 만남 의 지점인 ‘순간’에 대하여 살펴보고, 둘째, 삶이나 작업에서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영원한 순간인 ‘지금’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시간, 영원, 순간

시간에는 세 가지의 시간의 모습, 즉 흘러가는 현실적 ‘시간’, 흐르지 않는 ‘영원’, 시간과 영원의 만남인 흐름을 멈춘 ‘순간’이 있다. 그리스 고대 철학에도 일찍이 시간의 이러한 세 가지 개념이 존재했는데, 흐르 는 보편적인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 시간이 계속됨 또는 시간이 계 속됨으로써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은 이언(Aeon), 시간 속에 유의미한 사건이 일어나는 때, 즉 주관적인 한 때인 순간은 카이로스 (Kairos)라고 하여, 지금까지 시간에 관한 많은 담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했다. 나의 작업에서 이 세 가지 시간 개념은 각각 중요한 역 할을 한다. 현실적 시간은 내 그림의 소재이고, 영원은 내 그림의 주제 이며, 순간은 내 그림의 실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고 있다. 시간은 삶 의 배경이 아니라 시간이 곧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51) 인간은 시간에 따라 수동적으로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시간을 능동적으로 꾸려나가기도 한 다. 시간을 멈추거나, 저장하거나, 되돌리거나, 빨리 앞당기거나 하는 능 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정신적인 힘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시간, 즉 영원을 삶에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정신적인 힘

51) “이 땅에서의 우리 삶 전체는 시간 위에 서 있고,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의 운동(Movement)이며, 시간의 추진력(Time-Impulse)이다. 시간이 그것을 만들어내며, 시간이 그것의 재료다.” 토머스 칼라일, 앞의 책, p.205.

<그림 7> [연경반] (硏經班; Sunday Class), 2008, 목판화(한지에 먹), 118×80cm

을 발휘하는 때를 순간이라고 한다. 예술 작업 역시 이러한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내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은 이 흘러가는 시간의 장면들이다. 일상의 덧없고 무의미한 그저 그런 한 때의 장면을 선택해서 그림의 소재로 가 져온다. 이 장면들은 마치 흐르는 강물에 떠가는 나무 조각이나 잎사귀 처럼, 작은 기념물이 될 만큼도 특별하지 않은, 사라져가는 삶의 단편이 다. 나는 이 시간의 조각을 이렇게 골라냄으로써, 그리고 그림이라는 피 난처로 옮겨 담음으로써, 이 무상한 흐름을 벗어나게 할지 모른다는 희 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림은 마법이나 기적의 산물이 아니다. 그림도 단지 종이나 천 따위의, 시간에 허약한 또 다른 물질이다. 황금이나 금강석으로 만들 었더라도, 물질인 이상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작품의 정신적인 부분 역시, 그것이 기억과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 남아있게 될 지라도, 결국 인류가 사라지는 날에는 함께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 인생 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즉 예술은 영원에 도전하는 헛된 수고인 것이다.52)

지치지도 않고 만들었다 녹였다 하면서/ 청동으로 주조해 만들어 놓고는,/ 제법 그럴듯한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다./ 이 오만한 무 리가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신들의 형상들이 거창하게 서 있긴 하지만-/ 지진이 일어나 그것들을 파괴해버렸고,/ 또다시 하나로 녹아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지상에서 하는 일이란 그것이 어떻든 간에, 언제나 한 낱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53)

52) “사르트르와 까뮤 그리고 영향력 있는 현대 사상가들이 택한 하나의 길은, 인간의 열망을 실 존의 불합리한 증거로서 이해하는 데로 인도된다. 인간은 그의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정의 와 그 실현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는 부정과 비극으로 가득 차있는 세계 안에서 죽게끔 저주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 실존이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희망의 꿈을 가지고, 자신의 공포를 진정시킬 것을 선택한다. 따라서 오직 인간에게 걸맞은 비문은 사 르트르에 의해서 제공된 ‘인간은 헛된 수고’라는 것이다.” 서배식, 앞의 책, p.211. (밑줄: 필 자).

5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역), 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6,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