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일관된 나뭇결과 그림 이미지를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키 아로스큐로 기법을 활용한 작가들에게는 묘사하려는 이미지의 구체적인 내용 외에, 우연적인 나뭇결이나 여기에 겹쳐진 이미지가 주는 감성은 어차피 표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회화를 대중적으로 보급할 삽화 나 인쇄물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서양의 목판법에서는 칼에 의한 선묘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나뭇결은 오히려 방해가 되는 요 소로서, 드러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초기 이 기법을 잘 활용한 뵈히 트린(Hans Wöchtlin)의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참고그림 38>
에서도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묘사한 선과 면 외에, 특별히 나뭇결은 보 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나뭇결은 내가 그리는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다. 내가 목판화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런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이미지 를 작품에 도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 것이다. 소거법으로 인한 복수 제작의 한계나 판각의 어려움은 내게는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보다 한 판을 사용함에 따라 점점 강화되는 나뭇결과 그것에 겹쳐진 이 미지의 일관성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한 판을 사용하는 소거법 을 취하는 것이다.
구체적 제판 방식은 완만한 날의 둥근 조각칼로 그림을 그리듯이 판각 하는 방법, 그리고 붓으로 목판에 바니시를 칠해서, 음화(陰畵)의 그림 을 그리는 방법,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즉 판각과 바니시제판을 각각, 또는 같이, 소거법으로 시행하는 것이 나의 제판 방법이다.
<참고그림 39>
[사원]의 부분
이 없어서 쓰지 않는다. 목판은 또 나무를 종단 (縱斷)으로 자른 세로결 무늬의 ‘널목판’과, 횡단 (橫斷)으로 자른 ‘눈목판’으로도 나뉘는데, 눈목 판은 눈목판화(wood engraving)에 쓰이는 결이 나타나지 않는 단단한 판으로서,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즉, 내가 활용하는 목판은 세로의 결이 있는 널목판이나, 널판의 합판이다.209)
특히, 나는 합판(veneer)을 주로 사용한다. 합판 은 얇게 켠 여러 장의 널빤지를 합성수지 접착제 로 붙여서 만드는데, 합판을 만드는 압축기의 크 기 제약으로 인해, 보통 121×242cm(四八판), 91×182cm(三六판)의 표준 크기로 생산된다. 내 가 주로 활용하는 것은 사팔(四八)판이다.210) 합 판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크기의 제약이 적고 가볍고 저렴한 등의 편의성 때문이다. 하지만 합 판은 1~2mm 가량의 널판을 여러 장 붙인 판으 로서, 밑의 판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얕게 판 각해야만 한다. 이것은 완만한 판각이나 바니시 제판법을 개발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합판이라고 해도 나무를 종단으로 자른 널판을 붙인 것이므로, 나뭇결 을 가지고 있다. 널목판에 나타나는 나뭇결은 눈목판에서의 나이테를 말 하는 것으로서, 계절에 따른 성장 속도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와 같은 온대 지역의 나무는 봄에 많이 자라고, 여름에 는 성장이 둔해져서, 다음 봄까지는 아예 성장을 멈춰버린다. 이때, 3~5 월에 자란 부분을 춘재(春材)라 하고 6~9월에 자란 부분을 하재(夏材)
209) 널목판은 나무의 결을 따라 자른 종단면을 가진 나무판을 말한다. 구자현, 앞의 책, p.38 참조.
210) “베니어판은 통나무를 엷게 벗겨가며 도려내어 이것을 3~7장 직각으로 붙이는데, 그 사이 에 전용 접착제를 칠하여 압축기로 압착한 것이다.” 홀베인 공업(주)⦁(주)신한화구(지음), 『물 감의 과학; 繪具の科學』, 한복린⦁황인숙⦁박유복(역), 서울: 도서출판 예경, 1999. p.127 참 조.
<참고그림 40>
[웃고 있는 어머니] 부분
라 한다. 나뭇결은 춘재와 하재의 나무 세포의 밀도 차이에 의해서 생긴 다.211)
내가 널목판이나, 널판의 합판을 주로 이용하는 것은 나뭇결 때문이다.
그림 이미지와 함께, 이것을 또 하나의 이미지로서 수용하는 것이다. 목 판화가 회화를 보급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일 경우, 나뭇결은 전혀 의미 가 없고, 오히려 이미지를 판각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나 내게 나뭇결 은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고, 따라서 목판은 단순히 복수성을 위한 수단 이 아니라 작품에 독특한 조형성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나는 나뭇결의 무늬가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서 목판을 선택한 다.
주로 사용하는 목판은 소나무로 만든 ‘미송(美松) 합판’이고, 소나무 원 목 판을 쓴 경우도 있다.212) 소나무를 선호하는 이유는 결이 굵고 뚜렷 한 나무이기 때문이다.213) 미송 합판을 사용한 [사원]<그림 10>의 부 분<참고그림 39>을 보면, 거친 나뭇결이 사실적 이미지를 자연적인 추 상무늬와 겹쳐보이도록 한다. 그리고 소나무 원목 판으로 만든, [웃고 있는 어머니]<그림 14>의 하늘 부분<참고그림 40>을 보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나뭇결이 이미지보다 더 강한 인상을 준다.
소나무는 결이 굵은 특징 외에, 연질 부분이 물을 잘 머금고 있는 특징 이 있다. 먹과 물감을 판에 입힐 때, 다른 목판보다 더 많이 올라가고 잘 마르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쇄된 색도 훨씬 풍부하고 도톰한 느
211)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김영사, 2004, pp.23-25 참조.
212) 미송(美松)은 북미 서부 지역의 소나무를 말하지만,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나무는 이름만 미 송 합판으로 불릴 뿐, 뉴질랜드산 적송(赤松)으로 만든 것이다.
213) 박상진, 앞의 책, p.2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