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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거법을 활용하여 제판을 점층적으로 해나간다. 제판 단계 는 판화 작품을 위한 사라져버릴 과정일 뿐이지만, 나는 필요 이상 으로 정성을 쏟곤 한다. 그 이유 는 ‘그리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 기 때문이다. 칼질이나 붓질과 같 은, 감각적인 작업은 작품을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 중 하나다. 내가 판화 작업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 리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 은 바로 판을 만드는 과정이 회 화적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제 판 단계에서, 첫째, 드로잉을 하 고, 둘째, 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칠하듯이 판각을 하며, 셋째, 붓 으로 바니시를 칠하면서 이미지 를 만들어 간다.

<참고그림 27>은 [꽃시장]<그림 2>의 판의 초기 모습이다. 보통은 연필이나 콘테로 드로잉을 하지만, 이 작품처럼 100호 가량의 큰 판인 경우, 먹으로도 한다. 형광등과 오른쪽 꽃바구니 윗부분 등이 판각이 되 어있고, 흰색 바니시로 막음 칠을 하고 있는 중이다.

드로잉 과정은 수공적으로 그린 것이어서,189) 구체적인 사실은 가감(加

189) 내 작업의 사실성으로 인해, 종종 사진 제판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나는 사진 이미지를 소재로 할 뿐, 손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직접 판각과 바니시제판을 실시하여 판을 만

<참고그림 28> [꽃시장] 1차, 5차, 7차 제판에서 시행한 드로잉의 변화

減)되고 추상화되며 변형된다. 그리고 인쇄를 하고나면 드로잉이 사라지 기 때문에, 각 제판 단계마다 드로잉도 재차 시행해야 하는데, 따라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즉흥적으로 계속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참고그림 28>에서는, 1차 제판에서 먹과 콘테, 5차 제판에서 콘테, 7 차 제판에서 갈색 콘테로 드로잉 한 것을 볼 수 있다. 후반의 제판에서 는 흰색 바니시 칠이 밑그림의 역할을 대신하므로 더 이상의 드로잉은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색을 넣어 제작한 것과 먹으로만 제작한 두 가지 버전이 있 다. 색 판의 경우 중앙에 있는 한 송이의 빨간 꽃과 인물의 옷 부분만 모노타입으로 찍고, 그 외는 네 가지 색(노랑, 빨강, 파랑, 먹)을 번갈아 가며 30여 회 찍었다. <참고그림 29>는 2~11차의 제판 과정이다. 이 렇게 여러 단계 제판을 진행하고 인쇄를 거듭해서 톤을 쌓아 완성하기 때문에, 인쇄 역시 회화성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점층적으로 판에 직접 이미지를 만드는 제판, 특히 바니시제판을 한 경우를 몇 가지 더 살펴보겠다.

든다.

<참고그림 29> [꽃시장] 2~11차 제판

바니시제판의 3가지 예

나는 새로운 판화 기법을 개발하고 실험하였기 때문에, 작품마다 제판 과정이 다양해서 하나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내 판화 의 회화적인 느낌은 주로 바니시제판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이 방법이 들어가는 세 작품의 제판 과정을 살펴보겠다. 첫째, 판각과 3가지 색으 로 인쇄한 [희원언니]<그림 11>, 둘째, 바니시제판과 먹으로 인쇄한 [흰 장갑]<그림 24>, 셋째, 판각과 바니시제판을 동시에 활용하고, 색 과 먹을 같이 사용한 [꽃시장]의 제판 과정을 비교해 보겠다. 이 중에서 [꽃시장]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참고그림 30>은 [희원언니]의 제판 과정 중 일부이다. [희원언니]는 3번의 판각, 5번의 바니시제판을 하였다. 당시에는 먹(검은색)을 사용하 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운 톤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 색(노랑, 빨강, 파 랑)의 농도를 진하게 하여 롤러로 색을 입히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인 쇄하였다.190) 그래서 현재의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색상이 진하지만,

190) 물감의 농도에 따라 물감을 입히는 도구도 달라지는데, 물감이 진할 경우 롤러를 사용하고, 묽은 경우에는 솔이나 스펀지를 사용한다. 이에 관한 것은 Ⅴ장 스펀지 인쇄 부분에서 다루었 다.

<참고그림 30> [희원언니]의 제판 단계. 왼쪽 위부터, 드로잉과 1차 판각, 2차 판각과 1차 바니시제판, 3차 판각과 2차 바니시제판, 나머지는 3~5차

바니시제판

채도가 많이 떨어졌다. 거듭된 인쇄로 인해 제판한 부분의 바니시도 계 속 탈각(脫却)되었는데, 그래서 마지막 두 단계의 제판은 인물 표정을 완성하려는 목적과 함께, 탈각된 판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시행하였다.

이런 바니시의 탈각 현상은 이 작품뿐 아니라 여러 차례 인쇄하는 경우 늘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이것은 이 제판법이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안정된 제판법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회화적인 효과를 즉 흥적으로 살릴 수 있는 노하우가 쌓여있다면, 오히려 바니시가 벗겨지는

<그림 24> [흰 장갑] (White Glove), 2007, 목판화(한지에 먹), 60×80cm

정도에 따라, 이 ‘단점’을 이용해서 중간 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흰 장갑]<그림24>191)은 색 없이 먹으로만 인쇄하였다. 그래서 제판 단계<참고그림 31>를 보면, 점점 밝아지는 톤의 변화를 더 잘 볼 수 있다. [흰 장갑]은 판각을 하지 않고 바니시제판만을 활용함으로써, 석 판화처럼 이미지는 더욱더 회화적으로 표현되었다. 바니시제판은 석판화 에서 붓을 사용할 때처럼, 판에 붓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하는 제판 이기 때문이다.

나는 판각 역시 완만하게 하기 때문에, 칼자국은 선묘라기보다 칠을 한

191) '하천변은 도시 속의 여백처럼 시민들이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시커먼 고가 도로가 지나 고, 멀리 아파트들이 둘려있다. 무성한 갈대와 억새는 하수를 덮고 있다. 도시 사람들은 자연 도, 자연스러운 삶도 잊은 듯이 살지만, 가끔 이곳에라도 나오곤 한다.' 필자의 작업 노트 중에 서.

<참고그림 31> [흰장갑]의 드로잉과 1~5차 제판

것 같은 흔적으로 되어있다. 일반적인 목판화에 비하면 판각도 회화적인 것이다. 그러나 조각칼이 목판과 부딪히며 만드는 각선들은 역시 회화적 이기 전에 조각적이다. 그에 비해, 필선(筆線)을 구사할 수 있는 바니시 제판은 완전히 회화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흰 장갑]을 이 기법으로 제 판함으로써, 무성한 갈대 수풀의 점층적인 톤의 변화를 자유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작업에서 회화적인 표현은 주로 제판 과정에 있다. 그런데 제판은 사진으로부터 판화를 연결하는 수단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소거법의 단 계마다 판 위에 만들었던 회화적인 표현들은 촬영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전혀 남지 않는다.192) 소재로 채택한 사진 이미지가 판화에 조형성을 남 기지만 결국 자료일 뿐이듯이, 회화적 과정도 그렇게 판화에 흡수되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제판 단계의 회화적 표현 자체는 사라졌지만 그 효과는 판화 작품에 그대로 옮겨져, 판화를 회화적으로 만들고 무엇보다

192) 판에는 마지막 제판 단계가 남긴 하는데, 이때는 이미 많은 부분이 지워져 없애진 상태이 며, 전체 균형이 깨진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런 아쉬움 때문에, 번거롭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제 판의 각 단계를 촬영해 두곤 하였다.

빛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때문에, 사라진 것도 아니다. 즉, 내 작업의 가 장 중심에 있는 회화적 과정은 영원성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직 접 ‘그리면서’ 추구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