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빛의 표현을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여긴다. 삶의 일상적 단편이 어둠 속에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래서 지워지지 않 을 영원한 순간이 되었다고 여겨질 때, ‘그 순간의 빛’은 그림을 살아나 게 한 것이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1: 4, 5)123)
이 구절에서 ‘사람들’ 대신 ‘그림’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내 작업에 그대 로 적용된다. 즉, 빛은 존재로부터 오고, 빛은 그림의 생명이 되며, 어둠 속에서 빛나지만, 어둠을 뚫고 기어이 빛나는 것이다. 어둠이 빛을 이기 지 못한다는 말은 정말 그렇다. 빛 때문에 어둠이 밝아질 수는 있어도, 어둠 때문에 빛이 어두워질 수는 없다. 오히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 은 더욱 빛난다. 내가 그림 속에 어둠을 쌓아가는 것은 빛을 얻기 위한 것이다.
[동생의 결혼식; 먹]<그림 18>과 [신부; 색]<그림 19>는 한 쌍으로 계획하여 작업한 것인데, [동생의 결혼식]은 어둠의 이미지로, [신부]는 빛의 이미지로 작업하였다.124) 우선, [동생의 결혼식; 먹]은 폐백실 문 밖 어둠에 가려진 채 구경하는 신부의 가족들의 심경을 담은 것으로서, 문밖에서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작업한 것이다. 신 부가 있는 폐백실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어둠 속에 숨겨진 언니의 마음 을 비추고 있다. [신부]는 밝은 조명 속에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한 반 면, [동생의 결혼식; 먹]은 그늘 속에 잠겨있는 모습으로, 먹으로 무겁고
123)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가톨릭용)
124) ‘결혼식 시리즈는 내 언니의 결혼식이라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소재로부터, 보편적으로 결 혼이라는 삶의 큰 계기가 당사자와 가족에게 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화 작품 이다. 신부와 신부의 언니의 얼굴을 확대하여 시리즈로 제작하였다.’ 필자의 작업노트 중에서.
두 작품은 각각 색과 먹 버전의 작품도 있다. 기타 그림에 수록하였다.
<그림 18> [동생의 결혼식; 먹] (Sister's Wedding; black version), 2013, 목판화(한지에 먹), 165×121cm
어두운 느낌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작품에도 빛이 비치고 있다.
한편, [신부; 색]은 화장 중인 신부의 얼굴이 거울에 비친 것을 포착하 여 먹과 함께 색도 써서 제작하였다. 인륜지대사라 하는 결혼의 문턱에 선 신부의 심경은 복잡다단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 단순한 기쁨도 슬픔 도 아닌 불안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불안 위에는 희망의 의지도 있다.
따라서 인물의 표정에는 불안도 보이고 희망과 의지도 보여야 한다. 이 것이 앞 장에서 말한 ‘불안한 믿음’이다. 그리고 어둡게 느껴지기도 하고 밝게 빛난다고 느껴지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어둠 속의 빛’이다.
이것은 [동생의 결혼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두 작품이 함께 있을 때는 하나는 빛, 하나는 어둠을 표현하는 것이 되지만, 따로 있을 때는 각각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둠 속의 빛’이 표현될지 아닐지에 내 작품이 살아날지 살아나지 못할지가 결정된 다. 즉, ‘어둠 속의 빛’이 나타날 때, 나는 ‘그림이 살았다’고 여긴다.
나는 이미 이 글에서, 작품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칭하기 위해, 그림 이 살았다든가 그림의 생명이라든가 하는 말을 쓰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되 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많은 작가나 감상 자들이 이미 경험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언급해온 것이므로 오히려 보 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경험하고 언급한 작가들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 실체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우선, 그림이 무엇이기에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일까? 그 첫 번째 조건은 그림(작품)이 사람처럼 몸(물질)과 정신(개념)이 함께 있다는 점 이다. 그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감성적 정서와 이성적 개념이 종이, 물감 등의 물질로 구현된 것이다. 즉, 그림은 물질로 조형화된 정신인 셈이다.
아무리 천하다 할지라도 물질은 ‘정신’이며, ‘정신의 구현’이다. 그 리고 물질이 아무리 존귀하다 할지라도, 그 이상이 될 수 있겠는 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 상상할 수 있는 물건, 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물건, 그것은 더 고차원적이고 천상적인,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상상할 수 없고, 형체도 없고, 너무도 찬란하여 어두 운 것의 의복, 즉 옷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25)
칼라일은 고귀한 왕의 망토든 천한 집시의 담요든, 물건이란 나름 ‘시 적 정신’이 있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126) 물건은 곧 정신의 구현이라 는 것인데, 그의 저서 [의상철학]에서 핵심어인 ‘의복’이 바로 이것을 의 미한다. 예술 작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고 정신의 현현(顯現)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작품은 생명을 얻고 살아날 수 있다. 고 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가로서 자신이 직관(直觀)한 사 실, 즉 그림이 살아있다고 말했다.127)
인간이 만든 물건 중에서도 예술품이라는 것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다.
물질이자 정신의 결합인 그림은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생명을 지닌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128) 인류사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기도 해온 것은 바로 이 소망이며, 정말 놀라운 일은 돌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화에서가 아니고는 단 한 번도 돌이 숨을 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지금까지도 모든 예술가들이 이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생명 넘치는 시를 쓰고자하는 자신의 열망을 피그말리온 신화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옛날, 넘치는 정열로 기도하며/ 피그말리온이 돌을 껴안자,/ 마침 내 차갑게 빛나는 대리석에서/ 느낌의 빛이 그 위로 쏟아졌듯이,/
나는 싱싱한 정열만으로/ 빛나는 자연을 내 시인의 가슴으로 안았 다./ 그랬더니 마침내 숨결이, 온기가, 생명의 고동이,/ 그 자연의
125) 토머스 칼라일, 앞의 책, p.123.
126) 위의 책, 같은 면.
127) “예술은 살아 있다는 걸 너에게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빈센트 반 고 흐, 앞의 책, p.198.
128)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기가 상아로 만든 조 각을 간절히 사랑하게 되어,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자, 정말 조각상 이 생명을 가진 여인이 되었다 한다. 토마스 벌핀치, 앞의 책, pp.115-117 참조.
<그림 19> [신부; 색] (Bride; color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21cm
몸 안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것 같더라./ ... 그것은 내 무한한 생 명의 메아리더라.129)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육체만 있고 영혼이 없으면 시체가 되고, 영혼만 있고 육체가 없으면 유 령이 된다. 죽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잠들어있고 죽어있는 사 물이 아니라 정신이 깨어있고 생동하는 실존이다. 즉, 본질적으로 서로 모순 지간인 육체와 영혼(정신)이 기적적으로 화합하여 긴장 속에 조화 를 이룬 상태가 살아있는 생명이다.130)
인간은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육체 안에 우연히 존재하는 정신 도 아니며, 유물론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우연히 정신을 수용하고 있는 육체도 아니다.131)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이미 기적을 부여받고 생명을 누리고 있지만, 동 시에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 언제나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인 간이 누리고 있다고 여기는 생명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온전한 생명이 란 소멸(消滅)하는 이런 것이 아니라 불멸(不滅)일 것이다.
육체에 국한된 생명을 정신적인 생명 즉, 인격, 얼, 영(靈)과 같은 정신 적 가치로 바꾸어야만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생존의 문제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쫓고 문화를 창조해가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작품 속에서 그 정신적인 가치가 빛나는 영원한 생명을 경 험하곤 하는 것이다.
129) 쉴러의 「이상과 생명」(The Ideal and the Life)이라는 시를 다음 책에서 부분 재인용.
토마스 벌핀치, 앞의 책, p.117.
130) 물론 이 정의는 생명에 대한 과학적인 주장은 아니다. 사실 과학에서도 생명현상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 물리학과 화학은 생명체 내에서 물리화학 작용이 일어날 조건을 정의하고 그런 작용이 정지되는 이유를 밝혀내지만, 물리화학 법칙으로는 생명체를 정 의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결코 생명활동을 해명할 수 없다.” 마이클 폴라니 (Michael Polyanyi)의 주장을 다음 책에서 인용. 보리스 카스텔; 세르지오 시스몬도, 앞의 책, p.213.
131) 서배식, 앞의 책, p.222.
신성한 것이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나타나고 영원이 시간적 형 상을 통해 다소나마 보이도록 하라! ... 그대는 그런 예술품에서 시 간을 통해 내다보는 영원, 눈에 보이게 된 신성을 인식하게 될 것 이다.132)
비록 그림이 시간의 산물(産物) 곧 시간적 형상에 불과하다해도, 그림 (예술품)은 인식할 수 없는 근원적 존재의 신성(神聖)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며, 영원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그림의 생명은 오히려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넘어서게 된다.
사실, 그림은 인간의 딜레마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 사물만 존재하면 시체처럼 무가치한 쓰레기가 되고, 개념만 존재하면 유령처럼 실체 없는 공상(空想)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생명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은 지녔 지만 결국 생명을 가지게 되는 그림은 얼마 없다. 사물과 개념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상태일 때만이 살아있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이 만든 예술품에 대해 “생명 없는 작업이란 농담에 불과하다.”133)는 글을 썼다. 그는 예술품 전체에 대해 조롱을 한 것이지 만, 그의 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만약 작품에 생명을 넣을 수 있다면 그 작품은 농담의 처지를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림이 가 지는 생명은 이미 얼과 영(靈)과 같이 정신적 가치로 승화된, 영원성의 생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 림의 생명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죽음에 임한 고흐가 지니고 있었던 마 지막 편지에는, 그가 그림을 위해 생명을 걸었고 정신을 바쳤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134)
한편, 뭉크가 말하는 ‘영혼의 회화(soul art)’란 역시 생명을 가진 그림 이라고 볼 수 있다. 뭉크도 고흐처럼, 그것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 그가 [병든 아이]<참고그림 4>를 극렬한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조야(粗野)한
132) 토머스 칼라일, 앞의 책, p.335.
1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p.256.
134)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 렸지. 그런 건 좋다. ...” 빈센트 반 고흐, 앞의 책,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