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나 믿음은 어떤 대상을 향한 심정이나 행위를 말하는 단어지만, 실제로는 그 대상이 당장 존재하지 않을 때 생기는 심정이다. 무엇을 불 안해하거나 믿는다고 할 때, 사실은 그 무엇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 고, 그 무엇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심정을 말한다.
그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한 불안, 모든 인간이 감히 알고자 하지도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불안이며, 인간 세상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불안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등이다.41)
특히 근원적인 불안과 믿음이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대상, 엄밀히 말해 대상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자신의 근원, 죽음 등에 대한 무 지(無知)로 인해 발생하는 심정이다. 유한한 삶에 처한 인간이 한계 너 머의 미지의 영역을 허무로 예상할 때 불안이 생기고, 영원한 충실로 받 아들이고자 할 때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다. 근원적인 불안과 믿음은 살 아가는 동안 떨쳐버릴 수 없는 삶의 필연적인 두 조건이 된다.
사람은 근원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바위처럼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대신, 흔들거리는 불안 속에서 의지할 바를 구하며 살아간다. 즉,
41)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 p.196.
불안한 외줄을 타고 피안(彼岸)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 실존의 인 생이다. 언젠가는 불안을 떨쳐내고 믿음을 완성하려고 계속 나아가는 것 이다. 그런데 흔들리는 줄 하나에 의지한다는 것은 도리어 믿음이 있다 는 뜻이다. 기이하게도 불안에 의지하는 믿음이다. 흔들리는 줄, 또는 흔 들리는 나침반에 의지하듯, 이렇게 ‘불안에 의지하는 것’ 이것이 ‘불안한 믿음’이다. 삶은 ‘불안한 믿음’이 인도하기에 바짝 긴장해 깨어있는 것이 다.
[밤]<그림 5>, 차도 사람도 뜸한 깊은 밤, 사방으로 열린 큰길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둠과 적막이 주는 불안과 긴장 속에 있다. 한편, 건 너편에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이 있고, 그 빛은 인물의 머리 위 에서 빛나고 있다. 삶은 왜 존재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풀리지 않는 문 제들로 암담한 밤과 같다. 하지만 어디선가 비추어오는 하나의 빛을 희 망으로 삼고 실존적으로 삶을 마주하고자 하는 의지를 자화상으로 표현 했다.
[밤]에는 수직 수평의 십자 구도가 숨어있다. 화면 위에 있는 불빛과 그 아래 곧게 선 인물에 의해 수직선이, 그리고 검은 하늘과 빛을 반사 하는 차도에 의해 지평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을 통해 서 특별히 어떤 종교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의 경 건한 입장, 그것은 결국 높은 하늘 아래, 그리고 넓은 땅 위, 그 가운데 라는 것을 표현하였다.
지금 세계는 밤이다. ... 인생을 덧없는 꿈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편히 잠들어 있다.”42)
어느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니에게 부탁해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사진을 찍었다. 별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진에는
‘어둠 속에, 빛이 빛나는 순간’이 있었기에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여 기서 어둠이 불안이라면 빛은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둘은 따로
42) 토머스 칼라일, 앞의 책, 2008, p.434.
<그림 5> [밤] (Night), 2008~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0×80cm
따로 있지 않다. 어두운 밤이기에 등불이 켜지듯이, 불안 속에 있기에 믿음 또한 요청되는 상황을 그리려고 했다. 즉 불안과 믿음이 함께 있는 상황, 바로 그것이 ‘불안한 믿음’이다.
불안한 믿음이란 내 작업의 주된 주제이기도 하지만, 내가 작업을 해나 가는 과정 중에 겪는 근본적인 기분, 또는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믿음과 불안의 본질을 각각 살펴보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모순되 는 두 개념이 어떻게 ‘불안한 믿음’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해보겠다.
(1) 믿음의 요청
작업과 삶은 둘 다 ‘과정’이다. 과정은 어떤 결과를 향한 길(道)이므로, 결과에 대한 확신을 전제한다. 작업은 작품을, 삶은 죽음을 결과로 한다.
그런데 작품이나 죽음의 결과로서의 가치는, 도달하기 전에는 절대로 드 러나지 않는다. 목적지는 미지(未知)인 것이다. 목적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길(과정)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방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결과를 선험한 것 같은 확신, 즉 확실한 믿 음이 요청된다.
믿음은 나침반으로 비유할 수 있다. 나침반만 있으면 망망대해나 사막 에서도 길이 생기지만, 나침반이 없다면 길은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믿 음이 없다면, 삶의 길을 잃고 계속 나아갈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침반이 보이지 않는 지구의 힘(磁氣)에 의지하고 북극성(北極星)을 향하는 것처 럼, 믿음도 보이지 않는 근원적 힘에 의지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맹종이나 부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원을 부정한 채, 자신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나아가면 그것은 결국 방황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은 스스로 성취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믿고 싶다고 믿을 수는 없다. 믿음을 줘야 믿을 것이 아닌가? 흔적이라 도 보아야 의지할 것이 아닌가?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에 관한 도마의 일 화는 믿음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제자들
앞에 부활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마가 환영의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 육체의 흔적을 요청하는 장면이다.43) 증거를 요구하는 도마의 태도는 불신(不信)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기에 예수는 검증을 허락한다.
하지만 검증 후, 도마가 그제야 믿는다고 하자 예수는 말한다. 보지 않 고 믿는 것이 더 낫다고. 그런데 이 말은 말 그대로 맹신(盲信)하라는 것이 아니다. 현상(現象)을 보지 말고 실상(實相)을 직관(直觀)하라는 말이다. 이미 그의 말을 들었고 행하는 것을 보았다면, 즉 그와 함께한
‘시간’을 통해 이제 ‘존재’를 알만하지 않겠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이 훤 하게 밝아오면,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도, 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계시(啓示)는 이미 편재(遍在)했으니, 인간의 직관만 작용하면 믿음은 저절로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의 의혹은 이제 완전히 해소되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위 의 말을 뒤집으면, 직관이 작용하지 않는 한, 계시는 보이지 않고 믿음 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던져진 수많은 진리의 말씀은 자 명한 것이 아니다. 내게 와서 직관도 체득도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 전히 미지(未知)의 것이다.
차라리 실존에게는 도마의 의심이 어떤 믿음보다도 소중하다. 도마의 의심은 무엇인가? 확신을 찾아 더듬는 눈먼 자의 손, 불안이다. 도마인 들 믿고 싶지 않았을까?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대답을 듣게 되어도 절대 로 거저 믿지 않겠다는 도마야말로 실존을 대변한다. 도마는 믿고 싶지 만 믿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납득시키도록 불가침(不可侵)의 모든 영 역을 넘어서 더듬어 간다. 눈을 뜨기 위해, 계시를 직관하기 위해, 믿음 을 얻기 위해, 이제까지 보고도 보지 못한 그 무엇의 최종적인 증거까지 만져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무신론적 신념이든 유신론적 믿음이든, 흔히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100% 확신(確信)한다 는 것은 확실히 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필
43) 요한 20장 24~31절,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가톨릭용), 서울: 대한성서공회, 1999.
요 없게 된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즉 모르니까 믿거나 믿지 않 거나 하는 것이다.
참된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방금 내가 말한 대로 지혜와 무지의 중간 상태입니다.44)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 즉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불안을 의지적으로 한쪽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러한 인위적 믿음은 소용이 없다. 이것은 나침반이 아니라 잠 시 마음을 속이는 부적에 불과하다. 믿음을 내 안으로 끌어오려고 요청 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불안을 직시하고 환기해야만 한다.
(2) 불안의 환기
둥근 공이 구르는 것은 구르기 위해 구르는 것이 아니다. 멈추기 위해 서 구른다. 안정된 어느 한 점, 믿음이라는 확고한 한 점에 머무르기 위 해 구르고 또 구른다. 불안을 벗어나려고 불안하게 구르는 것이다. 인생 에서 불안이 소중하게 요구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불안 없이는 삶은 진 행되지 않는다. 즉 성숙하지 않는다. 고인 물처럼 절망적으로 썩어갈 뿐 이다. 따라서 매 순간 불안을 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아있음, 생명, 실존은 확고부동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구름처럼 가변적이고 제멋대 로인 불안한 형태를 띠고 있다. 살아있음의 증거는 불안에 있다.
생명의 외줄을 타는 인간은 믿음을 가졌기에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 다. 하지만 이 신념의 뒷면은 결국 불안의 모습이다. 단 한 걸음도 흔들 리지 않는 경우는 없다. 평지를 걷듯이 안일한 걸음이 아니라 그것은 죽 음에 직면한 한 발짝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딛고 선 지반은 단단하지 않
44) 플라톤(Platon BC.427~BC.347)의 희곡 중에서 <향연>의 한 장면인데, 소크라테스 (Socrates BC.470~BC.399)가 만티네이아에서 온 여(女)예언자인 디오티마에게 들었던 말을, 향연의 자리에서 발표하는 장면이다. 소크라테스의 의견은 믿음이란 현실적인 증거는 없지만
“진리를 적중시키고 있는 마음의 상태‘라고 하면서, 완전한 무지와는 다르며, 무지와 지혜의 중 간 상태라고 주장한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태동(역), 부산: 민일사, 1988,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