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을 때의 대상이 외부의 것이었다면, 판화를 찍을 때의 대상은 회화적으로 각색된 내면의 것이다. 마구 찍어댄 사진들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의 파편적 기록에 불과했다면, 한 순간을 골라서 작 품으로-회화적 과정을 포함한- 만드는 것은 집중해서 기억하는 행위이 다. 내게 판화 작업은 물질적인 것(사진의 기록)을 정신적인 것(회화적 기억)으로 바꾸기 위해 몰두, 즉 ‘실천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다.
마르셀은 육체화(incarnation)가 <형이상학에 주어진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육체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시인하고, 관념만을 가지고 있 는 단순한 추상적 정신을 통해서는 우리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인 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의 육체화는 나의 사유의 불변적 조 건이다. 나는 이 사유의 조건을 사유에서 떨쳐버릴 수 없다.193)
즉, 현실(시간)이 관념(영원)이 될 때, 그 관념은 관념 속에서가 아니 라 다시 현실적(순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셀이 육체가 사유의 불변적 조건이라고 말한 것처럼, 판화에서 육체적인 작업의 고됨 은 단순 노동이 아니라, 사유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산책]<그림 25>은 내 작업 중에가 가장 인쇄를 많이 한 작품이다.
제판은 3차례의 판각과 5차례 정도의 바니시제판을 했지만, 인쇄는 3가 지 색으로 번갈아가며 70회 가량 하였다. 원래 이렇게 많이 인쇄를 하려
193) 인간의 실존주의적 입장을 논한 것이다. 서배식, 앞의 책, pp.221-222. (요약: 필자).
던 것이 아니고 원하는 완성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 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산책]은 도대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어려운 작 품이었다.
2004년 당시에는 판각 위주의 작품을 하였고, 바니시 칠은 판각을 보 완하기 위해 사용했었다. 그래서 아직 이 평판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좋 을지 감을 잡지 못한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는 이것을 통해, 작업에의 끈질긴 몰두를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먹 을 쓸 수도 있고, 물감을 진하게 올리면서 바니시 칠이 된 부분의 필요 없는 물감을 털어낼 방도도 알아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험치가 없었기 에 단순한 계산에 의존했다.
즉, 제판을 단계적으로 하면서 삼원색을 반복해서 인쇄하면, 다양한 톤 이 생겨나고 검은색에 가까운 색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무모하게 작업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계획과는 달랐다. 물감이 진하 면 바니시제판이 소용없게 되고, 물감이 연하면 거의 색이 올라가지 않 아서, 그 상태로 인쇄만 거듭하니, 계속 한지 뒤로 물감이 거의 빠져나 갈 뿐, 색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는 진해지지도 두껍게 올라가지도 않았 다. 그래서 채도만 계속 떨어져서, 그야말로 비가 오는 어둡고 습한 풍 경이 되었다.
이 작업 직전에 했던 것이 [DECKS]<그림 3>이다. [산책]을 완만하게 판각하였다면, 이 작품은 날카롭고 깊게 판각을 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산책]과 마찬가지로 판각 위주의 작품이며, 바니시는 판각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DECKS]는 어두운 밤의 풍경이고 명암 차이가 분명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산책]과 같은 문제가 없었다. 사실 [산책]을 제작한 이유도, 내 작품이 주로 [DECKS]처럼 판각 기법에 적당한 어둡 고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한계를 넘기 위해 밝고 명암 대비가 크지 않은 작품을 시도하려던 것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되지 않는 것을 계속 될지도 모른다고 매달 린 괴로운 기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였다 해도, 그 후 나는 다른 작품에서 계속 잘못을 고쳐나갈 수 있었으므로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모한 몰두인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가치 있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거듭된 인쇄는 바란 듯한 색조를 만든다. 이러한 색조는 생경한 현실의 장면을 낡고 그리운 기억처럼 보이게 한다. 현실의 순간이 불확실한 기 억과 함께 사진 한 장 또는 그림 한 장으로 잠시 저장되어도, 결국 이것 들조차 사라지게(fade-out) 된다. 그렇지만 그 장면을 반복해서 바라보 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고, 각인(刻印)하는 과정을 통해, 막연한 소망은 구체화(具體化)된 진정(眞情)이 되는데, 내가 담으려던 것은 결국 그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씨앗이 무조건 꽃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씨를 심고 물을 주고 공을 들이는가이다. 결과를 실현하는 열쇠는 바로 실행의 과 정이다. 나는 이것을 ‘과정의 합목적성’이라고 한 것이다. 결과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오로지 과정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내 작업의 방식이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194)
그림에 생명이 담겨야한다면, 생명을 어떻게 넣을 수 있을까? 생명은 물질에서 나온다. 물질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것은 계란이 병아리가 되는 것처럼, 3차원에서 4차원적인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공간에 시간을 곱 하면 4차원인데, 이것이 살아남, 삶, 생명의 세계라고 비유할 수 있다.
곱한다는 것이 ‘몰두’이다. 예를 들어, 씨앗이라는 공간에 일정한 시간이
‘몰두’되면, 생명의 싹을 틔우는 것처럼 말이다.195)
마찬가지로 종이라는 공간에 시간을 곱하는 것, 즉 작업 과정도 몰두가 될 수 있다. 광속에 이르면 더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4차원이 되는 것처
194) 빈센트 반 고흐, 앞의 책, p.272.
195) “물질세계에서 생명세계가 나오고 생명 세계에서 정신세계가 나오고 정신세계에서 신령의 세계가 나온다.” 김흥호, 『생각 없는 생각』, p164.
<그림 25> [산책] (Stroll),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14.5×79cm
럼, 시간을 잊어버릴 만큼 몰두하는 어느 순간 계시와 직관이라는 초월 적 현상의 가능성이 생기고, 그림에도 생명이 깃들 수 있게 되는 것이 다. 몰두 없이는 영적인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조차 가지지 못한다. 몰두 (沒頭)는 시간 속에 머리를 담그는 것이다. 본질을 향해 깊은 생각 속으 로 들어가는 것이자,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순순한 열정이 이끄는 대로 작업해 나아가는 것이다.
바람에, 태양에, 사람들의 호기심에 노출된 야외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잔뜩 몰두해서 캔버스를 채운다. 그것이 진실 된 것, 본질적 인 것을 잡아내는 방법이다.196)
장자는 ‘좌망(坐忘)’을 말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작업 또한 일종의 망아 (忘我)의 상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앉아서 정(靜)적으로 참선하는 것 이 아니라, 발분망식(發憤忘食)하는 작업으로써 하는 ‘행위적인 사색’이 다.197)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스스로 빛을 따라잡는 속도를 낼 수는 없다. 결국, 광속을 지닌 빛의 계시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몰두다. 빛을 만나는 순간, 인간도 단번에 빛을 내고 정신적인 광속인 직관에 이를 것을 믿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몰두란 광속 이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모한 가속, 치열한 분발이면서, 믿음의 행 위,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작업 과정에는 몰두적 요소가 있다. 그려내고 싶은 하나의 인상이 떠오르면, 그 막연한 지점에 다가설 때까지 제판과 인쇄를 계속 반복한 다. 즉 설계도와 매뉴얼에 따르는 확실성의 작업이 아니라, 신기루를 쫓 는 것처럼 즉흥적이고 불안정한 작업에 절대적으로 매달린다. 객관적으 로 생각하면, 이러한 방식은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오고, 그 불안으로 절 망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좀 다르다. 실패는 다 시 시도하도록 재촉할 뿐이고, 불안은 흥미로운 기대로 바뀌어서 더욱더
196) 빈센트 반 고흐, 앞의 책, p.275.
197) 金學主(編著), 『論語』, 서울: 서울大學校出版部, 1985, p.217.
몰두하게 한다.
물론 이렇게 집중하는 과정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결과에 대한 희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몰두를 통해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는 결 국, 빛의 세계, 영원한 순간, 즉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