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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 존재와 영원성을 은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작품의 완결성의 측면에서의 빛의 의미란, 앞에서 계속해서 말한

‘그림이 살아나는 것’으로서의 의미다. 빛은 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결과 같다. 내가 표현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빛의 생생함이다. 즉 내가 작품에서 묘사한 것이 어떠한 구체적인 순간 이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조형적인 목적은, 그 장면이 가지 고 있는 독특하고도 심상(心象)적인 빛의 세계를 결국 표현해낼 수 있느 냐에 있다. 그러한 노력이 성공한다면, 그림은 살아나게 된다. 다시 말 해, 종이와 물감으로 이루어진 사물에 불과한 그림 속에, 구체적인 어느 한 순간의 빛을 영원히 깃들게 할 수 있다면, 그림은 생명을 얻고 살아 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빛에 대한 관심은 사실 미술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동서고금 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빛이 어떤 본질적인 의미로 여 겨지고, 또 표현되어 왔는지 우선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내 작업에 표 현된 빛의 주제적, 조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논의의 순서 는, 빛의 두 가지 의미로서, ‘존재로부터 계시된 영원성’과, ‘그림의 살아 남’으로 한다.

<참고그림 9> 색유리 창, [시에나대성당]

(Duomo di Siena), 1229~1380 그럼에도, 현실과 이상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면 현상 속에 형이상의 신 비가 드러날 것이며, 그것이 존재의 계시라면 그 현상은 바로 빛일 것이라는 ‘시(時) 적인 상상’은 오래도록 지속 되었다.105)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빛 은 존재로부터의 계시로서 의 의미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비추고, 만들어 내고, 생명을 주고, 그것과 함께하여 그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태양과 마찬가지로 신 또한 그의 빛을 세상에 퍼뜨려 사물에 형태와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들이 선함에 동참하도록 한다. 신은 분산과 흩어짐으로부터 세 계를 다시 통일 시킨다. .... 신 자체는 볼 수 없었지만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영역에 분명히 신의 본질과 비슷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빛이다.106)

미하엘 하우스켈러는 중세 시대의 미학을 논하며, 중세에는 빛에 형이 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종교적인 표현을 위한 핵심적 역할을 하게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중세 고딕 건축물들은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압도적인 외면 속에, 그 내면은 색유리 창<참고그림 9>을 통 해 신의 은총과 같은 부드러운 빛의 요소를 끌어들였다. 즉 인간이 정성

105) 시적인 상상은 결국 예술적인 상상이다.

106) 미하엘 하우스켈러, 『예술 앞에 선 철학자』, 김현희(역), 서울: 이론과실천, 2003, p.30.

<참고그림 10>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Philosophe en méditation), 1632, 패널에 유채, 28×34cm 을 다해 지은 성당 안에 신의 영적인 은총이 계시되는 연출로서, 색유리 의 찬란한 빛의 효과는 더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넘어오면서, 빛의 표현은 더 이상, 중세 성상 화에서 금박으로 장식된 후광(後光)과 같은, 지시(指示)적인 것이 아니 었다. 17세기,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 1606~1669)

는 중세의 빛의 종교적 의미와, 근세의 합리적이 고 사실적인 빛의 표현 을 결합하여, 일상 속의 빛의 모습도 성스러운 계시가 될 수 있다는 것 을 보여주었다. 그의 유 명한 10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들, 그리고 [명상 중인 철학자]<참고그림 10>와 같이 종교성과 상관없는 일상적인 소재 안에서, 단지 명암의 표 현만으로 종교적 심오 (深奧)함을 표현한 것이다.

성스러운 빛은 이제는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사방으로 퍼지는 에 너지에 대한 실제적(實際的) 경험이었고, 하이라이트와 그림자의 감각적인 경관은 하나의 계시(啓示)로 전환되었다.107)

그림은 실제로 빛을 낸다. 광원이 아니라 해도 눈에 보이는 사물이라 면, 그것은 이미 달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므로 빛나고 있는 것이

107) 루돌프 아른하임,『美術과 視知覺』, p.319.

<참고그림 11> 조르주 피에르 쇠라, [라 그랑드 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 캔버스에 유채, 207.5×308cm 다. 사물을 볼 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빛을 경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보는 것이 색이나 형상이라고 여길 뿐 빛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물을 본다는 것은 사실 빛을 경험하는 것이다.

즉, 빛은 관념적으로만 계시적인 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물리적으 로도 계시적이다. 그래서 종교성을 표현하지 않는 화가들 역시, 빛을 표 현할 때 이러한 빛의 성질을 이용하고 있다. 빛의 표현에 탁월한, 또는 빛의 표현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제작하는 화가들은 저마다 빛을 형상화 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빛을 억지로 꾸며내는 것 이 아니며, ‘주어지는’ 빛을 최대한 끌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상파 화가들 은 유달리 빛의 표현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했는데, 색의 채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강렬한 보색의 점들 을 병치하는 방법을 쓰거 나, 또는 하이라이트에 밝은 물감 덩어리들을 입 체적으로 붓질해 넣기도 하였다. 이것은 ‘색(色)’

에 대한 관심 이전에, 화 면에 빛(光)을 도입하고 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는 [라 그랑드 자뜨 섬의 일 요일 오후]<참고그림 11>를 수차례 제작하였다. 그에게 이 그림은 단 지 평화로운 휴일 풍경을 담기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빛이라는 현 상을 어떻게 그림에 도입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색채물리학자’같은 관심 에서 접근하였다.108) 쇠라의 지나칠 정도의 과학적인 접근은, 작품에서

<참고그림 12> 신윤복(申潤福), [월하정인]

(月下情人), 『혜원 전신첩』, 18세기 후기, 지본채색(紙本彩色), 28.2×35.6cm 감성마저 희생시켜버리게

함으로써, 생생하게 빛을 표현하여 생명력을 끌어 내려는 열망과 반대로,

“생명이 결여된 이미지”

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 기도 하였다.109)

한편, 동양의 전통적 수 묵화에서는 빛은 밋밋하 고 조용하게 표현되었는 데, 소극적인 방식 즉 네 거티브의 방식으로 표현 되곤 하였다. 밝은 부분 은 먹을 가하지 않고 그

냥 놔두는 것이다.110) 신윤복의 [월하정인 (月下情人)]<참고그림 12>

에서, 은밀한 분위기의 밤의 시정(詩情)은 담 한 귀퉁이에 숨어있듯 서 있는 연인의 몸짓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엎드린 초승달이 만들어내고 있다. 연인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은히 그들을 비추고 있는 달은, 이 비밀 회합이 어두운 밤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낸 다.

그런데 관람자에게는 이 모든 사실이 훤히 드러나 있고, 달의 숨은 배 려 또한 잘 드러나 있다. 그 이유는 혜원(蕙園)이 이 어두운 장면을, 마 치 카메라의 노광(露光)지수를 높여 촬영하듯, 밝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반면, 달이 있는 부분은 달의 외곽을 어둡게 함으로써, 달의 밝음을 강 조하고 있다. 즉 혜원은 일종의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자신의 요구에

108) 신인상파에 속한 조르주 피에르 쇠라는 그의 야심찬 대작 [라 그랑드 자뜨 섬의 일요일 오 후]<참고그림 10>에서, 물감으로 빛을 구현할 때 빛의 감소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집요한 점묘로써 순색(純色)의 보색(補色) 병치혼합기법을 구사하였고, 또 아연에서 추출한 밝은 노란 색을, 풀밭 위의 햇빛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였다.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 崔 旻(역), 서울: 悅話堂, 1971, pp.136-141 참조.

109) 위의 책, p.139.

110) 이 점은 내 작업에서 빛을 형상화하는 방법과 근본적으로 같다.

맞게 빛의 밝기를 맘대로 조절하면서 표현하였다. 서구의 화가들이 빛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도입하려한 것과 비교할 때,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적인 비교일 뿐, 극단적인 물성을 내세운 쇠라나 사 실적인 빛의 묘사를 기본으로 하는 렘브란트도, 결국 주관적이고 작위적 인-혹은 창의적인- 빛의 표현을 한 것은 분명하다. 즉 이성적 합리에 맞추려던 서구의 화가들이나, 보다 자유로운 태도를 취했던 동양의 화가 들이나, 이미 ‘주어진’ 빛이라는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빛 의 세계를 만들 것인가 하는 데 집중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창의성을 발휘해 자신의 작품에 개 성적으로 빛을 형상화했지만, 모두 그 재료인 빛을 외부로부터 끌어와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외, 빛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 법, 즉 해나 등(燈)을 그려놓고 이것이 빛이라고 설득하는 개념적인 방 법, 또는 실제 조명(照明)이나 야광(夜光) 물질을 활용해서 빛을 직접적 으로 작품에 넣는 방법 등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빛은 결코 그림 속 에 그려 넣을 수 없다는 한계이다. 그리고 대신 차선의 표현을 선택했다 는 점이다.

나는 작업에서 빛으로 영원성을 은유하여 표현한다고 했지만, 영원성은 커녕 빛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단순히 불빛을 그리거나 또는 명암의 효과 등을 내어도 정말 빛나는 생생한 빛이 작품에 나타나려면, 진짜 빛이 깃들어야 한다. ‘계시’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 서 만약 내 작품에서 빛이 느껴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림이라는 마법 적인 눈속임 때문이 아니라 실재의 빛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 가 받아들이고 또 반사하는 빛을 내가 원하는 ‘그 순간의 빛’으로 각색 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밝은 종이나 캔버스 위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는 빛을 만드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 빛을 감소시키는 행위이다. 물론 지면(紙面)보다 더 밝은 색을 칠한다면 더 밝아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물감이 가해지 면 가해질수록 명도가 낮아져 빛은 감소한다. 물론 나는 흰 물감이 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