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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생로병사의 극적인 순간 뿐 아니라, 더 많은 평범한 일상으로 이

23)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의 사상 과 주장을 소개한 다음 책의 부록Ⅱ 참조. 서배식, 『실존 철학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서 울: 문음사, 1999, p.229. (요약: 필자).

루어져 있다. 평범한 모습을 가진 일상 역시 긴박한 실존 상황이다. 뭉 크는 극한 상황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삶의 실존성을 표현했지만, 나는 일상적인 순간 속에 내재된 삶의 실존성을 표현한다. 즉, 나는 뭉크처럼 인생의 극한 상황을 소재로 다루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겉모습일 지라도 평온해 보이는 상황을 택한다. 전쟁터가 아니라 후방의 모습인 셈이다. 하지만 후방 역시 불안에 싸여있는 것이고, 또 언제든 생존의 전쟁터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극한 상황은 가능태로서 일상의 표면 아래 잠재되어 있고, 언제든지 일상을 밀쳐내고 나타날 수 있다.

일상은 평온으로 가장(假裝)되어 있지만, 실제 모습은 불안한 비(非)일 상인 셈이다.

‘죽음에 임하는 일상적 존재’란 퇴락한 존재로서, 죽음으로부터 끊 임없이 도망치는 존재이다. ... 현존재의 일상성은 세인 그 자체도 언제나-딱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도- ‘죽음에 임하 는 존재’라는 숙명을 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현존재는 평균적인 일상성에 있어서조차, 이 가장 고유하고 몰교섭적이며 추월할 수 없는 존재가능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말이다.24)

하이데거는 일상 속에 있는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실 제 일상의 어느 한순간도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 한다. 또 이렇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상 속에 자꾸 숨어버리는 인간을 퇴락한 존재라고 한다.25)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일상적 존재의 ‘절망’

에 관한 내용과 상통하는데, 즉, 일상의 안일(安逸)에 빠진 인간은 감정 적 즐거움에 치우친 생활을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을 지향하 는 정신으로서의 자아가 될 가능성을 잃어버렸고, 이것이 진짜 절망이라 고 한다.26)

24)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p.326.

25) “...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지만, 지금 당장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 일상성은 이처럼 죽음의 ‘확실성’을 애매하게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성은 그런 식으로 죽음에 임하 는 것을 더욱 은폐하고 그 확실성을 흐려서,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부담감을 가볍게 만든 다.” 위의 책, pp.326-327.

26) “절망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절망.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아를, 그리고 영원적인 자아

... 인생을 헛되게 보낸 인간이란 일생의 기쁨이나 슬픔에 속아서 어정쩡하게 나날을 보내고, 자기를 정신이자 자기로서 영원히 자각 하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다.27)

절망한다는 것은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상실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또 몽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28)

즉 일상은 삶을 살아가는 필수적인 방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정신 적인 자아는 상실되곤 한다.29) 모험 대신 수동적인 평안을 추구하기 때 문에, 삶의 주체로서의 자신이 소외되는 것이다. 오히려 극한 상황의 어 려움 속에서 정신적인 자아가 깨어나 빛을 발하곤 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극한의 상황이든, 일상이든, 삶이라는 실존 상황 인 것은 매한가지다. 단지 삶의 파고(波高)가 높거나 낮은 것뿐이다. 따 라서 일상의 순진한 모습 속에도 철들은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 한다. 즉, 나는 일상의 모습 속에서 허위적인 평안, 연약한 기쁨, 잠재된 불안, 사라지지 않는 희망 등을 드러내어, 일상의 겉모습 속에 숨은 비 (非)일상성의 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상이 어떻게 가장되었는지를 고찰하고, 일상에 대한 사람들 의 기대와 좌절, 일상의 진정한 모습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일상의 함정

사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의 시간을 체계화하고, 가두려고 해왔다.

그 방법은 시간을 회귀(回歸)하는 주기(週期) 속에 넣는 것이다. 시곗바 늘이 회전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고, 달력의 한 주, 한 달, 한해 역시 각 각의 사이클 안에서 되돌아온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생활 방식에도 적 용된다. 사람들은 시간의 주기를 따라, 관습적인 생활 양식을 만들어 반

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절망적인 무지(無知)” 키에르케고르,『죽음에 이르는 병』, 김영목 (역), 서울: 學一出版社, 1994, p.58.

27)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 p.201.

28) 위의 책, p.228.

29) 키에르케고르는 일생을 일상사에 몰두한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유일한 수확은 “자기 상 실”뿐이라고 말했다. 위의 책, p.292 참조.

복한다. ‘일상(日常)’이란, 바로 ‘매일 반복되는 생활’로서, 변화와 모험이 제거된 평균적인 생활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유는 단지 편의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일상이 라는 습관화된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게 된다. 일상은 실존적인 불안을 겪는 인간에 게 심리적으로 안심을 준다. 오늘은 지나갔지만 내일이 또 있고, 올봄이 지나가도 내년 봄이 또 있을 것이라는 안심은, 한 때의 기회를 놓쳐도 또 다시 기회가 있다는 식의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또한 일상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무시된다. 즉, 평화로움 으로 위장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어떤 낯선 곳, 특히 극한 상황과 같은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는 새로운 하루는 멀리 밀어내는 것이다. 본질적 으로 항상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를, 일상이라는 예측 가능 한 생활 패턴으로 만들어 실존을 망각하려 한다. 실존의 자유를 희생해 서라도 실존적인 불안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도상(途上) 존재다. 죽을 때도 십자가 위에서, 바다 한 가운데서 마지막 하루를 살아야 할지 모르는데, 삶을 각본을 가지고 안 일하게 살 수 있을까? 편안함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실존의 가장 큰 소망 이지만, 그 소망은 죽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일상이라는 기만(欺瞞) 에 갈 길을 잃어버리고 한자리에서 맴돌게 되면, 이 일상이 깨지는 순간 몽유도원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늙어버린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상은 삶을 무의미한 타성(惰性) 속에 빠뜨려서, 생기를 잃게 만드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30)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삶은 일반인들이 상상 하는 예술가의 굴곡진 삶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평범하고 안정적이어서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단지 화가이자 조력자였던 부인 조세핀과의 사소한 갈등 정도가 삶의 불안 요소이지 않았을까 여겨

30) 일상의 무정신성에 대해 계속 문제 삼는 키에르케고르는 일상에 영혼이 없다고 단언하고, 일 상이 정신적으로 깨어나려는 인간을 계속 좌절시켜, 결국 일상의 사건들 자체는 물론, 인간의 실존조차도 가치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위험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인생에서 우스꽝스러운 일, 우연적인 일, 일상적인 다양한 일 속에는 영혼이 있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 pp.159-160 참조.

질 뿐이다. 호퍼에게는 절실하게 풀어야할 문제나 작품화해야 할 특별한 대상은 없었다. 일상 속에서 우연히 포착된 대상에 관심이 생겨나면, 상 상력을 가미해 그저 건실하게 그림을 그렸다.

“...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언제나 자연을 매개로 삼는 일이며, 어떤 오브제와 대면했을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 간, 나의 내면에서 이는 반응을 화폭 위에 포착하는 일이다. 그 순 간은 세계가 나의 관심이나 상상적 재현과도 부합하는 때이다. 나 는 어째서 어떤 오브제를 다른 오브제보다 더 좋아하는지 정확히 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오브제야말로 나의 내적 경험을 총체적으로 의식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매개라는 것을 굳게 믿는 다.”-호퍼31)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그의 작품의 특성을 이루었다. 그의 그림은 인생 의 절박함에 대해 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낮은 목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호퍼는 도시의 일상적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는 많은 작품에 부인을 등장시켰는데, 그래서 황량한 도시 풍경이 그나마 생기가 도는 일상적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생기’라 할 만한 인물들의 감정은 뚜 렷하지 않다. 그저 막연한 동경, 무료함, 호기심과 무관심, 고독 등으로 서 미묘하게 나타날 뿐이다. 정적에 싸인 인물들은 정신이 붕 떠있는 듯 넋 놓고 있는 모습인 경우도 많다. 그들이 독서를 하고 있거나, 대화를 하고 있어도 그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 일이 별로 중요 해 보이지도 않는다.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참고그림 5>에 그려진 한 쌍의 남 녀는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있지만, 서로 시선도 맞추지 않고 소통도 단 절되어있다. 남자는 신문을 보고 여자는 몸을 비틀어 피아노 건반을 두 드리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31) Lloyd Goodrich, Edward Hopper, New York, 1971(1983 reprint), p.152. 롤프 권터 레 너, 『에드워드 호퍼』, 정재곤(역), 경기도 파주: 마로니에북스, 2005, pp.9-10 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