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그림 32> [걷는 아이들1], [걷는 아이들2]의 연속 배치
<참고그림 34>
전칭(傳稱) 김홍도, 김득신, 등의 화원 작, [원행을묘정리의궤
; 반차도]의 부분, 1798, 판본채색, 각 면
24.6×16.7cm
<참고그림 33> [걷는 아이들]의 자료사진
차이를 주어 먹을 입히고, 한 두 차례 만에 찍어내 었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한 떼의 어린 아이들이 주택 가를 따라, 보따리를 하나 씩 들고 어딘가로 명랑하 게 행진해가는 모습을 사 진 찍었다. 아이들은 내가 타고 있던 버스 옆으로 지나갔기 때문에 나는 바 로 측면에서 촬영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마치 여기의 반차도<참고그림 34>나 이집트 벽화의 인물들처럼, 원근감이 없는 상태의 옆모습으로 나란히 움직이는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내가 이것을 작품으로 만들려고 계획한 것은, 의궤도의 반차도(행렬도) 를 보고나서였다.203) 반차도와 아이들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만난 두
203) 한영우,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 경기도 파주: 효형출판, 2007, p.37. ; 김문식⦁신병주,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경기도 파주: 돌베개, 2005, pp.168-187 참조.
<참고그림 35>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의 부분. 도장 형식의 목판 인쇄
<참고그림 36> [걷는 아이들]의 아이들 판과 [걷는 아이들2]의 배경 판 개의 이미지였지만, 나는 두
장면에서 인물들의 씩씩한 행 보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것을 판화로 제작 할 때, 나는 반차도에서 또 하 나 재미있는 기법을 응용하였 다. 김홍도의 원화로 알려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
<참고그림 34>의 인물과 말 은 움직임이 제 각각이고 다 양한 데 반해, [영조정순후가 례도감의궤]의 반차도<참고그
림 35>의 인물과 말의 동작은 다양하지 않고, 몇 가지 양식 안에서 일 률적이다. 그 이유는, 전자가 책의 각 면의 인물과 사물을 하나의 목판 에 다양하게 그려서 판각한 것인 데 반하여, 후자는 비슷한 복식의 인 물, 그리고 사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경우, 그것을 도장으로 만들어 필 요한 만큼 찍고, 때에 따라 채색만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204)
204) “인믈・말・의장기・의장물・여(輿)・연 등을 목판으로 새겨 도장을 찍듯이 인쇄하고 채색한 것
<그림 27> [걷는 아이들1] (Walking Children 1), 2006, 목판화와 붙이기(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9×146.5cm
나는 이것을 응용하여, 나무판을 인물 모양으로 잘라서 만들고, 배경 판<참고도판 36>은 별도로 만들었다. 물론, 아이들 모습을 하나의 작품 안에 반복해서 찍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 부분은 서구적인 회화 양식으로 색을 넣어서 묘사하고, 배경은 수묵화 양식으로 먹으로만 찍으 려는 의도였다.
나는 이 작품에, 세 가지 면에서 한국 전통미술의 조형성과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즉, 평면적으로 행진하는 모습, 오려진 인물판, 그리고 수묵화 의 조형성이다. 나는 보통 수십 차례의 인쇄로 물감을 밀도 있게 올려서
이 매우 흥미로운데 ...” 김문식⦁신병주, 앞의 책, p.85.
<그림 28> [걷는 아이들2] (Walking Children 2), 2006, 목판화와 붙이기(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9×146.5cm
이미지를 표현해왔는데, 이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얼마든지 가필(加 筆)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서구적 회화의 방식과 비슷하다. 나는 그런 방법이 항상 진정성을 만들어내는 적절한 방법이라 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서는 습관화된 방식에서 벗어나, 수묵 화의 일필휘지하는 듯한 시원한 표현들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래서 [걷는 아이들]의 배경 판에 처음으로 먹을 사용하면서, 나는 단 한 차례의 인쇄를 해서, 수묵화처럼 자연스러운 농담의 차이를 내보기로 했다. 수묵화에 숙련된 화가들은 가필을 하여 명암을 만드는 것이 아니 라, 즉흥적인 붓놀림만으로 농담 차를 내고 단번에 그림을 완성하는데,
나는 바로 그 방식을 판화로 시도해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묵화에 숙달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종이를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한두 차례의 인쇄만으로, 밝은 여백(餘白) 속의 부드러운 그림자와 강한 그늘까지, 여러 톤을 한꺼번에 표현하였다. 이것은 바니시제판이 된 판 위에 먹의 농도 차이를 주어서 찍었으므로, 모노타입이나 바림 효과라고 할 수 있지만, 조형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수묵화와 판 화의 조형성이 만나서 새로운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한편, 아이들 부분은 원래 내가 해오던 방식인 명암의 단계적인 구축 방식으로 묘사하였고, 배경도 이미지는 사실적이었다. 그리고 인쇄된 아 이들 부분을 각각 오려낸 후에 풀을 발라서 배경에 놓고, 프레스로 돌려 서 붙이는 방식(콜라주)도 활용하였다.
이 작품은 매체적으로 사진, 회화, 판화의 특성이 혼재해있고, 기법적으 로나 조형적으로 한국 전통 판화인 반차도, 수묵화, 서양화 등의 특성도 섞여있으며, 심지어 내용면에서 동서양의 정서까지도 섞여있다. [걷는 아이들]은 나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혼성(混成)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
지역적이던 각각의 전통을, 삶의 반경이 확장된 현대에 활용한다는 것 은, 종합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이고, 여기서 또 다른 새로운 전통이 생 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