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이야기(내용)를 자신 만의 표현 형식에 담는다. 작품의 형식적 면에 있어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는 매체(媒體)는, 말 그대로 작가의 예술적 목표를 수행하는데 도 움을 주는 매개적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야기가 동일하면, 매체 가 얼마든지 바뀌어도 작품의 본질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 만 과연 그런가? 작품에 따라, 그것이 꼭 회화여야 하고, 영화여야 하고, 사진이어야만 하는, 그런 경우도 분명히 있지 않은가? 내용이 같아도 매 체가 변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다. 작품의 희소성이나 가치가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작품의 본질이 변 한다는 것이다. 즉, 매체는 작품에 특별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 본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본질은 아니지 만 본질을 드러내는 데 필연적인 요소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표현을 위해, 매체도 필연성을 가지고 선택한다. 그리 고 마땅하지 않으면 새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모든 기존의 매체도 처음 에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 또한 여러 가지 매체를 접하는 동 안, 각 장르의 틀 안에 구애(拘礙)되는 것이 답답했고, 그래서 여러 매 체의 장점을 조합해서, ‘나의 이야기’를 담을 새로운 조형성을 가진 ‘나 의 표현 형식’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내 작업의 표현 매 체는 사진과 회화의 특성이 도입된 목판화이다.
나는 본 논문에서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또 각각 주제와 조 형, 매체와 기법으로 세분했지만, 사실 작업이 그렇게 분명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형이라는 요소는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형 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 (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의 말처럼, ‘매체’는 작품의
형식이지만 내용(개념)과 불가분의 유기적 관계에 있다.139) 내 작업에 적용된 각각의 매체는 형식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작품에 특별한 의미 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미디어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라는, 모든 미디어에 해당되는 특징을 의미한다. 말은 쓴 것 의 내용이고, 쓰인 것은 인쇄의 내용이며, 다시 인쇄는 전보의 내 용이다. “말하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경우, 우리는 반드시 “그것은 생각이라는 실재적인 과정이며 그 과정 자 체는 비언어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140)
맥클루언은 생각이 말로, 말이 글자로, 글자가 인쇄문으로, 인쇄문이 전 보로, 매체가 전이(轉移)하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하나의 관계에서 매 체였던 것이 다음 관계에서는 메시지가 되어, 또 다른 매체에 담기는 것 을 지적한다. 이렇게 일련(一連)의 매체 전이의 과정 속에 있는 매체들 은 순수한 매체(형식)도, 순수한 메시지(내용)도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다.
나의 작업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최종적 매체인 목판화의 내용은, 판 위에 제판된 그림이며, 이 그림의 내용은 사진 이미지인 것이다. 이 때, 그림과 사진을 단순히 매체로만 볼 수 없게 되는 혼란스러움이 생긴 다. 이미지를 다른 매체로 옮길 때, 전 단계에서 매체였던 것이, 다음 단 계에서는 메시지(내용)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작품에는 각 매체의 매체적인 특징뿐 아니라, 메시지로 서의 특징도 반영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사진을 처음 촬영할 때 는 사진이 현실의 순간적 모습을 포착하기 위한 단순한 매체였지만, 사 진을 판 위의 그림으로 옮기면, 그 사진은 사진을 찍는 경험과 정서, 사 진적인 조형성 등이 포함된 이미지로서,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139)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W. 테런스 고든(편집), 김상호(역),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p.28.
140) 위의 책, p.32.
<참고그림 13> [현관-弘]의 작업의 매체 전환 과정. 왼쪽부터 자료 사진, 2차 제판된 목판, 완성된 판화
<참고그림 13>를 보면, [현관-弘]<그림 51>의 작업에서 매체가 전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최종적 판화에는 사진과 그림의 매체적인 특 성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특성을 남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그림 14>에서는 내가 판 위에서 하는 회화적인 처리 과정과, 그 결과 판화 작품에 회화성이 남게 되는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내가 목판 위에서 하는 드로잉, 판각, 또 새로 개발한 목판 평판 제판법 (바니시제판법)-물감이 찍히지 않아야 할 부분을 흰색 바니시를 칠해서 막는 방법-이 나타나 있는데, 이 세 가지 처리는 모두 회화적이다. 그리 고 이 제판법을 인쇄와 번갈아 가면서, 단계적으로 수차례 하는 소거법 역시 회화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평판적 제판법과 소거법이 동시에 이뤄 지면서, 회화에서나 주로 나타나는 명암 단계와 밀도가 만들어진다. 결 과적으로 내 판화에는, 주제를 즉흥적으로 천착(穿鑿)하는 회화적인 흔 적들이 남게 된다.
한편, 매클루언의 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전보에 관한 예시에서, 매체 이동 과정을 거꾸로 되짚었을 때, 최초의 지점이 ‘생각(정신)’이라고 한 것이다. 사실, 문명과 문화는 매체와 메시 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문화는 문명에 담긴 내용이지만 한편, 문
<참고 그림 14> [현관-弘]의 다섯 번의 제판 단계 모음. 목판 위에 드로잉, 판각, 흰색 바니시 칠
화는 정신을 담는 매체이기도 하다. 즉, 문명의 내용은 문화이며, 문화의 내용은 인류의 정신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매체를 거슬러 올라가는 수렴의 최초의 지점에는 항상 정신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신’마저 어떤 구체적인 생각을 담을지 모르는 매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결국
‘매체가 메시지’라는 그의 선언은 증명되는 셈이다.
내 작업 매체를 살펴보려는 이 장에서의 핵심 논제도 이것과 관련된다.
작업 매체(형식)가 메시지(내용)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체는 내 용을 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고, 내용과 하나가 되어 나타난다. 즉 작 업의 매체(형식)나 내용은 따로 떨어져서는 둘 다 의미가 없으며, 서로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있을 때 살아나서, 작품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되고, 비로소 영원성이라는 본질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목판화 매체는 내 작품의 기본적 틀이고, 사진과 회화는 작 업의 과정 중에 도입되는데, 각각의 매체는 내용과 형식에 다양한 의미 로 영향을 주고, 또 서로 상호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각 매체가 내 작업에서 개념적으로, 또 조형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리고 매체 간의 조화의 과정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논의 의 순서는 작업 과정에 따라, 사진, 회화, 판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