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융저축 다원화를 통한 내자동원의 추구
석유 파동의 충격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불황의 국면은 1975년 여름 바닥을 찍은 후 가을부터 미국, 일본 및 유럽 각 국가들의 경제가 호전 되면서 다시 상승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975년의 세계경제는 매우 원 만하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3/4분기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회 복되어 한국의 수출도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출 증가세에 따라 산업 활동이 호조를 보이는 한편 농업 생산 면에서도 풍 작을 이루어 국내 경제 활동이 상승세를 보였고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 는 다시 고도 성장 궤도로 회복하게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더욱이 1976 년 초부터 시작된 이와 같은 “국내경기의 상승세는 수출의 지속적 증가 와 함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중동건설 붐을 타고 해외건설이 이례적으 로 증가되는데 힘입어 1978년까지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우리의 경제개발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최저 실업상태 를 시현하는 등 호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1)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렇듯 제1차 석유파동의 충격에서 벗어 나고 오히려 경기가 과열 국면 속에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서 작성되었다. 1975년 6월 제4차 5개년계획의 작성 지침이 성안 되어 국무회의에 상정되었고, 1976년 7월까지 최종 작업을 마치고자 계 획되었다.2) 그러나 계획보다는 다소 늦은 1976년 말에서야 제4차 경제 개발5개년계획의 작성이 완료되었다.3)
1) 경제기획원, 1982, 《개발연대의 경제정책: 경제기획원20년사》, 153~154쪽.
2)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작성 지침(안)〉(1975.6.18.) 《국무회의안건철》
(BA008472)
제4차 5개년계획에 따르면 “1973년의 자원 파동을 겪으면서도 높은 투자율의 지속과 수출의 증대로 지난 5년간 연평균 11%의 높은 성장을 달성하여 3차 계획목표를 훨씬 초과”하였고, “1972~1976년의 투자율 은 27.0%를 유지하여 1967~1971년의 26.3%를 상회하였고 수출은 연평균 31.7% 증가하여 수출규모는 지난 5년 사이에 4배 확대”되었다.
수출품목 중 공산품수출은 연평균 41% 증가하여 제조업 부문의 성장률 을 연평균 21%로 유지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 기 위한 투자율의 증가는 해외저축률을 증대시켜” 투자 재원의 자력 조 달이라는 과제가 제기되었다고 평가하였다.4)
한편 계획기간 중 세계경제는 새로운 안정 성장 질서를 형성해 갈 것 이지만, “단기적으로는 경기의 기복이 예상되는” 한편 “무역 면에서도 실 업문제와 국제수지의 불균형 등으로 부분적인 무역제한이 계속”되어 원 유를 비롯한 자원가격의 상승도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와 같은 선개발도상국은 선진국과 후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치열한 수출경쟁 을 겪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를 향한 우리 경제의 좌표는 선진국과 후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우리의 비교우위에 입각한 산업 의 육성으로 자력 성장 구조를 실현하여 성장을 유지하고 사회개발을 촉 진하여 형평을 증진하며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우리 경제의 성장 지속은 “기술의 도입 개발과 수출의 증대”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데 기술의 개발과 수출의 증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수출의 증대를 위하여는 공업구조의 고도화가 요청”되기 때문이었다.
“경공업제품의 수출을 증대하고 중화학공업의 계속적인 추진으로 수출산 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며 특히 “중화학공업 중 기계, 전자, 선 박 등 기술 및 숙련 노동집약적 산업”을 육성하여 공산품의 수출을 증대 하고 경공업제품은 수출총액 중 56%를 차지하여 수출의 대종을 이루고
3)〈제4차경제개발5개년계획(안) 국무회의 상정〉(1976.12.4.) 《국무회의안건 철》(BA0084811)
4) 대한민국정부, 1976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7~1981》, 7~8쪽.
고용기회를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5)
그런데 이렇게 수출 증대를 목표로 하여 해외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면 1974년의 석유파동과 같은 강력한 세계불황이 닥쳤을 때 한국경제가 더욱 큰 위기에 처할 수 있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었다. 이 를 제4차 5개년계획의 작성자들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수출의 증대에 따라 국민총생산에 대한 수출의 비율이 증가하여 해외 관련도의 제고에 대한 타당성 여부가 문제로 제기”될 것이라고 그들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여전히 수출증대를 통한 성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투자재원이 자력 조달되는 1980년대 이전에 제한된 투자재원을 수입대 체산업으로 집중 투입한다면 국내시장규모의 제약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 률은 하락하게 되고 고용사정은 악화될 것”이기 때문에 “수출증대로 높 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되 해외관련도 제고에서 오는 위험부담을 최소 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수출상품을 다양화하고 품질을 고급화하며 시장 을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우리나라는 1971~1973년 70%에 달하는 미·일 시장의 편중을 1975년에 56%로 개선하였고 앞으 로는 중동과 유럽 시장의 수출이 계속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장 다변화는 각국의 경기 후퇴가 동시적이 아닌 한 우리 경제에 미치 는 영향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식량 등 주요물자의 비축을 증대하고 외환보유액을 적정선에서 유지”한다면 “우리 경제에 대 한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6) 그러나 이러 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라는 외 부의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제4차 5개년계획은 “‘성장·형평·능률’의 이념 하에 자력 성장 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 을 혁신하여 능률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가장 큰 목표인 자 력성장구조의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투자재원을 자력조달 할 것을 표방
5) 앞의 자료, 8~9쪽.
6) 앞의 자료, 10쪽.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국내저축률을 1976년의 21%에서 26%로 제고하여 계획 기간 중 투자율을 92%까지 국내저축으로 조달하고 1981년에 가서는 투자소요전액을 자력조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정부 는 “이러한 투자재원의 자력조달을 위해서 계속적인 국민소득의 증대, 물가의 안정, 검소한 생활풍토의 조성 등으로 저축기반을 확대하고 세제 의 개선과 금융제도의 능률화로 내자동원체제를 확립할 것”이라고 강조 하였다.
다음으로 국제수지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앞서 밝힌 투자재원의 자력조달과 결합되어 있었다. “투자재원의 자력조달에 따라 해외의존이 감소되어 국제수지의 적자요인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획 기간 중 상품 수출을 1975년 가격으로 연평균 16%로 증 대시키고 상품 수입은 연평균 증가율 12%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무역 수지를 1980년부터 흑자로 전환하고 해외건설 및 관광 수입을 늘려 무 역외수지 적자폭을 계속 축소시켜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할 것”이었 다.7)
이러한 기본 목표 속에서 제4차 5개년계획은 <표 4-1>과 같이 연평균 성장률을 9.2%로 책정하였다. 그 목표 연도인 1981년 1인당 국민총생 산에 1,512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였다.
<표 4-1>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총량 규모
7) 앞의 자료, 13~14쪽.
1975년 (A)
1981년
(B) B/A 연평균증가율(%)
국민총 생산
1975년 가격
10억 원 9,080 16,214 1.8 9.2 1975년 가격
10억 불 18.8 33.5 1.8 9.2 경상 가격 10억
불 18.8 58.7 - -
인구 백만 인 35.3 38.8 1.1 1.6
1인당 1975년 가격 천 257 418 - -
출처: 대한민국정부, 1976,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7~1981》, 17 쪽.
정부는 3차 계획 기간 중에는 투자율을 27% 수준에서 유지하여 연평 균 11% 수준의 경제상장률을 실현했다고 평가하면서 4차 계획 기간 중 에 9.2%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것이며 이를 위한 투자 규모로 18조 81억 원을 책정하였고 투자율은 26.2%를 유지할 계획이었다. 제한된 투자 재원을 가지고 고용과 소득을 최대한 증대시키기 위해서 “생산 및 고용효과가 큰 기술 및 숙련노동집약적인 산업의 육성에 역점을” 두고 투자를 배정할 것이었다. 재원조달의 경우 총 투자액의 92.4%에 해당 하는 16조 6,451억 원을 국내저축으로 조달하고 나머지 7.6%에 해당 하는 1조 3,630억 원을 해외저축으로 조달할 것이었다. 총 투자에서 해 외저축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어 1975년 41.3%에서 1981년에 이르면 총투자의 전액을 국내저축으로 조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8)
<표 4-2>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투자재원 조달 구상
(단위: 10억 원)
8) 앞의 자료, 24쪽.
국민총 생산
원
경상가격 천 원 257 732 - -
경상가격 (불) (532) (1,512) - -
1975년 (A)
1981년
(B) B/A 1977~1981년 금액 구성비(%) 총투자
(투자율)
2,478.4 (27.3)
4,219.9
(26.0) 1.7 18,008.1
(26.2) 100.0 국내저축
(저축률) (한계저축성향)
1,635.9 (18.0) (33.1)
4,231.0 (26.1) (37.5)
2.6
16,645.1 (24.2) (35.3)
92.4 해외저축
(해외저축률) (백만 불)
1,023.0 (11.3) (2,113)
-11.1 (-0.1)
(-23)
-
1,363.0 (2.0) (2,816)
7.6 통계상 불일치
(대GNP율)
180.5
(-2.0) - - -
출처: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7~1981》, 25쪽.
한국 경제의 저축능력이 “그동안 성장의 지속에 따른 소득수준의 향상 과 더불어 꾸준히 확대되어” 국내저축률이 “1961년의 3.9%에서 1973 년에는 22.1%까지” 상승하였으나 “1974~75년에는 세계 불황과 교역 조건의 악화로 실질 소득이 감소되어” 국내저축률이 1975년에 18.0%
까지 하락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6년 경기가 회복되고 교역 조건이 개선되면서 국내저축률이 “다시 21% 수 준으로 향상”될 것으로 전망하였고 계획기간 중에 실질 소득이 계속 증 가하고 저축 환경이 개선될 것이기 때문에 목표연도인 1981년에는 국내 저축률이 26.1%까지 오를 것으로 보았다.
민간저축률은 1975년의 12.7%에서 1981년 20.0%까지 정부저축률 은 5.3%에서 6.1%까지 각각 제고할 것이며 이 정도의 저축률을 달성 하기 위하여 “한계저축성향은 계획기간 중 연평균 35% 수준을 유지하 여야” 하였다.9) 즉 가계의 소비지출 억제를 여전히 강조하였다. 특히
<표 4-3>에 보이듯이, 제4차 5개년계획에서 처음으로 민간저축 부분을 기업저축과 가계저축으로 나누어 계획치를 발표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이전과 비교해서 민망하지 않을 수준으로 가계저축률이 성장했기 때문으 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가계저축에 대한 전망을 더욱 명확히 제시하 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즉 가계 부문에서 더 많은 저축을 동원하겠다 는 것이었다.
9) 앞의 책, 2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