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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현실화 조치를 시행하면서 정기예·적금 등 금융저축으로 유입되는 자금의 총액은 증가하였으나 금리인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았 다. 앞서 一장의 <표 1-5>에서 본 바와 같은 금융기관의 도시 집중 현 상은 여전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에 아래의 인용문과 같이 금융기구 의 지방으로의 확충이 저축 증강을 위한 과제로 제시되었다.

저축기구의 제도화 및 강화의 방향은 (중략) 농어촌을 포함한 지방으로 확 산해야 하고 도심지에 있어서도 변두리 저소득층으로 파고들어야 될 것 같 다. (중략) 또한 새로운 대고객 ‘서어비스’ 방법도 강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은행출납업무를 정규적으로 대기업체 등을 순회하는 방법이라든가69)

은행 지점망이 주로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지만 농협, 우체국 등을 활 용하여 농어촌 지역의 저축을 증가시키려고 하였고70) “지방 농어촌의 저축인식을 높이고 영세자금을 흡수”하려는 목적에서 지방저축독려반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이 독려반은 금리현실화 이후 재무부를 비롯한 전금 융기관이 전개한 “도시 중심의 저축운동이 한계점을 보이자 그 방향을 농어촌으로 확대하고 저축인구를 늘리려는” 방편으로 편성되었고, 1966 년 5월 16일부터 1주일 동안 농어촌 지역을 순방하였다.71)

69) 한기춘, 1969 〈우리나라 저축의 저해요인〉 《저축과 성장》, 208~209쪽.

70) 〈저축목표 140억원 농어촌까지 확대키로〉 《경향신문》 1966.1.15. 2면.

71) A조 (한국은행, 국민은행) 경기, 전북 / B조 (상업은행, 산업은행) 충북, 충남 / C조(제일은행, 은행집합소) 경북 / D조 (한국은행감독원, 농협, 재무부) 경남 / E조 (서울은행, 기업은행) / 전남 F조 (한국은행, 한일은행, 재무부) 제주, 강 〈저축증가방향전환 농어촌독려반〉 《매일경제》 1966.5.17. 1면.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한시적인 방편이었다. 따라서 농어촌을 비롯한 지방에서의 저축 증대를 위해서는 지방으로 금융기관 지점망을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67년 1월 17일 박정희는 연두교서에서 지역 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내자동원을 위해 서 지방은행의 설치를 곧 추진할 것이라고 언급하였고72) 같은 달 19일 서봉균 재무부 장관은 부산, 대구, 광주 등에 지방은행을 설립할 것이라 고 공표하였다.73)

박정희의 연두교서에서 표방되었듯이 지방의 저축을 증대하려는 목적 에서만 지방은행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래 인용문에서 지 적하고 있듯이 금리현실화 후 지방에서 유동성이 악화되고 있던 사정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최근 각 지방은 금년 들어 금리현실화 후에 잠정적으로 열렸던 대출의 문 이 재정안정계획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당위”에 억눌려 통화안정증권 인수와 농협예탁 등으로 시중은행의 대출자원이 동결당함으로써 현실화 이 전으로 환원되어 대출의 파이프가 막혀버림으로써 유동성 사정은 악화 일 로에 있으며 중소기업체의 자금난은 전례 없이 심각. (중략) 은행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기업체가 자금 루트를 사채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수요가 늘어난 반면, 절대자금량의 감소와 세금단속을 피하여 그 늘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사금융업체의 증가로 그 시장이 좁아지고 있어 사채이율도 강세로 반전. (중략) 금리현실화 이후에 한도에 막혔던 독이 터짐으로써 5월말 현재 2백억 원이 넘는 돈이 은행창구로 풀려나왔으 나 지방금융의 경색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지방에서 은행에 환류된 자금이 도시에 집중 배분되었으며 또 편중된 대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을 방증해 주는 것으로서 앞으로의 금융정책에 새로운 문제점을 배태하고 있는 것.74) (강조는 필자)

72) 〈67년도 대통령연두교서 요지〉 《동아일보》 1967.1.17. 3면.

73) 〈부산·대구·광주 등에 지방은행 곧 신설〉 《동아일보》 1967.1.19. 2면.

74) 〈악화된 지방의 자금유동성〉 《매일경제》 1966.6.6. 3면.

금리현실화는 소수 대기업에 대한 특혜 금융이 문제로 제기되면서 이 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으나, 이 조치 이후에는 자금이 은 행을 통해 대도시 또는 큰 기업에 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은행에서 자금을 융통할 수 없는 기업들이 다시 사채와 같은 사금융에 자금을 빌리게 되어 월 최고 금리 7%의 사채까지 판을 치고 있다는 지 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75)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지방에서 자금원의 기능을 담당하는 지방은행의 설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정리 하면 지방은행은 지방 저축의 증대를 통한 내자동원과 지역 기업인들을 위한 자금 제공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박정희가 지방은행 설립을 공표한 직후 지방은행 설립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1967년 1월 23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대구 농업협동조합 이사장, 대구상공회의소 고문, 기업체 대표 33명이 모여 대구은행설립 위원회(가칭)을 설립하였다.76) 부산에서는 1월 23일 부산상공회의소 회원 총회에서 부산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회(가칭) 회칙이 통과되었고 1 월 31일 열린 부산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회 전문위원회는 은행 명칭을 부산은행으로 결정하였다.77) 광주에서도 2월 7일 광주은행 설립추진위 원회가 구성되었고78) 이외에 전주와 대전 등지에서도 지방은행 설립을 준비하는 위원회들이 결성되었다.79) 이와 더불어 한국은행은 2월 23일

75) 〈판치는 사금융업〉 《매일경제》1966.6.7. 3면; 〈사금리 8분로 껑충〉

《매일경제》1966.10.7. 3면; 한국경제인협회는 전국 600개 기업체를 대상으 로 조사를 시행하였고 그 결과로 〈사금융실태조사보고〉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 보고에서 경협은 “만성화된 자금난으로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한 전체 기업의 사채의존도가 금리현실화 당시보다 급격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이들 기업들이 월 최고 7%까지 시현하고 있는 고리사채를 65.7%나 원자재구입자금으로 사용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제품 원가고를 초래, 소비생활을 위협했다고 지적하고 금리 인하에 앞서 기업 자금 융자의 양적 확대가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월 최고 7%까지〉 《매일경제》 1967.1.1. 1면.

76) 〈대구은행설립추진〉 《매일경제》 1967.1.24. 1면.

77) 〈주식회사 부산은행(가칭)설립발기인회 제의사항 (1967.3.3.)〉 《부산은행 신설 1967-1967》(DA0199120), 2쪽.

78) 〈지방은행 설립추진 상황보고 (1961.2.11.)〉 《광주은행 신설 1967-196 8》(DA0199123)

79) 〈전북도 지방은행추진위원회 결성〉 《매일경제》 1967.1.27. 3면; 〈지방

지방은행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은행감독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방은 행지도위원회를 설치하였다.80)

그러나 지방은행의 설립 준비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지방 은행 설립을 위한 자본금 마련의 어려움은 설립 준비 시작 때부터 제기 되고 있었다.

지방은행은 순수한 민간투자 1억 5천만 원 이상, 일반 시중은행과의 유치 경쟁 등 난제가 겹쳐 조속한 설립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월 23일 한은 당국자는 민간투자의 추진을 위해 곧 지방상공인들의 실무자 회의를 열게 될 예정이나 은행법 16조에 따라 최소한 1억5천만 원의 자본금을 마련해 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밝히고 설립된 뒤 일반은행과의 예금 경쟁을 배제하면서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이 아직 세워지지 않 고 있다고 말했다.81)

2월 초 한국은행 측은 지방은행 설립 예정지가 부산, 대구, 광주 등 3개 도시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고 이 3개 도시에 꼭 세울 것도 아니라 고 하면서 다른 도시에 지방은행을 설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으나82) 2월 하순에 이르면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일단 부산, 대 구, 광주 세 도시에서 설립하고 자본금은 부산 5억, 대구와 광주 각각 2억 원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83) 그 현실적인 사정은 자본금 모집 의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역에서도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대구의 경우 3 월 24일 대구은행 설립 내인가를 받고 6월 중순 개점을 목표로 주주 모 집에 들어갔으나84) 9월까지도 목표 자본금 2억 원 모집을 완료하지 못

은행 설립 추진 상황 보고 (1967.3.28.)〉 《충청은행 신설 1967-1968》

(DA0199122)

80) 〈지방은행지도위를 설치〉 《매일경제》 1967.2.23. 1면.

81) 〈지방은행설립 난제 겹쳐 늦어〉 《동아일보》 1967.1.23. 2면.

82) 〈지방은행설립 3도시 외에도〉 《경향신문》 1967.2.3. 2면.

83) 〈부산·대구·광주에 지방은행 설립〉 《동아일보》 1967.2.24. 2면.

84) 〈지방은행(대구은행)설립 추진상황 보고 (1967.4.11.)〉 《대구은행 신설

하였고85) 결국 10월 7일 자본금을 1억 5천만으로 축소하여 개업하였 다.86) 부산에서도 7월 초 개점을 목표로 설립을 추진하였으나87) 10월 25일이 되어서야 개점하였다.88) 광주는 상황이 더 여의치 않았다. 지역 의 상공인들이 출자를 기피하였고89) <표 2-6>에 나타나듯 1968년이 말에 되어서야 광주은행이 설립되었다.

1967년 10월 대구은행과 부산은행이 설립된 이후 1971년 충북은행 이 설립될 때까지 총 10개의 지방은행이 설립되었고 대개 1969년 하반 기 이후 개점하였다. 이들 지방은행은 “도시의 변두리와 지역 내 소도시”

지역으로 점포를 확장하고 이를 주축으로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였다.90) 이에 1968년 3월에는 5개에 불과했던 지방은행의 영업 점포의 수는 1972년 3월에 이르면 115개로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91)

<표 2-6> 지방은행 점포 배치 상황 (1972년 9월 30일 현재)

(단위: 개)

1967-1967》(DA0199241)

85) 〈대구은행설립추진상황〉 《대구은행 신설 1967-1967》

86) 대구은행, 1973 《大邱銀行五年》, 36쪽.

87) 〈지방은행 설립상황보고 (1967.3.20.)〉 《부산은행 신설 1967-1967》

88) 〈부산은행 개점〉 《경향신문》 1967.10.25. 2면.

89) 〈지방은행 설립추진 상황 보고 (1967.8.14.)〉 《광주은행 신설 1967-196 8》

90) 대구은행, 앞의 책, 40~41쪽.

91) 앞의 책, 46쪽.

은행명 개점 일 본점 소재지 기타 지역 계

대구은행 1967. 10. 7 15 3 18

부산은행 1967. 10. 25 22 3 25

충청은행 1968. 4. 22 8 5 13

광주은행 1968. 11. 20 8 4 12

제주은행 1969. 9. 19 3 2 5

경기은행 1969. 12. 8 10 0 10

전북은행 1969. 12. 10 4 6 10

강원은행 1970. 4. 3 3 4 7

경남은행 1970. 5. 21 6 3 9

충북은행 1971. 4. 24 3 3 6

계 86 (74.7) 29 (25.3) 115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