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국내자본을 동원할 것인가. 장기전망에는
<표 3-5>에 정리된 바와 같이 ‘소비건전화’, ‘자본시장 근대화’, ‘금융저 축의 증대’, ‘정부저축의 증대’, ‘기업저축의 증대’, ‘국민복지연금의 실시’,
‘국민투자기금의 설치’ 같은 방안이 제시되었다.
17) 위의 자료, 16~17쪽.
18) 앞의 자료, 92쪽.
<표 3-5> 장기전망의 내자동원 방안
출처: 《우리경제의 장기전망》, 92~93쪽.
이중 국민복지연금의 실시와 국민투자기금 설치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 은 이전 시기부터 강조되던 사항들이었다. 가계저축과 관련된 내용을 중 심으로 살펴보면 사치성 소비를 억제하고 소비패턴의 건전화를 통하여 가계저축을 증대시킨다는 발상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2경제와 연관된 것이었고 금융저축을 증대한다는 목표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리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장기전망을 발표한 시점은 1960년대 후반에 비해 금리 수준이
소비의 건 전화
사치성 소비 억제를 위한 세제의 보완, 과도한 교육비 및 관혼상제비의 절약, 사치성 소비재 수입규제 등 소비패턴의 건전화를 통하여 가계저 축의 증대를 기함.
자본시장의 근대화
발행 및 유통시장의 정비강화를 위하여 기업공개의 적극 추진, 정부 소 유 주식의 단계적 매각, 보험·신탁·연금 등 기관 투자가의 육성, 국민의 증권투자유도 및 중화학공업건설을 위한 국민투자채권 발행 등을 강구.
특히 소비의 건전화를 통한 절약된 가계 잉여가 증권 시장으로 흡수되 도록 할 것.
금융저축의 증대
통화량을 적정수준에서 유지함으로써 통화가치를 안정시켜 예금자의 실 질 금리를 보장하며 농어촌 저축 증대를 위한 통장거래제 실시 및 금융 점포망의 확대 등 농어촌 1조 원 저축운동의 추진. 영세한 가계예금 흡 수를 위한 저축수단의 다양화, 장기예금제 신설, 학교은행 저축배가운 동 전개 및 단자회사·상호신용금고 등 제2금융권을 육성.
국민복지연 금의 실시
피용자, 사용자 및 정부 3자가 기여금을 부담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이 를 국민투자기금을 통하여 생산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킴과 동시에 투자재원조달에도 기여함.
정부저축의 증대
불요불급한 경상비지출의 절감, 정부기업의 효율화, 조세감면의 단계적 조정 및 징세 행정의 합리화 등을 통하여 정부저축을 증대시킬 것.
기업저축의 증대
기업경영 합리화 및 생산성 향상, 물가의 안정, 금리의 인하 등을 이룩 하여 기업수익률 제고시키며 이윤의 사내유보 및 재투자촉진을 위한 特 別償却制 등 조세 유인을 강화하고 자본 시장을 육성 전개시켜 직접 금 융을 통한 재원 조달을 확충.
국민투자기 금의 설치
국민투자기금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발행된 국민투자채권을 금융기관, 보험, 국민저축조합 및 기타 공적기금 등에 인수시켜 동원된 재원이 중 화학공업 건설 등 실물 건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재원의 효율적 배분체제를 확립.
낮아 저축을 이끌어 내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았다. 1972년 1월 15일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현행 금리보다 평균 3% 정도 인하·조정한 금리개 정안을 1월 17일부터 시행하기로 의결하였고 이 조치에 따라 명목 금리 수준은 금리현실화 조치 이전과 비슷해졌다. 이러한 금리 인하에 따라 저축성 예금의 증가세가 둔화될 것이 예상되었고 그 보완책으로 저축증 대 시책의 추진을 내세웠다.19) 하지만 1972년 8월 3일 이른바 ‘8·3조 치’에 따라 재차 금리 인하 조치가 시행되었다.20)
1972년의 잇따른 금리 인하로 1960년대 후반과 같은 고금리의 시대 는 막을 내렸고, 실질금리는 거의 0에 가까운 상황이었다.21) 이에 따라 장기전망이 말한 ‘저축자산의 실질가치 보전’이 어려워졌다. 또 이렇게 명목 및 실질 금리가 내려가면서 사금융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었다. 물론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에도 사금융은 성 행하였지만, 정확한 규모는 추산할 수 없었고 계나 서민금고보다는 기업 을 대상으로 하는 사채 시장이 사금융을 대표하였다.22) 정부는 이렇게 비공식 금융시장에서 유통되던 자금을 금융기관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1972년 단기금융업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 이른바 ‘사금
19) 〈금리 17일부터 인하〉 《경향신문》 1972.1.15. 1면 20) 〈은행금리도 대폭 인하〉 《경향신문》 1972.8.3. 1면.
21) 1970년대 전반기의 금리 변동의 추이는 다음의 표와 같다.
출처: 한국경제60년사편찬위원회, 2010 《한국경제60년사 Ⅰ: 경제일반》 한국개 발연구원, 214쪽.
연도 예금은행 수신 금리 (%) 예금 은행 대출 금리 (%)
명목 금리 실질 금리 명목 금리 실질 금리
1970 22.8 5.9 24.0 6.9
1971 20.4 6.1 22.0 7.5
1972 12.0 0.3 15.5 3.4
1973 12.0 8.5 15.5 11.9
1974 15.0 -7.5 15.5 -7.1
1975 15.0 -8.2 15.5 -7.8
22) 〈양성화될 돈놀이 대금업자 등록제 실시의 안팎〉《경향신문》 1969.3.15.
4면;〈사채시장 그 실태와 양성화 정책의 문제점〉 《경향신문》 1969.8.13. 4 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지만, 이 시기 성행한 사 금융에 대한 정리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이정은, 2017〈박정회 정권 시기 대 자본의 외자도입과 금융기관 진출 연구 (1960~1973년)〉, 305~309쪽.
융양성화’ 3법을 제정하였다.23)
먼저 정부는 1972년 7월 단기금융업법을 공포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단기금융업은 6개월 이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어음 및 채권증서의 발행, 할인, 매매, 인수 등의 업무 등을 말하며 이외에도 단자회사는 정부의 허가를 얻어 유가증권의 매매, 중개, 대리, 인수, 모집 등의 업무를 취 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24) 그 업무에서 나타나듯이 단기금융업은 가계를 대상으로 한 금융형태가 아니라 기업에 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채 시장을 양성화하 기 위한 조치였다.25)
한편, 상호신용금고와 신용협동기구는 기업보다는 ‘서민’을 위한 금융 기관이었다. 1972년 8월 공포된 상호신용금고법에 따라 사금융 시장에 서 음성적으로 운영되던 사설 서민 금융업체들이 제도화되었다. 상호신 용금고는 상호신용계, 신용부금, 할부 상환 방식에 의한 소액신용대출, 부금자에 대한 어음의 할인 등의 업무를 취급하였는데 특히 상호신용계 는 일반의 사설금융계를 제도적으로 도입한 업무 형태였다.26)
신용협동기구는 도시와 농촌의 자연부락, 직장, 학교, 교회 등을 단위 로 자생적으로 조직된 인적·경제적 협동체로서 1972년 8월 제정된 신용 협동조합법으로 제도 금융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신용협동기구로는 신 용협동조합27), 마을금고28), 농협과 수협의 단위조합 등이 있었다.29)
23) 한국경제60년사 편찬위원회, 2010 《한국경제60년사 Ⅰ: 경제일반》 한국개 발연구원, 223쪽.
24) 한국은행, 1976 《저축총람 1975》, 45쪽.
25) 단기금융업 양성화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60년 대 후반부터 전경련 등 자본가 집단에서도 기업의 원활한 자금 조달을 위한 조치 라며 이를 양성화할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였고 단기금융업법 제정 이후 대자본들 은 단자회사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대한 구체적은 설명으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이정은, 2017 앞의 논문, 309~317쪽.
26) 위의 자료, 46쪽.
27) 한국은행에 따르면, 신용협동조합은 1960년 5월 1일 부산의 메리놀병원에서 28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성가신용협동조합을 그 효시로 한다. 그리고 1964년 4 월 55개의 신용협종조합이 모여 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창설하였다. 한국은행, 1975 《한국의 금융제도》, 334쪽.
28) 마을금고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의 사업으로 추진된 농촌신용조합으로 1964년
사금융을 제도화하는 조치를 취한 직후 정부는 농어촌 지역의 금융저 축을 증대하려는 시책을 마련하였다. 1973년 9월 5일 정부는 1974년 부터 1980년까지 7년간 농어촌 지역 저축목표액을 1조1,165억 원으로 정하고 이른바 ‘농어촌1조 저축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소영 농수산부 장관은 이 저축운동을 통하여 농어촌의 유휴자금을 저 축으로 흡수하여 산업자금화하고 자금을 다시 농어촌개발에 환원하여 식 량증산 농어촌의 근대화사업에 재투자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를 위한 조치로 전농어촌에 저축점포를 두고 전국 34,665개 새마을에 새마을저축반을, 2,317개 자립마을에는 마을금고를 설치할 것이며, 농 어민의 저축을 우대하기 위해 이자소득세 면세점을 인상하여 1천원 미 만의 이자에 적용되던 면세를 6천원까지로 확대하여 적용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농협과 수협이 벌이고 있는 농어가의 1가구 1통장 갖기 운동을 확대하여 ‘농어민 1인 1일 5원 개미저축’을 적극 전개할 것이라 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저축추진기구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30)
이 계획대로 1973년 10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국민저축추진중앙협의 회가 설치되었고 협의회의 위원장은 국무총리가 맡고 위원은 각부 장관 과 한국은행 총재, 관계 전문가 등이 담당하였다. 협의회는 산하에 도시 저축위원회, 농어촌저축추진위원회, 소비생활합리화추진위원회를 설치하 였고, 서울, 부산과 각 도에 지방협의회를 두었다.31) 11월 농어촌 1조 저축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세부 시행계획이 마련되었고 이는 앞서 서술 한 정소영 장관의 발표 내용을 구체화한 것이었다.32) 각종 유인 조치들
영남지역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대부분 농촌의 자연부락을 단위로 조직되었고 그 규모는 영세하여 회원 수는 50여명이었으며, 회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위의 책, 335쪽.
29) 한국은행, 1978 《저축총람 1978》, 94쪽.
30) 〈내년부터 80년까지 농어촌 1조원저축운동〉 《경향신문》1973.9.6. 1면.
31) 〈대통령령 제6,905호 국민저축추진중앙협의회 규정〉 《관보》 1973.10.13.
32) 수산업협동조합, 〈농어촌 1조 저축 추진 세부 시행 계획 (1973.11.9)〉
《어협예규관계철》(BA0177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