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부가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목표와 내용에 대해 미국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7.1%라는 목표 성장률을 과도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1961년 11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 문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공동회담을 할 때 비현실적인 성장률, 과도한 내자의 동원, 수출 전략의 결여 및 과도한 중화학공업건설안을 비판하였 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 정부에 가지고 있던 불만은 단지 계획의 내용에 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의 또 다른 원인은 군사정부가 정책 발
연도 1962 1963 1964
계획 526 805 873
실적 157 275 395
달성률 (%) 29.8 34.2 45.2
표 전 미국과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특히 긴급통화조치법 의 발표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미국과 사전 협의 하지 않았던 점이 미국 이 한국정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의 핵심이었던 것이다.61)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을 관리하기 위해 1962년 말부터 유솜은 한국 정부에게 재정안정계획을 재개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원조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정부에게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63년 예산 편성 때부터 사실 상 재정안정계획의 실시가 재개되었다. 또한 군사쿠데타로 폐지된 한미 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를 대체하는 한미경제협력 위원회(Economic Cooperation Committee)가 1963년 7월 19일 신설 되었는데 이는 유솜과 한국 정부 사이 경제 정책 협의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62)
미국의 한국 정부의 경제 정책에 수정 압력을 가하는 가운데, 제1차 5개년계획의 1차 연도와 2차 연도인 1962년과 1963년의 경제 운영 실 적 역시도 매우 부진하였다. <표 1-8>에 나타나듯 계획의 목표 성장률 은 각각 5.7%, 6.4%였으나, 실제로는 2.8%, 4.4%로 목표에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 총투자율과 국내 총저축률 수치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1963년도 국내총저축률 실적의 경우 원 계획의 목 표인 7.3%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1.6%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정부는 1962년 11월에 최고회의와 내각의 합동실무반을 편 성하여 제1단계 작업에 착수하였고 1963년 2월부터 2단계 작업에 들어 갔다. 2단계 작업에 앞서 1963년 7월 시점에서 국민 경제 전망에 입각 한 제3년차 계획을 만들고 이를 1963년 7월 29일에 확정하였고 여러 주요 변수를 중심으로 기본 모형을 검토하고 이에 의거하여 성장 규모를 책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본모형과 3년차 계획까지의 수치를 적용하여
61) 박태균, 앞의 책, 330~332쪽.
62) 기미야 다다시, 2008 《박정희 정부의 선택: 1960년대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냉전체제》 후마니타스, 152~162쪽.
최종적인 보완 계획의 작성 작업을 마무리하였다.63)
보완계획의 기본 방향을 살펴보면, “모든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시정하 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다”라는 1차 계획의 기본 목표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기본 목표 아래 설정된 기본 과제 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수정이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도받는 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64)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완계 획은 원계획에 비해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민간 영역의 자율성을 이전 보다 더욱 강조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보완계획의 성장 목표를 살펴보면 원 계획의 목표인 7.1%
보다 낮은 5%로 목표를 하향 조정하였다.65) 이에 따라 총 투자 규모 1,658억 원으로 원계획에 비해 33.1% 축소되었고 내자 조달 계획도 함께 하향 조정되었다.66)
<표 1-8> 제1차 5개년계획 원안과 보완계획의 투자율·저축률 비교 (단위: %)
출처: 경제기획원, 1964,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보완계획》, 19쪽.
비고: 보완계획의 평균은 보완계획 기간 중의 평균임.
()안의 수치는 1962~1963년의 실적임.
이러한 조정에 따라 가장 큰 규모의 감축을 겪은 부문은 운수·통신·기 타 서비스업 등 3차 산업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축소를 한 대상은
63) 경제기획원, 1964,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보완계획》, 6쪽.
64) 위의 자료, 9쪽.
65) 앞의 자료, 11쪽.
66) 앞의 자료, 17~19쪽.
연도 GNP 성장률 국내총투자율 국내총저축률
원계획 보완계획 원계획 보완계획 원계획 보완계획 1962 5.7 (2.8) 20.1 (15.5) 3.7 (2.0) 1963 6.4 (4.4) 23.0 (17.8) 7.3 (1.6) 1964 7.3 5.0 24.1 17.0 10.3 6.0 1965 7.8 5.0 23.3 16.9 12.0 7.3 1966 8.3 5.0 22.7 16.9 12.9 8.2 평균 7.1 5.0 22.6 17.0 9.2 7.2
바로 주택 부문이었다. “운수·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에의 투자는 국내 재원의 순조로운 개발과 유통을 위하여 최대한 이를 보장”했지만, “성장 효과가 비교적 낮은 주택투자는 그 사회정책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사정 하에서의 시급한 공업화에의 요청에 부응하여” 그 규모 를 부득이 하게 축소했던 것이다.67)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택 부문에 대한 투자 전액이 내자로 구성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내자 조달이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택 부 문에 대한 투자가 축소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택 부문 에 대한 투자의 축소는 1차 5개년계획의 주택 계획이 영세민과 지방 건 설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보완계획의 방향이 경제 성장 그 자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68)
수정 보완에 따라 목표에 조정이 있었으나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중대한 문제였고,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 재원의 조달에 관 하여 내자와 외자의 구분은 없었다.
투자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소비를 억제하여 국내저축을 증강시키는 한 편 외국 자본을 원활히 도입하여야 한다. 그러나 외자 중 차관은 상환하여 야 하므로 종내에는 국내저축에 의존치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경제성장 을 촉진하기 위하여는 외자를 적극 유치하는 한편 국내 저축을 증강시켜야 한다. 당초 계획에서는 국내 저축률을 과거 10년간의 평균 저축률의 약 2 배나 되는 9.2%로 책정하였으나 이는 현실적으로 너무 높기 때문에 너무 무리가 있어 보완기간 중에는 7.2%로 조정하였다.69)
67) 앞의 자료, 18쪽.
68)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해본다면, 주택부문에 대한 투자와 같은 사회정책에 대한 투자가 축소된 것은 사회정책에 들이는 자금을 사회적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투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소모적인 비용으로 간주하여 이러한 정책들이 경제 지표 상 상승의 효과를 보이는 부문에 비하여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정책을 둘러싼 비용/투자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엔뉘 안데르손, 박형준 옮김, 2014 《경제성장과 사회보장사이에서: 스웨덴 사 민주의, 변화와 궤적》 책세상, 1장.
위 인용문에 적힌 바와 같이 저축률을 9.2%에서 7.2%로 하향 조정 하였으나 이 역시도 과거 평균 저축률에 비해서는 높은 수치였다. 보완 계획에 따른 1964년, 1965년, 1966년의 목표 저축률 6.0%, 7.3%, 8.2%는 1962년과 1963년의 저축 실적인 2.0%, 1.6%에 비하면 매우 높아진 수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축 증강을 위한 조치들이 요구되었 고 보완계획에서는 금융 자산 형태의 저축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투 자를 촉진할 것이라고 계획하였다. “우리나라는 지속되는 인프레로 인하 여 저축된 자본이 생산적 투자로 흐르지 않고 부동산 및 귀금속에 투자 되거나 기타 투기자금이나 사치성 자금 등 비생산적 형태로 취하는 경 향”이 많기 때문에 “가계의 퇴장된 잉여 저축을 흡수하여 생산적 투자에 종사하는 기업에 합리적이고도 지속적으로 배분하는 자동적 내자조달의 기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저축조합 저 축을 비롯하여, 일반은행, 산업은행, 신탁회사, 보험회사, 체신저축, 증 권회사 등을 적극으로 육성하여 저축동원에 활용해야 한다고 적고 있었 다.70) 보완계획의 저축 증강을 위한 조치들은 1961년 말에 작성된 국 민저축운동계획의 방침과 거의 일치하였다. 따라서 보완계획 작성 이후 한국 정부는 저축동원의 속도를 조절하였지만, 여전히 일반 대중들의 저 축을 동원하기 위해 이전부터 실시해 오던 조치들을 유지하려고 했다.
정부는 저축 분위기 조성을 위해 1964년 5월 열린 국무회의에서 9월 21일을 저축의 날로 지정하기로 결정하였고71) 이는 6월 16일자 대통령 령으로 시행되었다.72) 제1회 저축의 날 기념식은 박정희 대통령과 각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 및 유솜 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는 데73)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
69)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보완계획》, 18~19쪽.
70) 앞의 자료, 33~37쪽.
71) 〈저축의 날에 관한 건 (안) (1964.5.28)〉《각의상정안건철》(BA0084407) 72) 〈저축의 날에 관한 건〉 《관보》1964.6.16. 2쪽.
였다.
오늘의 시점에서 가장 긴요한 일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내자를 원활하 게 동원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특히 내자의 조달은 모든 국민의 저축이 가장 큰 원천이며 또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 리는 어떠한 있더라도 저축을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것입니 다. (중략) 돌이켜 보건대, 우리 국민은 과거 오랫동안 극심한 인플레와 외 래품 등의 영향을 입어 분에 넘치는 사치와 낭비의 습성에 젖어 왔었고, 눈앞의 오늘만을 생각하며 내일을 돌보지 아니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만은 솔직이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읍니다.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여 러 나라의 경우, 그들의 발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그 국민의 근면과 검소와 절약에 바탕을 둔 ‘저축의 힘’이 컸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중략) 물론 우리들은 오늘을 참고 내일을 위하여 저축 을 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어려웠다는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 략) 한 푼이라도 저축하는 조그마한 정성이 바로 여러 분을 잘 살게 만드 는 길인 동시에, ‘잘 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길임을 깊이 인 식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74)
앞으로 외부의 사정이 녹록치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 지를 가지고 경제개발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내자를 효과적으로 조달해야 하고 그 핵심에는 바로 국민 각자의 자그마한 저축이 있다는 점을 역설 하고 있었다. 국민 개인들의 살림이 어려운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지만
‘한 푼이라도 저축하는 조그마한 정성’이 모여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이 를 바탕으로 번영을 이루고 있는 나라들처럼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잘 살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국가 경제 가 건설되었을 때 국민 각자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분에 넘치는 사치와 낭비를 없애고 근면과 검소와 절약을 삶의 신조로 삼아야 했다. 박정희의 이 담화의 내용은 앞으로 제
73) 〈저축의 날 기념식〉 《동아일보》 1964.9.21. 4면.
74) 대통령비서실, 1973 〈제1회 ‘저축의 날’ 치사 (1964.9.21.)〉 《박정희대통 령 연설문집 2: 제 5대편》, 189~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