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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재산형성지원 제도에 대한 논의의 전개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정부는 투자 재원의 대부분을 국내 자 본으로 충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에 따라 저축을 증대시킬 필요가 대두되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겠다 고 선언한 이후 정부는 국민투자기금을 설치하고 국민복지연금을 도입하 여 이 기금을 국민투자기금의 재원으로 활용하려고 하였으나 국민복지연 금의 도입은 국민들의 반발과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실패하였다. 따 라서 가계 저축 동원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활용되어야 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고 진정되었 으나 그 짧은 기간 동안의 불황은 사회정책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 가 되었다. 정부는 불황기 속에서의 고용 유지와 새로운 취업 기회 확대 를 위해 긴급실업대책법을 제정하는 한편 고용안정본부를 설치하기로 하 였다. 1975년 2월 17일 고재필 보건사회부 장관은 보사부 연두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기본 시책을 보고하고 “실업자에 대 한 현행 시책이 다원화되어 있어 일원적으로 다룰 새로운 기구 설치와 관련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에서 고 장관은 1974년 하반기부터의 실업자 증가 경향에 비추어 실업 실태를 조사·분석하고 이 에 대처하는 실업대책사업과 공공사업에 실업자를 흡수하게 하여 실업자 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이의 성과를 확대하기 위해 관 계부처로 구성되는 고용 안정본부를 설치 운영하겠다고 말했다.14)

이렇게 실업문제가 고조되자 사회복지와 사회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 었다. “석유파동 이후 고도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고도성장의 부 작용 해소를 위해 사회개발과 복지증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14) 〈긴급실업대책법 제정〉 《매일경제》 1975.2.17. 1면.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준 연도인 1976년의 예산안에 대해서 여전히 사회개발 및 복지예산의 비중이 낮다 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15) 또한 대한상공회의소는 경제개발의 결과 격차가 심화되어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분배 국민경제의 구성에서 피고용자의 보수가 1962년 36.6%에서 1974년에 는 36.8%로 크게 변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경제규모의 확대 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노동자의 몫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평가 하였다. 이외에도 대한상공회의소는 농가와 비농가의 격차 및 지역 간 격차 등을 문제로 제시하였다.16)

이러한 상황에서 ‘적합한 소득배분’의 수단으로 활용된 방법은 ‘免稅點’

의 인상과 근로자재산형성 방책들이었다. 우선 소득세의 면세 기준의 완 화를 살펴보자. 유신 정권은 1974년 1월 14일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 통령긴급조치’(긴급조치 3호)를 통해 소득세의 면세점을 월수입 1만 5 천 원에서 5만 원으로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와 더불어 취득 세와 재산세의 면세점을 3만 원에서 6만 원으로 각각 배로 인상하였고 자동차세, 고급주택, 별장, 골프장 등의 사치성 재산에는 중과세하였 다.17)

긴급조치 3호의 임시방편적인 면세점 인상은 1974년 조세개혁을 통 하여 일종의 소득보장정책으로 제도화되었다. 1974년 8월 12일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조세 부담을 덜기 위해 다음 해부 터 적용되는 세제에서 근로 및 사업소득자의 인적 공제금액을 5인 기준 월 5만 5천 원으로 하고 상여금에 대해서는 특별 공제 제도를 채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9단계로 되어 있는 소득세율을 8~70%까지

15) 〈「2조4백39억원」의 허실 새해 예산안의 분석 (중) 성장과 복지〉 《동아일 보》 1975.9.30. 3면; 〈예산 비율 3.9%로 퇴행 사회복지〉 《동아일보》

1975.10.6, 3면.

16) 대한상공회의소, 1976 《경제개발의 성과와 과제 – 앞으로의 개발전략을 위 한 제언》, 57~60쪽.

17) 〈대통령 긴급조치 3호 선포〉 《매일경제》 1974.1.14. 1면; 〈내무부 소득 할 면세점 5만원으로〉 《매일경제》 1974.1.14. 1면.

16단계로 나누고 상여금의 경우엔 연 100% 이내는 전액 특별공제를 하되 12만 원을 최고한도로 결정하였다. 근로소득자 및 사업소득자에게 적용되는 인적 공제액은 기초공제 1만 5천 원, 배우자공제 1만 원, 부 양가족공제 1만 5천 원(1이당 5천 원으로 3인 가족 기준), 障害者 공제 5천 원이며 봉급생활자 등 근로생활자에게는 월 1만 5천 원의 근로소득 공제를 더하기로 하였다.18) 이러한 정부의 세제 개편은 분류소득과제제 도를 종합소득세제로 전환하고 인적 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등 소득보장 기능을 조세제도 내에 포괄하고자 한 것이었다.19)

이러한 면세점을 활용한 조세 정책에 대해서 야당도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정부의 정책보다 더욱 면세점을 인상하거나, 아니면 공제 규모를 확대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야 간의 공방이 국회에서 벌어지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정부나 야당 모두 세수 부담 경감을 통 한 방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입장을 공유하였던 것이다.20) 그리고 야당 의 주장대로 점차 면세점을 인상하는 방안이 추진되기도 하였다.21)

세금 면제와 더불어 정부가 추진한 소득보장책은 재형저축으로 대표되 는 ‘근로자재산형성’ 방법이었다. 1975년 들어서자마자 정부가 근로자의 재산형성을 지원하고 저축을 늘리기 위한 근로자재산형성제도의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22) 1월 27일 박정희 대 통령 연두 순시 보고 석상에서 김용환 재무부 장관은 “격심한 인플레 충 격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고 장기적으로 중산층재산형성 촉진을 위해

18) 〈소득세율 내년부터 인하 5인 가족 월 55,000원 공제〉 《동아일보》

1974.8.12. 1면; 〈근로·사업소득세 대폭 경감〉 《경향신문》1974.8.12. 1 면.

19) 김도균, 2013 〈한국의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형성과 변형에 관한 연구 – 개발국가의 저축동원과 조세정치를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75쪽.

20) 위의 논문, 75~77쪽.

21) 〈월 10만원 30만원 미만 중산층담세경감에 중점〉 《동아일보》

1976.6.16. 1면; 〈「월 30만 원 이하」에 혜택〉 《경향신문》 1976.6.16.

2면.

22) 〈근로자 재상형성 지원 위해 저축할증제 검토〉《동아일보》1975.1.7. 2면;

〈근로자재산형성제 구상 저축에 세제 금리 등 우대〉《매일경제》 1975.1.7.

7면.

연내로 근로자재산형성촉진법안을 제정”하겠다고 보고하였다.23) 또한 1 월 30일 김 재무장관은 “근로자의 생활보호와 재산형성 지원”을 위해 소 비 금융 및 상업 금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것이며 “지금까지 금융정책 운영에 있어서는 설비 금융, 정책 금융 등 기업금융에만 우선했으나 금 년부터는 일반 서민의 생계 금융에 우선을 두겠다”고 말했다.

면세점 인상과 근로자 재산형성책은 앞서 서술한 민간 저축을 통한 내 자동원과 연관되어 있었다.24) 제4차 5개년계획기간 중 내자동원을 극대 화하기 위해 “물가안정에 의한 저축 자산의 실질가치보전, 소비건전화를 통한 소비지출의 절감, 부동산자산의 억제 등 저축행태의 건전화, 금융 자산의 다양화를 비롯한 저축 유인의 강화 등”을 주요 정책 과제로 고려 할 것이며25) 이와 같이 “민간저축의 확대에 주력”할 것이라고 계획하였 다.26)

구체적으로 가계 저축의 증대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가계의 가처 분 소득의 증대와 아울러 인구증가와 억제, 교육제도의 개선, 저렴한 보 건의료제도의 확립 및 의료보험제도의 실시, 가정의례준칙의 생활화 등 으로 가계비부담을 절감시킴으로써 가계의 저축여력을 증대시킬 것”이 며, “사치품 및 고가의 내구 소비재 등에 대한 특별소비세의 부과, 수요 의 가격 탄력성이 높은 소비재 산업에의 투자억제 및 고급 소비업소의 증설 억제 등으로 소비 증가를 억제하고 지나치게 소비 자극적이거나 왜 곡된 광고 행위를 자율 규제케 함으로써 소비유인을 약화시키는 한편 양 도소득세의 효율적인 활용으로 토지, 건물 등에 대한 부동산 투기를 강 력히 억제하여 민간저축행태를 건전하게 유도”할 것이라고 제시되었다.

이러한 저축여건의 조성과 아울러 “물가안정에 의한 저축자산의 실질가 치보전, 저축자의 수요에 부응한 저축 수단의 개발 확충, 각종 저축공제

23) 〈근로자 재산촉진법 연내 제정〉 《동아일보》 1975.1.27. 1면.

24) 〈일석이조」 겨냥 봉급자생활보호 내자동원극대화〉 《동아일보》

1976.1.19. 3면.

25) 내자동원실무반·재정실무계획반, 1976 《제4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내자동원부 문계획 1977~1981》, 5쪽.

26) 앞의 자료, 10쪽.

제의 확대 실시, 금융기관의 이익도를 제고하기 위한 능률적인 지불 제 도의 개발 등으로 저축유인을 강화”하여 가계 저축의 여력이 금융저축시 장으로 유입되도록 할 것”이었다.27)

정리해보면 첫째로 가계에서 교육과 의료 등에 지출하는 비용 부담을 경감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를 정비하고 불필요한 사치성 소비를 억제 함으로써 저축여력을 증대시킬 것이며, 둘째로 이 여력이 부동산투기 등 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저축의 실질 이익을 보장하고 더 나아가 이익 률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제대로 시행된 것이 거 의 없었다. 의료보험제도는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으나 이는 500인 이상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에 한하여 적용되었고 그 외 노동자 나 자영업자 및 농·어민은 의무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었다.28) 교육기회 의 확대를 명목으로 중·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교육시설 의 확대에 필요한 비용은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그 수요자인 학부모에 게 전가되어 공납금은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꾸준히 증가하였 다.29) 또한 부동산 투기 역시도 기승을 부려 1977년의 평균 지가 상승 률은 42%였고 1978년에는 66.7%에 달하기도 하였다.30) 그런데 역설 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자금을 각 가계는 스스로 준비해 야 했고 저축은 그 주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31)

근로자재산형성이란 용어는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72년 노동

27) 앞의 자료, 31~32쪽.

28) 황병주, 2011,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의사학》

20-2(통권39호), 425~426쪽.

29) 1967~1976년 10년 간 중학교는 641.3%, 공립 고등학교는 642.8%, 사립 고등학교는 629% 인상되었고 연평균 인상률은 연평균 물가상승률 15%를 상회 하여 중학교 28.4%, 공립고 24.6%, 사립고 24.3%였다. 정무용, 2013

〈1970년대 중·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행과 ‘교육격차’〉 《역사문제연구》

29, 126쪽.

30) 전강수, 2019 《부동산공화국 경제사》 여문책, 114~115쪽.

31) 1978년 12월에 시행한 저축시장조사의 결과 저축의 목적에 대한 응답으로(2 개 이내 복수 응답) ‘자녀교육비 마련’이 56.2%로 가장 높았고 ‘질병 및 불시필 요자금에 대비’가 42.0%으로 그 다음이었다. 《저축시장조사 1979년 4월30 일》,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