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전망이 발표될 즈음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한 지면에 개발도상국 의 내자동원문제와 한국의 내자동원 방안에 대한 글을 게재하였다. 그의 직책상 이 글은 그의 개인적 생각을 담은 것이 아니라 장기전망에 따른 정부의 내자동원 전략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장기경제전망이 제시하는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는 내자의 효과적인 동원이 관건”이기 때 문에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내자동원상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내 자동원상의 문제점”으로 첫째, 저축성향이 낮다는 점을 꼽았다. “1971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52불이고 이때 국민저축률은 14.5%로
100) 《사회개발 – 부문별 장기전망》, 263~264쪽.
101) 〈정부·여당 결정 복지연금실시 1년간 더 연기〉 《경향신문》1975.910. 1 면; 〈각의 의결 복지연금 실시 시기 대통령령으로 결정〉《경향신문》
1975.11.5. 1면.
102) 〈「복지연금」 내년 실시〉 《매일경제》 1975.11.8. 7면.
103) 〈정부·여당 복지연금제 실시검토 내년부터 월소득 5만원 이상〉 《매일경 제》 1977.3.26. 7면.
104) 〈정부 80년대에 검토 국민복지연금 무기 연기〉 《매일경제》 1978.5.20.
1면; 국민복지연금은 1988년 국민연금이라는 명칭으로 도입되었다. 국민연금은 1988년 1월에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하였고 1992년 1월부 터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 1995년 7월에 농어촌지역으로 당연 적용이 확장 되었다. 양재진 외, 2008 《한국의 복지정책 결정과정: 역사와 자료》 나남, 134쪽.
이는 1인당 국민소득수준이 이와 비슷하였던 1955년의 일본의 국민저 축률 25.5%, 1967년의 대만의 23.3%에 비하여 매우 낮은 수준”이라 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이유로 “재정, 금융, 산업, 투자정책이 국내저축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종합 추구되지 못하였고, 물가가 안정되지 못하여 장기적 ‘인프레’ 심리가 지배하여 왔다는 점, 비합리적 가계 지출 및 사 치성 소비지출이 과다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05) 이러한 지적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비합리적 가계지출 및 사치성 소비는 지금 까지 살펴보았듯이 1961년 최고회의가 작성한 종합경제재건계획, 아니 그보다 먼저 1950년대부터 언급되었던 것이었다.
<표 3-12>에 드러나듯이,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저축률은 아시 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교해서 낮은 편이었다. 일본, 대만은 물론이고 태 국, 필리핀 등에 비해서도 한국의 저축률은 낮은 편이었다. 한국의 국민 저축률은 대체로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1960년대 초반처럼 아시아의 다 른 국가들에 비해서 여전히 낮은 수준이었다.
<표 3-12> 국민저축률의 국제 비교 (1967~1975년)
(단위: %)
출처: 김윤환 외 편, 1977 《한국경제론》 유풍출판사, 682, 684쪽; 《저축 총람 1983》, 332~333쪽.
비고: 김윤환의 통계를 바탕으로 하되 한국 부분은 저축총람에 의거하여 수정.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낮은 저축률의 이유로 인플레이션과 비합리적 소비가계 지출 및 사치성 소비를 지적하는 것은 비단 남덕우만의 인식은 아니었다.106) 그런데 여기서 적정한 저축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라
105) 남덕우, 1973 〈개발도상국에 있어서의 내자동원문제〉 《재정》1973.8, 57 쪽.
연도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한국 11.9 13.6 17.5 17.3 15.4 15.7 23.6 20.5 18.6 일본 37.2 38.9 39.1 40.5 39.3 38.9 39.9 37.3 32.1 대만 23.2 23.3 24.3 25.8 28.3 30.1 33.0 30.1 25.3 태국 14.9 13.4 17.5 20.2 17.8 18.9 21.9 22.2 22.7 필리핀 21.1 20.0 21.9 20.8 19.8 22.0 26.3 25.2 22.0
는 물음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저축률이 낮 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다른 나라와의 비교했을 때 저축률이 낮았 다는 것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몇 퍼센트의 저축률이 한국 경제에 적정한 것인지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 교는 가계에 소비 절약을 요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남덕우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한국의 “금융저축수준이 저위에 있다는”
것을 꼽았다. “1965년 이후 금융자산증가속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증권시장의 미발달로 일반대중의 유가증권보유가 낮은 수준에 있 으며, 비은행금융기관이 발달되지 못하여 보험, 신탁자산 또한 낮은 수 준에 머물고 있으며, 농촌 부문의 저축동원체제의 미비로 농촌저축이 매 우 낮을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의 이용도가 낮아서 농촌의 저축을 금융저 축형태로 동원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107) 이러한 문제 에 대한 조치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하였고 ‘농어촌 1조 저축운동’을 시행하였다.
남덕우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단지 저축으로 자금을 더 많이 조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저축으로 동원된 자금을 어떠한 방법을 통하여 적절하게 배분하고 운용할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 하여 이글을 썼다. 그는 재원의 분배 면의 경우, 한국의 자본시장이 “아 직 발전의 초기단계에” 있어 “설비금융을 충분히 공급하는 기능을 발휘 하지 못하고”,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도 “주로 운전자금 중심의 공급에 치중하였고 유일한 개발금융기관인 산업은행도 그 재원을 주로 정부의 재정자금이나 대충자금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민간자금을 광범하게 동 원하여 설비자금을 공급하여 주는 기능은 극히 미약”하였고 “그 결과 기 업은 설비투자를 주로 해외차관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보았다.108)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선택한 방안은 국민투자기금의
106) 이현재 외, 1979 《한국의 민간저축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42~45쪽.
107) 위의 자료.
108) 앞의 자료, 57쪽.
설치와 기업공개의 촉진을 통한 자본시장의 육성책이었다.109) 그 중 남 덕우가 강조한 것은 바로 국민투자기금의 설치였다. 그는 “가계금융저축 의 대부분이 금융기관의 형태로” 되어 있고 “금융기관은 주로 단기자금 의 공급에만 주력”하여 “설비 매입을 위한 장기자금의 공급체제”가 미비 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어서 자본시장이 “아직 발달되지 못한 상태 에 있으므로 기업은 부득이 손쉬운 외국차관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보았 다. 따라서 그는 중화학공업건설을 위한 막대한 설비금융수요를 고려할 때 “국민의 광범한 저축을 동원하여 설비투자에 투입할 수 있는 효과적 인” 방법으로 국민투자기금의 설치를 제시하였다.110) 정부가 국민투자기 금을 설치하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재무부 장관으로서 남덕우가 이 글을 쓴 목적이었다.
국민투자기금 법안이 정부 안에서 논의될 당시에는 모든 국민들이 중 화학공업 건설에 출자를 함으로써 국민 스스로 중화학공업 건설의 주체 임을 느끼게 하자는 취지에서 그 명칭으로 ‘국민출자기금’이 제안되었으 나 ‘출자’라는 단어가 주주로 직접 참여한다는 혼란을 일으킬 수 있어서
‘국민투자기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11) 그러나 이 법안을 국회에 상 정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에는 국민투자기금과 국민출자기금이라는
109) 이를 위해 정부는 1972년 12월에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주 식을 상장하는 기업의 재무제표 공개 요건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재무부 장관 은 기업공개심의회의 의결을 거친 후 특정 기업에게 기업공개 명령을 할 수 있었 고, 공개 명령을 받은 기업이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금융 지원을 제한한 당하고 세법상의 불이익을 받았다. 반면 공개한 법인은 세제 금융상의 특전을 받았다.
그러나 후일 회고에서 남덕우는 이 법의 제정 이후 기업을 공개하여 증권시장에 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이 늘기는 했으나 그 증가 속도가 기대만큼 빠르지는 않 았다고 평가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주식회사는 1만 여개가 있었으나 1974년 5월말까지 공개한 기업은 50여개에 불과했다. 남덕우, 2009 《경제개발의 길목 에서》 삼성경제연구소, 98~105쪽.
110) 앞의 자료, 58쪽.
111) 〈국민출자기금법〉 《경제장관회의안건》(BA01396280); 박영구에 따르면, 모든 국민들이 중화학공업 건설에 출자를 함으로써 국민 스스로 중화학공업 건설 의 주체임을 느끼게 하자는 취지로 처음에 ‘국민출자기금’라는 명칭이 제기되었 다. 그러나 ‘출자’라는 개념은 주주로 직접 참여한다는 혼란을 일으킬 수 있어서
‘국민투자기금’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박영구, 2012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과 정과 내용(Ⅰ)》 해남, 534쪽.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112)
이러한 혼동은 국민투자기금의 자금 조달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1973 년 8월 31일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국민투자기금법안을 정기국회에 상 정하고 이를 1974년부터 실시할 것이라고 언급하였고, 중화학공업을 중 심으로 한 주요 산업의 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국채 형식으로 국 민출자채권을 발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기금은 국민저축조 합자금, 국민복지연금기금, 우편저축자금, 각종 공공기금, 금융기관 예 금 재원 일부, 보험신탁자금의 일부에 인수시키거나 또는 일반 매각을 통해 조달될 것이었다.113)
국민투자기금 법안은 큰 변화 없이 통과되었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 야당 국회의원들로부터 강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서 이에 대한 논 의가 전개되었고,114) 중요 산업 항목에 식량증산사업이 포함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115) 전반적으로는 정부의 안이 관철되었다.116) 국민투 자기금법은 1973년 12월 14일에 제정되었고 이는 1974년 1월 1일 자 로 시행되었다.117)
<표 3-13> 국민투자기금법의 주요 내용 (1973년)
112) 〈국민출자기금법안 주요 내용〉 《동아일보》 1973.8.31. 2면; 〈연리 12% 국민출자기금 채권발행으로 조달〉 《경향신문》 1973.8.31. 1면;
113) 〈국민출자채권 내년 발행〉 《동아일보》 1973.8.31. 1면.
114) 〈중화학투자기금 강제성 띠지 않아〉 《동아일보》 1973.8.31. 1면.
115) 〈국회재무위 채권발행〉 《매일경제》 1973.11.29. 1면.
116) 〈남재무 재무위서 답변 “채권 강제소화않겠다”〉 《경향신문》 1973.10.20.
1면.
117) 〈국민투자기금법 [시행 1974.1.1.] [법률 제2635호, 1973.12.14. 제정]〉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http://www.law.go.kr)
구분 주요 내용
재원
- 국민투자채권 (국회 의결이 필요함) - 정부 회계 전입금 또는 예탁금 - 국민투자기금 결산 잉여금 - 한국은행 일시 차입금 국민투 - 국민저축조합 조합원 저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