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발표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보》를 통해 민간자금을 금융저축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안이 제시되었다. 산업 은행 총재 서진수는 “민간자금의 예금으로의 흡수는 민간의 자율적인 저 축의욕을 통해서” 전개되어야 하지만 막대한 민간자금을 이러한 방법으 로 충분히 동원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강제가 수반되는” 방법으 로 일반의 영세자금을 예금으로 흡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가 말한 어느 정도 강제가 수반되는 방법은 국민저축조합을 결성 하는 것이었다.23)
이미 최고회의 구성 직후부터 시중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저축 은 재건의 원동력!’24), ‘저축은 재건의 힘’25), ‘혁명과업완수를 저축으로 받들자’26) 같은 문구로 저축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홍보 활동은 개 별 금융 기관 단위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대한금융단은 “5·16 군사혁 명을 기념하고 국가재건과업을 촉진”하고 “부동자금을 취급하여 산업자
22) 앞의 자료, 28쪽
23) 서진수, 1962 〈5개년계획과 내자동원방안〉 《국가재건최고회의보》 11호 (1962.8), 75쪽.
24) 《경향신문》 1961.5.28.(조간) 1면(광고).
25) 《동아일보》 1961.6.26.(조간) 1면(광고).
26) 《경향신문》 1961.7.7.(조간) 1면 (광고).
금화를 도모하고 경제자립을 기”하고자 7월 1일부터 12월 말까지를 저 축운동기간으로 설정하기도 하였다.27)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28) 금융 기관들이 저축홍보에 나선 것은 정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쿠데타 직후부터 지역별로 또는 직장별로 저축조합을 결성하는 등의 국민저축운동이 전개되었다. 1961년 6월 대구시에서는 리·동 및 직장·학교별 국민저축조합을 결성하여 국민저축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 하였고29) 그 결과 6월 한 달 동안 저축액이 1억 환을 넘어 목표였던 6 천만 환을 초과했다고 알려졌다.30) 또한 8월 1일 공보부는 전체 공무원 과 국영기업체 직원들이 매월 봉급의 100분의 1을 우편저금을 할 것이 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31)
이와 더불어 최고회의는 계몽 운동 단체였던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적극 활용하여 저축 계몽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문 교부, 보건사회부 및 공보부 공동 주관으로 11월과 12월을 ‘생활합리화’
기간으로 정하고 ‘식생활 및 주택 생활 개선’, ‘절전 운동’, ‘저축 장려 운 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저축운동은 “민족자본의 축적과 유휴자금의 생산자금화 및 내핍생활의 勵行”을 목표로 하였다.
공무원 및 정부기업체 종업원의 월급의 1%를 의무적으로 저축하게 하 고 농촌에서 절미에 의한 현물저축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 다.32)
27) 《동아일보》 1961.6.30.(석간) 1면 (광고).
28) 군사정부는 1961년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시중은행 대주주 의 의결권을 10% 이내로 제한하였고 8월 31일자로 부정축재자가 소유한 시중 은행 주식을 몰수하였다. 이정은, 2017 〈박정희 정권 시기 대자본의 외자도입 과 금융기관 진출 연구(1960~1973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9쪽.
29) 〈理洞에도 저축조합〉 《경향신문》 1961.6.20.(석간) 3면.
30) 〈6월 한달에 1억환 저축, 목표액 초과〉 《경향신문》 1961.7.10.(석간) 3 면.
31) 〈봉급서도 우편저금〉 《경향신문》 1961.8.1.(조간) 2면.
32) 〈식생활·주택개선·절전·저축 등 대대적 운동 전개〉 《동아일보》
국민저축조합을 활용한 국민저축운동은 일제 식민지시기부터 활용된 방법이었다. 일제는 1938년부터 저축조합을 임의 단체로 설치하여 강제 저축 시행을 강화하였고 전시체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점인 1941 년 10월 ‘국민저축조합령’을 제정하여 저축조합 설치에 법적 근거를 마 련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조선인들의 소비 억제를 통해 조성된 자금 을 전쟁 수행과 군수자금에 조달하고자 하였다.33) 국민저축운동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국민저축조합 결성을 통한 저축동원의 방식은 바로 전시 체제기에 일제가 조선인들의 저축을 동원하려고 사용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국민저축운동은 해방 직후34)와 제1공화국 시기에도 시 행되었다. 1952년 이전에는 금융기관 중심의 소규모의 저축운동이 시행 되었으나 1952년 초부터 “경제안정을 위한 재정금융의 긴축과 전력증강 을 위한 주요 산업자금의 비인플레적 조달”이 필요하였고 금융단만의 저 축운동으로는 한계가 있어 “정부, 금융단 및 사회단체를 총망라한 국민 운동으로 혁신 강화할 것이 요망”되었다. 1952년 말 3월 말 국무회의에 서 ‘국민저축운동추진요강’이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및 지방에 국 민저축추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국민을 그 소속에 따라 지역별 직장별 업종별 국민저축조합에 가입시켜 저축을 실행하게 하려고 하였다.
정부는 국민저축조합 의무 결성의 근거를 법령으로 마련하지는 않았지 만 일제 때 제정된 국민저축조합령을 적용하여 국민저축조합의 결성을 통한 국민저축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54년 12월 정부조직법 개 편으로 국무총리제가 폐지되면서 국민저축운동추진중앙위원회 기구가 대 폭 축소되어 형식상으로만 존속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저축운동은
1961.10.28.(석간) 1면.
33) 저축조합의 조합원은 지역조합원, 직능조합원, 산업단체조합원, 청년단, 소년 단, 부인회 소속원, 학생, 종교단체원 등이 포함되었다. 이경란, 2002 《일제하 금융조합연구》 혜안, 177~180쪽.
34) 조선경제연보에 의하면, 저축운동은 1946년 초부터 1947년 말까지 5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이때의 저축운동은 국가건설을 위한 자본동원보다는 인플레이 션 억제를 위한 통화흡수의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은행조사부, 1948 《조선 경제연보》, Ⅰ-290쪽.
한국은행이 담당하게 되었다.35)
최고회의는 바로 전시체제기에 시행되었던 국민저축운동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민간의 자금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1961년 12월 20일 재무부 는 최고회의의 지시에 따라 국민저축운동실시계획안을 작성하였고, 이는 이듬 해 1월 19일 각의에서 의결되었다. 이 계획안은 이후 몇 번의 수 정을 거쳤지만, 1960년대 민간 저축 동원의 기본 방향을 잘 보여준다.
이 계획안은 “5개년계획에 책정된 민간저축목표액 2,309억 환을 달성하 며 자립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상정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재무부는 “자발적인 민간저축의 증 가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법에 의한 근소한 강제저 축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승낙될” 것이고 “정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를 통 한 저축 장려 운동”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가정하였다.36)
정부 당국도 민간 저축은 정부나 재건국민운동본부 같은 단체들의 개 입이 없다면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국민 일반이 처해 있던 경제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애국적인 견지, 즉 자립경제 기반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명분 삼아 국민저축운동을 통한 강제저축을 실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재무부는 국민저축운동 실시를 위해 아래와 같은 방침을 정하였다.
가. 국민저축운동은 민간의 자발적 貯蓄心을 배양하도록 정부는 저축증강 의 障害的 요인을 우선 제거하며 사회적 경제적 분위기 조성에 노력한다.
나. 정부는 국민저축에 관한 종합적인 계획의 수립과 집행 및 심사분석에 임하며 재건국민운동은 이 사업을 優先지원추진한다.
다. 정부는 법이 완비되는 대로 우선 직장별 및 학생(아동포함)별 국민저 축조합을 조직하여 저축을 장려하며 지역별 국민저축조합으로 확대시킨다.
35) 한국은행에 따르면 1955년 12월 말 기준으로 국민저축조합 예금은 약 총 저 축성예금의 10% 정도였고 결성된 조합의 수는 전국적으로 23,987개였다. 한국 은행 저축부, 1969 《저축과 성장》, 379~382쪽.
36) 〈국민저축운동실시계획(안) (FY 1962~1966)〉 《각의상정안건철》, 5쪽.
라. 저축기관으로 하여금 중점적인 예금 권유보다 일반대중예금 개척에 노 력하도록 한다.
마. 저축기관을 정비 확충하여 공신력 앙양에 노력한다.
바. 예금자는 저축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며 특정기관에만 저축하도록 강제하지 아니한다.
사. 정부는 저축증강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이해시킨다.37)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국민저축운동은 세 가지를 축으로 전개되었 다. 첫 번째는 국민들에게 저축의 필요성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이는 앞 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자발적 저축심’을 계몽을 통해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밀수품과 외래 사치품 소비를 방지하고 내핍과 절 약을 생활의 기본 이념으로 하고 이를 영화·방송·지면을 통해 계몽·선전 하여 이른바 전시 효과를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다.38)
두 번째는 국민들의 저축이 저축기관으로 유입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금융기관의 경영을 합리화하고 공신력을 높이도록 노력하게 하는 한편,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일반 대중의 영세자금을 흡수하게 한다 는 것이었다. 일반 시중은행뿐만 아니라 농업협동조합, 중소기업은행, 신탁회사, 무진회사39), 우체국, 보험회사 등을 저축기관으로 정하고 국 민저축운동에 동원할 계획이었다.40)
세 번째는 국민저축조합 결성을 활성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저축을 동 원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직장별 국민저축조합, 학생(아동) 국민저축조 합, 지역별 국민저축조합으로 구별되었다. 직장별 국민저축조합은 관공
37) 위의 자료, 6~7쪽.
38) 앞의 자료, 8쪽.
39) 무진(無盡)이란 일정한 계좌수와 給付 金額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부금을 납입 한 賦金子에게 1계좌마다 추첨·입찰 등의 방법에 의하여 일정 금액을 급부하는 제도이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무진업령을 발포하였고 이에 따라 무진업은 회사조직체로서만 경영할 수 있었다. 무진회사는 해방 후까지 지속되었고 1961 년 12월 서민금융기관 설립을 목적으로 국민은행법이 공포되면서 일부 회사들이 흡수 병합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사설 무진회사들이 존속하였으나 1972년 8월 상호신용금고법이 제정되면서 상호신용금고에서 무진업무를 담당하였다.
40) 앞의 자료, 16~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