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현실화 조치 시행 이후 금융저축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그 시행 여부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던 시기부터 금리현실화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금융저축이 증가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1965년 7 월 말 현재 저축실적이 80억 원으로 연간 목표 70억 원을 14% 초과하 여 달성되었다는 것이었다. “7월말 누계는 목표에 비해 배증한 것인데 이는 금리현실화 단행설에 자극되어 금융기관으로의 저축이 50억 원으 로 격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50) 또한 금리현실화 조치 시행 첫날 인 10월 1일 하루 사이에 서울 시내 일반 은행의 정기예금 잔고가 3억 4천만 원 늘었다고 보고되었다.51) 이러한 금융저축의 증가세는 일시적 이지 않았다.
<표 2-3> 1966년도 금융기관의 예금 동향
(단위: 억 원)
50) 〈저축실적 80억원 7월말〉 《동아일보》 1965.8.25. 2면.
51) 〈금리오른 첫날의 정기예금〉《동아일보》 1965.10.2. 2면.
예금 잔액 증감
65.9월말 65.12월말 66.12월말 65.10~12 66.1~12
1. 장기저축성예금 222 357 800 135 443
정기예금 63 180 382 117 202
정기적금 49 59 199 10 140
금전신탁 73 76 155 3 79
부금수입 31 35 53 4 18
조합예금 6 7 10 1 3
2. 단기저축성예금 128 116 223 -12 107
저축예금 83 81 152 -2 69
통지예금 45 35 72 -10 37
출처: 재무부, 1968 《저축백서》, 333쪽.
<표 2-3>에 드러나듯이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 금융 저축의 증가를 이 끈 것은 장기 저축성 예금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기예금과 정기적금의 총액이 가장 많이 증가하였다. 다시 말해 정기예금과 정기적금이 시민들 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기적금은 저축 의 여력이 크지 않은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금리현실화에 따라 일반은행의 금리인상이 지난 10월 1일부터 단행되었다.
최고금리가 연 30%까지 크게 올랐는가 하면 월 2.5%씩 이자를 월불로 한 것 등. 이에 따라 일반시민의 은행예금 이용도가 증가할 전망은 크다.
특히 연 30%의 이율이 붙는 정기적금은 가난한 주부들의 관심까지 끌게 한다. 적은 액수의 돈을 매달 적금함으로써 1년 후 혹은 2년 후, 3년 후에 는 큼직한 목돈을 가지게 된다. (중략) 한꺼번에 목돈을 얻기 힘든 일반 가정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또 어떤 기획에 목돈이 생기 게 되면 가정에서는 그 돈의 보관에 고심하게 된다. 집안에 그냥 넣어 두 는 것은 도둑, 화재 등의 우려가 있고 돈의 효용가치가 줄어든다. 물론 남 에게 꾸어주고 매달 5~6%의 이자를 받을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요즘 같 이 살벌한 세상에서는 신빙성이 약하다. 이자가 잘 들어오지 않아 애가 타 는 경우, 심하면 원금까지 떼어먹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일 안전 하고 또 이율도 비교적 많은 은행예금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다. 정기예금을 하면 매월 2.5%의 이자가 지불된다. 5%의 이자로 개인에 게 빌려주는 경우만은 못하지만 훨씬 안전하고 또 이자도 비교적 많다. 또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어 아주 편리하다. 52)
52) 〈주부와 은행〉 《경향신문》 1965.10.20. 6면.
새농민예금 - - 1 - 1
3.총저축성예금 350 473 1,023 123 550
4.요구불예금 371 404 365 33 -39
5.총계 721 877 1,388 156 511
물론 위의 인용문은 홍보의 성격이 짙은 글이었다. 정기적금은 한푼 두푼 모아 큰일에 부닥쳤을 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자 가장 안전하고도 쉽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며, 특히 정기예금은 ‘요 즘같이 살벌한 세상에서’ 남에게 떼일 염려가 없어 안전하고 비교적 이 자도 높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용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당시 민간에서 성행하던 계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이었다. 계주의 도주라는 위험이 상존하였던 계에 비하여 은행 저축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리고 이러한 점은 시민들에게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국내저 축률은 증가하였다. 1965년 8.2%에서 1966년에는 13.0%로 증가하였 고 1967년과 1968년에는 흉작에도 불구하고 13% 선을 계속 유지하였 다.53)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 금융저축은 증가 추세에 있었고 정부는 이 기세 를 몰아 저축 증가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재무 부는 저축증강계획을 수립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최종년도인 제5차 년도를 맞이하여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내자의 근간인 저축을 최 대한 증강하여야 하겠으므로” 1965년 4월 2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1966년도 저축목표액 83억 원을 200억 원으로 대폭 수정하였던 것이 다.54)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재무부는 저축증강계획에서 책정된 목표액 200억 원을 거의 달성했다는 평가를 내렸고 이에 목표액을 400 억 원으로 또 다시 상향 조정하면서 ‘저축배가운동의 추진계획’을 작성하 였다.55)
이와 같이 저축 목표를 증액한 것은 금융저축이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 에 가능하였다. 1966년 3월 저축목표액을 수정했을 때 은행 저축의 경 우 당초 목표액 37억 4천8백만 원을 138억 4천8백만 원으로 증액하였
53) 김병국, 앞의 글, 148쪽.
54) 〈1966년도 저축증강계획 (1966.3.26.)〉 《국무회의안건철》
(BA0084463) 1쪽.
55) 〈1966년도 저축배가운동의 추진계획 (1966.8.29.)〉 《국무회의안건철》
(BA 0084480)
고 그 중 저축조합예금은 단지 4천2백만 원 증액하는 데 그쳐 대부분 일반 저축예금의 목표액을 증액하였다. 또한 8월에 재차 목표액을 상향 하였을 때에도 총 증액 분 200억 원 중에서 저축성 예금액은 175억 원 에 달해 그 대부분을 차지하였다.56) 이전까지 정부가 민간저축을 동원 할 때 국민저축조합을 활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면 이때부터는 각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다시 말해 은행을 통해 이자 소득 을 얻으려는 개인들의 의지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만을 그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정부는 1966년 3월 “퇴장 영세 자금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기 위해 새로 운 저축 방안을 창안하였는데57) 그 방안은 자립저축이라는 강제성의 성 격을 지닌 저축이었다. 이는 1966년 4월 1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 결되어 제1차로 1966년 4월 15일부터 일부 대상에 한하여 실시되었다.
이 자립저축은 명목상 “모든 사치적 소비부문이나 비생산적인 투기부문 및 저축의 여력이 있는 부문에 저축 실시를 권장하여 전 국민이 누구나 기회 있을 때마다 저축하는 습성을 배양토록 창안”되었는데 아래와 같은 상황 시 금융기관에 1년 만기의 정기예금에 준하는 저축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아래의 사무를 처리하는 기관은 이행 대상자에게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자립저축이행필증을 받아 관계 서류에 첨부하도록 규정하였 다.58)
1. 국·공유 재산 매각 및 임대 시 2. 각종 등기 시
3. 전화 가설 시 4. 해외 여권 발급 시 5. 차륜 검사 시
56)〈1966년도 저축증강계획 (1966.3.26.)〉, 6쪽; 〈1966년도 저축배가운동의 추진계획 (1966.8.29.)〉, 8쪽.
57) 〈1966년도 저축증강계획 (1966.3.26.)〉, 5쪽.
58) 재무부, 1968 《저축백서》, 312~313쪽.
6. 건축 허가 시 7. 영화 상영 시
8. 연금 및 상여금 지급 시
9. 공사 및 물품 납품 대전 지급 시 10. 각종 인가 허가 시.
위에서 “열거한 자립저축 이행 대상이 당초 정부가 의도하던 사치적 소비부문이나 비생산적인 투기부문 및 저축의 여력이 있는 부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반면에 꼭 자립저축을 이행하여야 할 대상을 모 두 포괄하였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재무부는 “자립저축의 실시대 상이 그 목적하는 바대로 정확한 이행 기준을 마련치 못했음에도 불구하 고 시행될 수 있는 것은 자립저축이 강제성을 수반한 저축이라 할지라도 행정권에 의한 재산권의 이전이 아니고 계약 기간이 만료한 후에는 약속 한 이자를 가산하여 원금을 상환하는 저축인 까닭이”이라고 그 필요성을 제시하였다.59) 그러나 그 목록만 살펴보아도 그 대상이 사치성 소비에 있다기보다는 저축의 여력이 있는 부분, 다시 말해 조금이라도 자금이 오고 가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무부는 1966년 4월 15일부터 1967년 12월 31일까지의 자립저축 액이 총 73억 9천9백만 원이었다며 그 실적을 강조하였지만,60) “그 본 래 뜻과 어긋나는 강제 징수의 성격”이 드러나는 하는 한편 “자립저축이 행필증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여 새로운 문제로 드러나고 있었다. “자금 경색이 뚜렷해진 요즘 일부 고리 대금업자들이 이 이행필증을 액면의 60% 정도로 사들여 1년간 66.4%
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61) 다시 말해 급히 자금이 필요한 사 람들의 경우 현금을 얻기 위해 액면가보다 낮게 자립저축이행필증을 업 자들에게 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59) 위의 자료.
60) 앞의 자료, 357쪽.
61) 〈자빠진 자립저축〉 《동아일보》 1967.1.12. 7면.
자립저축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그 실효성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 자 정부는 이를 점차 축소하였다. 1967년 3월 2일 서봉균 재무부 장관 은 “예금자의 가치보장과 저축무드가 확보되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자립저축을 단계적으로 완화하겠으며 그 첫 조치로 1년짜리 자립저축을 6개월로 단축하고 극히 사치성을 띤 부분을 제외한 각종 면허와 영업 허가에 적용되는 자립저축을 면제하겠다고 하였다.62)
재무부는 3월 20일부터 자립저축 예치기간을 6개월로 단축하고 자립 저축 대상을 182개 종목에서 51개 종목을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63) 또 4월 15일부터 ‘생활필수업종 허가 시’에는 자립저축 대상에서 면제하 기로 결정하였다.64) 1967년 11월 정부는 다음 해에 국채를 발행하는 대신 자립저축을 연말까지 전면 폐지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65) 전화가 설 등 22개의 종목에 대해 계속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66)
<표 2-4> 자립저축의 추이 (1968~1971년)
(단위: 천 원)
출처: 《저축총람 1972》, 234~235쪽.
시행 초기에 비하여 적용 대상은 축소되었으나, 자립저축의 잔액은 점 차 증가되었다. <표 2-4>에 나타나듯이 1971년의 잔액은 1968년도의 잔액의 2배를 넘었다.
자립저축의 시행과 함께 정부는 “자발적 저축증강을 위하여 도시와 중
62) 〈자립저축 곧 폐지〉 《동아일보》 1967.3.2. 7면.
63) 〈자립저축 51개 종목 제외〉 《경향신문》 1967.3.9. 1면; 〈대상서 51개종 면제〉 《동아일보》 1967.3.9. 1면.
64) 〈생필품업종허가시 자립저축면제〉 《동아일보》 1967.3.30. 2면.
65) 〈저립저축 전면 폐지〉 《동아일보》 1967.11.15. 2면.
66) 〈22개 종목 자리저축 계속 실시〉 《동아일보》 1968.2.17. 7면; 자립저축 은 계속 유지되다 1973년 3월 8일부터 시행된 주택건설촉진법에 따라 각종 인 허가 시 국민주택채권이 소화되면서 자립저축은 폐지되었다. 〈인·허가에 주택채 권 소화〉 《동아일보》 1973.3.8. 6면.
연도 1968 1969 1970 1971
잔액 3,845,250 5,530,120 5,807,016 8,732,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