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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화 선언과 내자동원 체제 확립의 추구

1) 《우리경제의 장기전망》의 발표와 투자규모의 확대

1967~1971년의 총투자는 1조 9,842억 원(1965년 불변가격 기준) 으로 계획 목표를 2배 초과한 높은 수준이었다. 총투자율도 1966년의 22.7%에서 1971년에는 31.5%로 상승하였다. 이에 따라 연평균 투자 율도 30.6%를 나타내 계획 목표 연평균 투자율 19.0%보다 높게 유지 되었고 그 결과 성장률은 11.4%를 나타내어 목표 성장률 7.0%를 초과 달성하였다. 높은 투자율은 국내저축의 증대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국내 저축률은 1966년의 13.3%부터 1969년에는 18.4%로 상승하였다.

1970년과 1971년에는 경제성장의 상대적인 둔화로 국내저축률이 저하 되기도 하였으나 계획 기간 평균은 15.5%로 계획 목표인 11.6%를 초 과 달성하였다.1)

<표 3-1> 제2차 경제개발5계년계획의 투자재원 조달 실적

(단위: %)

출처: 경제기획원, 1972 《1972년판 경제백서》, 302쪽.

1) 경제기획원, 1972 《1972년판 경제백서》, 301쪽.

1966년 1971년 1967~1971년

실적 실적 계획 실적

총투자 22.7 100.0 31.5 100.0 19.0 100.0 30.6 100.0 국내저축 13.3 58.7 14.2 45.0 11.6 61.5 15.5 50.5 해외저축 9.4 41.3 17.3 55.0 7.4 38.5 15.1 49.5

그러나 <표 3-1>에 보이듯 투자재원 조달 면에서 모든 계획 목표가 달성되지는 않았다. 양적으로 국내저축은 증대되었으나 해외저축에 대비 한 비율 면에서는 계획 목표가 달성되지는 않았다. 투자재원의 해외의존 도는 계획기간 중 평균 49.5%로 계획 목표 38.5%보다 훨씬 높은 수 준이었고 “국내저축률의 제고를 통한 투자재원의 자립도라는 과제는 해 결되지 못한 채 3차 계획으로 이월되었다.” 1967년부터 활발해진 외자 도입으로 해외저축 규모는 1966년 323백만 달러에서 1971년 1,018백 만 달러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해외저축률은 점차 증가되어 1971년 17.3%까지 상승하여 계획 목표의 5.5%의 3배 수준을 상회하였다.2)

그런데 이 목표치를 초과한 해외저축은 부작용을 낳았다. 무분별하게 도입한 상업차관의 원리금 상환 일자가 도래하면서 차관기업들의 부실 문제가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이에 청와대가 직접 나서 1969년 5월부터 8월까지 7차에 걸쳐 30여 개 차관 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였다.3) 그 러나 더욱 큰 문제는 부실기업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더불어 ‘부실투자’

로 가시화된 경기 과열이었다. 이에 정부는 1969년 11월부터 경기과열 조정에 착수하였고 ‘국민경제 체질개선’ 및 ‘안정된 장기적 성장’을 목표 로 한 초긴축 정책이 선포되었다.4)

안정화 기조의 영향은 1971년에 발표된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반영되었고 그에 따라 이 5개년계획은 ‘성장·안정·균형의 조화’를 그 기 조로 삼았다. 계획의 머리말에서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우리는 지난날의 개발 성과를 자부하면서도 한편 자성하고 또 고쳐나가 야 할 분야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선진제국이 10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룩한 산업근대화 내지 번영의 역사를 우 리는 10년 내지 20년이란 짧은 기간 내에 달성하겠다는 데서 오는 ‘그

2) 위의 자료, 302쪽.

3) 대통령 비서실에 설치된 부실기업정비반이 정비 작업을 담당하였다. 7차에 관한 부실기업정비작업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이상철, 2010

〈한국의 산업정책과 규율〉 《경영사학》제25집 제2호, 164~174쪽.

4) 이정은, 2010 〈1970년대 초중반 두 차례의 경제위기와 박정희 정부의 대응〉

《한국사학보》 38, 256쪽.

늘진 분야’가 아직 있으며 우리는 냉철하고 겸허하게 이를 분석하고 해 소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한다고 하면서 제3차 5개년계획의 중점으 로 “지난날의 ‘성장’ 중점에서 ‘균형’을 함께 조화시키도록 하였다고 서술 하였다.5)

1969년 이후의 경제적 하강 국면은 잠재된 사회·경제적 불만을 분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의 노동쟁의는 1,650여건으로 1970년 160건의 100배에 달하는 등 곳곳에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의 광주대단지 사건은 “산업화와 성장정책의 그 늘에서 소외받는 기층 민중의 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와 더불어 1971년 전개된 언론수호운동, 사법부 파동과 판사들의 자율화 요구 및 대학교수들의 대학자율화 선언 등 사회 각계에서 다양한 요구가 제기되 었다.6)

이렇게 경제적 위기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분출되는 상황에서 성장과 개발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 그 자체가 거부되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 한국 정부가 추진한 개발의 철학과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어떠한 수단에 의해(공업우선이냐, 농업우선이냐, 중화학공업화선행이 냐, 경공업위주냐) 어떠한 층의 희생에 의하여 얼마만큼 빠른 경제 발전을 성취할 것이냐. 그리고 얼마만큼 빠른 경제발전을 성취할 것이냐. 그리고 그 경제적 성취의 과실을 언제 얼마만큼 얼마의 비율로 사회계층에 분배시 킬 것이냐 하는 근본적인 태도가 문제. 그러한 의미에서 60년대에 추진된 근대화는 공업화로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근대화 즉 합리적 인간관계를 기초로 한 합리적인 사회의 건설에는 커다란 시행착오, 적지 않은 실패를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진정한 원인은 선건설, 후분배에 집약된 현 정권의 19세기적인 낡은 개발철학, 즉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부 사회계층의 희생 은 불가피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7)

5) 대한민국정부, 1971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2~1976》, xi~xii쪽.

6) 안병욱, 2005 〈1970년대 유신체제와 반유신 민주화운동〉 《유신과 반유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쪽.

7) 임종철, 〈고도성장과 高壓빈곤화 – 얼마나 더 참으면 잘 살 수 있나? -

위 인용문의 글쓴이는 일부 선건설 후분배로 인한 일부 사회계층의 희 생을 ‘高壓貧困化’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개발 정책 그 자체를 부인 하지는 않았다. “60년대에 이룩된 고도성장이 그 눈부신데 못지않게 짙 은 그림자를 만들어 부익부 빈익빈이니, 고도성장에 따르는 고압빈곤화 니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개발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지 개발수 단의 빈곤에서 오”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경제정책의 변화가 아 니라 개발 철학의 변화에 의하여 촉발”될 수 있고 “올바른 개발 철학”의 개발이 “경제를 개발시키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후진국 경제개발은 거창하고도 급격한 사회변화, 구조변화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제발전을 급속히 추진하고자 하면 할수록 희 생이 커지기 마련이므로 개발도상국의 정치지도자는 첫째 어떠한 종류의 미래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둘째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 이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국민 앞에 밝힘으로써 전 국민의 지지와 호응을 얻어야” 하는 것이었다.8)

이러한 상황에서 1971년 12월 6일 박정희는 “우리의 생명인 민주주 의가” 적들에게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국가 안보상의 위기 상황 하에 서는 개인의 자유도 일부 유보될 수 있어야 한다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 하였다.9) 또한 이들은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대한 법적 조처로 대통령에 게 국가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 치법안’을 입안하였고, 이 법안은 같은 해 12월 27일 국회에서 통과되 었다.10)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로 인한 주한미군 감축 및

《다리》 1970.9(창간호), 48쪽.

8) 위의 자료, 48~49쪽.

9) 〈국가비상사태선언〉 《경향신문》 1971.12.6. 1면; 이상록, 2016 〈‘예외상 태 상례화’로서의 유신헌법과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 《역사문제연구》 35, 520쪽.

10) 〈정부·여당 대통령에 비상대권〉 《경향신문》 1971.12.21. 1면; 〈국회,

‘보위법안 전격통과’〉 《경향신문》 1971.12.27. 1면.

미중 데탕트의 분위기를 비상사태의 구실로 삼기도 하였다. 이후락 중앙 정보부장은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에게 비상사태 선언의 배경을 설 명하면서 그는 박 대통령이 주한미국 감축, 미중관계 개선 등으로 인한 국제정세에 대해 심각한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국민들에게 알 리고 계몽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했으며,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 려고 했지만, 김종필 국무총리가 만류하여 보다 온건한 조치로 선회하였 다고 하였던 것이다.11)

비상사태 선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전조에 불과하였다. 미중 데탕트 의 분위기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던 남북대화가 공개되고 1972년 7월 4일 남북의 정부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인 8월 3일 박정희 정권은 ‘8·3조치’를 선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고 10월 26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헌법개정안’, 즉 유신헌법안을 발표하였다.12)

박정희는 1973년 1월 12일 유신체제의 방향성을 밝히는 연두 기자 회견을 가졌다.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성명, ‘8·3조치’, 10월 유신 등을 한데 모아 이러한 변화가 “우리나라 역사에 새로운 장이 될 만한 중요한 사건들”이라면서 그 하나하나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10월 유신 의 취지를 “우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그리고 ‘평화통일’을 우리가 성취하자”는 것으로 설명하였다.13) 이어 박정희는 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경제에 관한 중요한 선언을 하겠다고 국민들을 향해 발표하였 는데 그것이 바로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이었다.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박정희의 의지는 1973년 8월에 발 표된14) 《우리경제의 장기전망 (1972~1981)》(이하 장기전망)에서

11) 홍석률, 2005 〈유신체제의 형성〉 《유신과 반유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 회, 84쪽.

12) 위의 책, 94~95쪽.

13) 〈연두기자회견 (1973년 1월 12일)〉 대통령비서실, 1976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5 제8대편·상》, 17~19쪽.

14) 〈정부, 경제장기전망 발표 81년까지 연평균 10.3% 성장〉 《경향신문》

1973.8.1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