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이후 정부는 계속해서 민간 저축 동원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성과가 생활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서울 근로자 월평균 가계수지적자는 1960년 560원, 1962년 800원으로 상승했고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1965년도 현재 5년간 물가지수는 103% 상승한데 반해, 같은 시기 서 울 근로자 가구 월평균소득은 14% 오르는데 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중간계급, 또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인식으 로 이어졌다.93)
92) 이러한 상황을 꼬집어 지방은행이 아니라 도시은행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적 도 있었다. 대구은행, 앞의 책, 49쪽.
93) 문형선, 〈도시중산층의 파산〉 《사상계》 1963.7, 89쪽; 김영선,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성공했는가?〉 《사상계》 1966년 8월; 이상 홍석률, 1999
〈1960년대 지식인의 동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60년대 사회변화 연 구: 1963~1970》, 벽산서당, 226~227쪽, 참고.
군사정권 및 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건설은 증산, 수출, 건설이란 삼 대 목표가 이를 단적으로 알려주다시피 생산력증강 제일주의라 볼 수 있 다. 이 생산력 증강 제일주의는 국민경제의 안정을 경시하면서 국민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바랐던 까닭으로 해서 여러 가지로 무리가 생겼다. (중략) 생산력증강 제일주의 관련하여 각별히 주목치 않을 수 없는 것은 정부가 소득분배의 공정요구를 무시하고 부익부 빈익빈의 경향을 가속했기 때문에 중산계층이 급속한 몰락해체의 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서울시를 표준 삼는다면 도심지에 집을 갖고 있던 중산층은 변두리로 쫓겨나고 변두리에 집을 갖고 있던 중산층은 집을 팔고 셋방살이로 굴러 떨어졌다. 중산계층 의 도산 해체는 자본주의 체제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위험 한 적신호인데 정권담당한 자는 생산증강 제일주의에서, 혹은 그와 아울러 소득재분배의 공정을 기해 “생활의 평준화”를 적극 추진치 않으면 안 될 전 환기에 이르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94)
위 인용문의 글쓴이가 말하는 중산계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집단인지 는 명확하지 않다.95)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바는 명확했다. 성장과 더 불어서 분배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득 재분배의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격심한 빈부 차 이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정의를 “모든 백성이 각자 그 있을 자리에 있어, 만족하고 일할 수 있는 사 회상태”라고 정의해 본 적이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사상을 따른 것이요, 그의 사상에서 멀지 않은 줄 안다. 요컨대 균형·조화는 정의의 구성 원리요 기본조건이다. 날이 갈수록 빈부의 차는 심해져 왔다. 요새 와서 근대화란 말을 자주 듣지만 소위 선진국가의 부유한 사람을 뺨칠 정도로 물질적으로 겉으로만 근대화한 재벌·정치인 부호가 근래 부쩍 늘어나고 있는 반면, 바 로 우리들 주변 서울시의 복판에 거적을 깔고 가마떼기를 치고 사는 동포 94) 신상초, 〈혁명이 사회발전에 미치는 영향〉《세대》1965.5, 55쪽.
95)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1960년대 중반에는 중간계층, 또는 중산층이 어떠한 존재들인가에 대한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홍석률, 앞의 논문 을 참고.
들이 많다.
위 인용문의 글쓴이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결코 “정상적인 사회가” 아 니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부유층과 빈한층이 다 소수이고 중산층이 절대다수이어야” 하는데 한국사회는 “빈한층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이었 다. “사회의 안전과 부강은 그 중산층 즉 중류계급의 건재에” 달려 있는 데 그의 눈에 “우리 사회에는 이렇다 할 희망적·건설적 중산계급이 없고 중류층이라 해도 역시 옹색할 살림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96)
1965년 주한미공보원이 수행한 여론 조사의 결과에 주목할 만한데, 이 여론조사는 시민들이 상대적 빈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 었다는 점을 보여준다.97) 주한미공보원은 6월 마지막 주에 서울 주민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시행하였고 설문 문항에는 한국 국내 문 제에 대한 문항과 더불어 국제 정세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 었다.98) 설문 대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국내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부의 공정한 분배를 묻는 질문에 불과 5%만이 공정하다고 답변했고 불공정하다는 답변은 무려 85%에 달했다. 불공정하다고 한 사람 중 사회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비율도 83%에 달했다.
게다가 가난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개인 탓이 38%인데 반해 환경 탓 은 47%였다. 행복과 불행을 묻는 질문에는 상층의 46%, 하층의 무려 64%가 매우 불행하다고 답변했다. 매우 행복하다는 답변은 상층 10%, 하층은 5%에 불과했다. 심지어 상층조차도 불공정한 현실에 불만을 표 할 정도였다.99)
96) 최명관, 〈사회정의의 구현과 자세〉 《청맥》 1965.10, 15~16쪽.
97) 황병주, 2017, 〈1950~1960년대 엘리트 지식인의 빈곤담론〉 《역사문제연 구》 37, 550~551쪽.
98) “Operations Memorandum(1965. 7. 14)”, RG 306, Regional Research Projects in East Asia and Australia, 1964 - 1973 [Entry A1 1017], Box 7, NARA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99) “World Survey III (1965.5)”, RG 306, Regional Research Projects in East Asia and Australia, 1964 - 1973 [Entry A1 1017], Box 7, NARA.
빈곤 문제는 정치적 의제로 떠오르기도 하였다.100) 1965년 민주당은
‘극소수 특권층만의 비대화’, ‘중산층의 몰락’, ‘대중빈곤의 보편화 및 심 화 경향’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중산층의 유지 육성 및 확대’를 당의 주 요 정책으로 설정하였다. 민주당은 농촌 빈곤 문제를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하였고 ‘백만 안정농가의 창설 및 유지’를 주요 정책으로 제시하였 다. 이외에도 민주당은 도시 중산층과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자본 육성 책, 재정안정정책의 강화 및 특권층에 대한 음폐 보조물의 국고·공공기 관으로의 환수, 민·관의 내핍과 절약을 위한 법제 및 국민운동 전개, 외 원을 통한 국고 수입의 극대화와 국영기업체의 합리적 경영 등을 정책으 로 제안하였다.101)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2차 5개년계획은 “1980년대 초까지 우리 경제는 자립체제를 갖추고 근대화 의 근대적 기초-국제수지의 균형, 필요한 투자 재원의 완전한 국내 조 달, 완전 고용-을 달성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경제 및 사회의 장기 개발을 쌓아 올리는 한 과정으로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 립을 더욱 촉진’시키는데” 그 기본목표가 있다고 표방되었다.
이러한 기본 방침 아래 목표 성장률은 연평균 7%로 책정되었다.102) 1962~1965년의 평균 성장률 7.6% 보다 낮았는데 “1962년~1965년 의 성장이 다분히 그 이전에 투자한 효과와 유휴능력의 현재화에 힘입은 것임에 반하여” 2차 5개년계획 기간 중에는 대체로 “자본집약도가 높은 투자를 많이 포함시켰기” 때문에 이전 기간 보다 조금 낮게 목표치를 설
100) 황병주, 앞의 논문, 551쪽.
101) 〈기조연설서 본 3당의 비전 (완)〉 《경향신문》 1965.2 6. 1면.
102) 논의 과정에서 7%라는 연평균 목표성장률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966년 7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대한 평가 교수단의 종합평가 보고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평가교수단은 7%의 경제성장 률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조달계획 등 불충실〉 《경향신문》
1966.7.27. 1면; 이에 경제과학심의회의는 2차 5개년계획안을 심의하면서 6%
정도로 계획 목표를 하향하거나 7%를 정책목표로 간주하고 “최대의 노력을 집중 하는 동인으로 시사”할 수도 있다고 건의하였다.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관 한 건 (1966.7.20)〉 《심의보고》 (BA0177290)
정했다고 하였다. 또한 성장률을 “건전수준에 둠으로써 자원배분을 견실 하게 하여 과열현상을 피하고 인프레를 유발함이 없이 균형 잡힌 발전을 이룩하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라고도 설명되었다.103)
제2차 5개년계획 기간 총 투자 소요액은 9,800억 원으로 책정되었고 이는 제2차 5개년계획 기간 중 국민총생산 목표액의 19.1%였다. 그 투 자 규모는 제1차 5개년계획 기간 중의 투자 실적인 14.2%에 비해 4.9 포인트 높은 수치였다. 재원은 국내저축으로 61.5%에 해당하는 6,029 억 원을 조달하고 해외저축으로 3,772억 원(1,421백만 달러)을 조달한 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목표 연도인 1971년의 국내저축률 은 14.4%로 기준연도의 6.1%보다 8.3%를 높아질 전망이었다. 정부 저축은 0.6%에서 5.8%로 민간저축은 5.5%에서 8.6%로 상승되어 총 투자 가운데 국내저축의 비중은 “1965년의 48.3%에서 목표연도에는 72.3%로 제고될 것이며 1965~1971년의 한계저축성향은 30.9%가”
된다는 것이었다,
제2차 5개년계획에는 그 전망이 수월하게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되었 다. 1960년대 전반기(1960~1965년)의 연평균 국내저축률이 4%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까닭은 “심한 인프레와 이자율 기능의 상실 그리고 소 득증가 및 인프레에 뒤졌던 조세 등으로 정부 부문에서 부의 저축을 나 타내고 민간부문에서도 매우 낮은 저축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간 부문은 이를 한계저축성향으로 보면 같은 기간 동안에 가처분 소 득에 대하여 2.3%라는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으며 이것이 점차 굳어가 는 경제의 안정과 금리의 현실화로 회복된 이자 기능, 강력한 저축운동 등으로 밑받침되고 있어 제2차 계획기간 중에 30%까지 제고됨은 그다 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104)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 금융 저축의 증 가세가 유지될 것으로 보았다.
103) 위의 자료, 32쪽.
104) 앞의 자료, 40~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