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정치의 장, 혹은 그리스의 법정은 화자와 청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면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레토릭은 ‘말하기’를 통해 상대의 태도를 변화하게 하는 설득 기술로서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레토릭을 연마해 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인쇄술 및 통신기술 의 발전에 힘입어 점점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하게 되었고,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효과적인 설득을 위한 레토릭의 모 습에도 변화가 따른다.
연사가 말을 하고, 많은 청중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듣는 강연 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고전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전통적 으로 정치인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은 대개 일방적 말하기이자,
웅변이었다. 고대의 웅변술은 전쟁과 불(battle and fire)같은 말하기라는 메타포가 쓰였으며, 논쟁적이고, 열정적이며 격렬했다. 소위 ‘불같은 혀 (tongue of fire)’라는 클리셰는 격정적 말하기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하 지만 제이미슨은 오늘날 연사가 호전적이며 흥분에 가득찬 말하기를 선 보인다면, 이는 로마의 원형극장만큼이나 시대착오적 인물로 느껴질 것 이라고 한다(Jamieson, 1988). 웅변 스타일의 연설은 20세기 중반 이후 전자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구식의 화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중 설득의 레토릭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월터 옹의 구술성, 구 술문화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문학자인 월터 옹(Walter Ong) 은 피터 라무스의 수사학을 연구하면서 미디어 생태학에 주목하였다. 그 는 미디어를 ‘말’을 다루는 기술로 보면서, 미디어의 형식이 인간의 의식 과 문화에 미친 영향력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구술성(Orality)과 문자성 (Literacy)의 대비를 통해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사고 과정이나 지식의 특성 혹은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탐구해왔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신구 미디어 문화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다는 관계주의적 시각을 제시한다(이동후, 2010).
월터 옹은 쓰기와 인쇄술 및 전자 장치 등 ‘말(the word)을 다루는 기술’을 미디어라 정의하며, 미디어가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형성하고 저장하고 상기하고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의식과 문화에 자리했다고 보았 다(Ong, 1967). 특히 그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깊이 내재된 미디어 형 식, 즉 “우리에게 너무 깊게 내재화되어 하나의 기술이라고 칭하기 어려 운” 문자 텍스트와 가장 본질적인 인간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구어의 상 관관계를 살피면서 미디어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연구했다. 옹은 문자 가 사용되기 이전의 구술성과 문자시대 이후의 문자성을 기준으로 인류 역사의 흐름을 파악했는데, 그는 문자 이전 인류 역사의 오랜 시기를 지 배했던 구술 커뮤니케이션이 발화되는 순간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소리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구어는 인간을 "실재 한가운데 그리고 동시성 속에 놓이게" 하는 소리로 매개되기 때문에 지금-여기의 경험을 전달하고 삶의 상황을 담아낸다고 본다(Ong, 1967). 따라서 기록할 수단
이 없고 화자와 청자의 물리적 현존을 전제로 한 구어 문화는 필연적으 로 기록할 문자를 가진 문자 문화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구어 문화는 언어 표현이나 지식의 전수가 인간의 물리적 기억 능력에 의존해 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것만을 아는 문화이고, 기억을 잘하기 위해 공식화된 패턴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며, 전달 방식도 ‘참여’
와 ‘동일시’라는 언어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구술 문화의 전수를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사학(rhetoric), 즉 말 을 세심하게 만들어내는 기술(speech art)을 연마해야 했다(김형수·이호 규, 2013). 화자가 하는 말의 독창성이란 새로운 이야기의 줄거리를 생각 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청중들과 특별한 교류를 만들어내는 데 에 있다. 이야기는 말해질 때마다 당시의 상황 속에서 그 당시에만 있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또한 쓰기가 생활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거 리를 두고 지식을 구조화하는 것과 달리, 구술문화는 일상생활과 가까이 밀착되어 있다. 옹은 구어 문화의 표현 방식과 정신 역학이 "종속적이기 보다는 부가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는 집합적"이고, "반복적이거나 풍 부"하고,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고", "생활 세계에 밀접"하며, "논쟁적인 어조"를 갖고, "객관적인 거리를 두기보다는 참여적이고", "항상성을 갖 고", “추상적이기보다는 상황적”(Ong, 1967)이라고 보았다.
옹은 문자와 쓰기가 등장하고 정착하면서 말이 시각적인 문자로 고 정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에서 분리된 객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글을 쓴 저자가 자신이 쓴 말과 청자 사이에 ' 거리'를 갖게 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바뀌게 되었다고 보았다.
문자와 쓰기의 소통이 정착하면서, 저자와 독자, 아는 자와 아는 것, 메 시지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 낱말과 소리, 말과 실존적 맥락, 소리와 시각, 글과 해석 등이 분리되기 시작했다(Ong, 1967). 이와 같은 '분리' 를 통해 문자 문화는 인간 기억의 한계에서 해방된 표현과 사고를 정확 하고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옹은 인쇄술의 발달로 말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과정이 ‘청각’이 아닌 ‘시각적’ 지각과 연관되고, 구술 성의 청각적 문화 양식과 대비되는 시각적 양식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쓰기’의 문자문화로 인하여 사고 과정이나 지식의 특성 혹은 인 간의 의식 또한 이와 함께 재구성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월터 옹이 보기에 문자를 근간으로 하는 쓰기(인쇄매체) 문화에서 다양한 전자미디어가 일상에 파고든 최근의 문화 현상은 마치 ‘제2의 구 술성'이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옹은 전자 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이 인 쇄의 선형성에서 벗어나 물리적으로 부재했던 상대방의 ‘소리’를 복원한 다는 점이 마치 원시시대의 구술성의 재현을 떠올린다고 보았다. 전자 미디어(텔레비전 또는 라디오)가 소리를 함께 전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각적 공간(인쇄물)에 갇혀 있던 말에 청각적 감각을 덧붙일 수 있게 되었고, 소리의 즉시성, 즉흥성, 상황성 그리고 현존성 등을 느낄 수 있 게 함에 주목한 것이다. 따라서 옹의 관점에서 전자미디어의 일상화는 제2의 구술성의 등장을 암시하며, 보다 의도적이고 자기 의식적일 뿐만 아니라, 소수의 집단이 아닌 ‘대중’이 집단 감각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또한 옹은 구술문화가 문자문화에 비해 논쟁적이며, 말을 통해 사람 들을 투쟁상황에 놓이게 한다고 보았다. 구술문화가 남아있는 문화에서 는 논쟁적으로 매도하고 독한 언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일종의 거친 찬사로 여겨지며, 구술문화에 있는 논쟁의 역동성은 고전 수사학의 기술 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현대의 미디어 레토릭 연구자들 역시 전자매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레토릭 양식으로서 구술성에 주목하였다. 대표적으로 제이미슨은 라디오 와 텔레비전같은 전자 매체의 등장이 대중 정치인의 레토릭 양식의 변화 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Jamieson, 1988). 실제로 1924년 미국 의 라디오 보급대수는 불과 300만 대였지만, 1935년에는 그 10배로 늘어 났다. 사람들이 마을회관이나 광장에 운집하여 모이는 대신, 수 백 만의 라디오 청취자들이 집 안의 거실이나 차 안에서 연설을 들을 수 있게 되 자 과거와 같은 일방적이고 거친 웅변적인 정치연설 스타일은 퇴화하고, 이야기하는 듯한 노변담화(fireside chat) 스타일이 대중에게 설득력을 발 휘한다. 라디오의 확산으로 효과적인 대중 연설 스타일이 바뀌었는데, 과
거와 같이 고함을 지르고, 흥분하여 말하기보다 유머와 위트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연단 위에서의 연설에 익숙한 정치인은 친밀한 대화체 방 식이 효과적인 라디오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라 디오라는 전자매체를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미디어에 맞는 고유한 커뮤니 케이션 스타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33~1945년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루스벨트는 대화적 담화를 활용 하여 유권자와 소통함으로써 유권자와 소통적인 인상을 남겼으며, 1960 년 닉슨과 케네디의 텔레비전 토론은 케네디의 대화적 화술이 유권자를 매료시키며 그의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1980년 카터와 레이건의 텔레비 전 토론 역시 레이건의 여유만만하고 유머러스한 대화 스타일이 유권자 에게 설득력있게 작용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진다. 전자매체시대에는 과거의 웅변적 연설, 권위적 레토릭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되었고, 이 전보다 여성적인 말하기 스타일, 겸손한 화법이 효과적인 대중설득의 레 토릭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드라마 연출적이며, 이야기 전달적이며, 대 화적이며, 자기노출적인 말하기가 전자매체시대의 효과적이고 설득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며, 레이건처럼 이에 능숙했던 정치인들이 이른바 텔레비전 시대의 ‘위대한 커뮤니케이터’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의 설득과 웅변양식, 라디오와 텔레비전 시대의 정치적 소 통양식에 주목한 제이미슨에 따르면, 전자매체 시대의 말하기가 과거의 웅변에 비해 여성적이고, 스토리텔링적이며, 시각적 속성을 띄고, 드라마 틱한 말하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논쟁의 레토릭 대신 화해와 치유의 레토릭의 시대가 된 것이다(Jamieson, 1988). 과거 대화적 말하기 (colloquial narrative)는 여성적이고 나약한 것으로 여겨졌고, 남성적이고 전투적인 말하기가 힘있는 설득 화법으로 여겨지던 분위기에서 새로운 대중 매체의 등장은 말하기와 쓰기의 방식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였다.
미국에서 대중매체가 확산되던 1900년 전후, 공적 내용을 전달함에 있어
“정제된” 화법을 사용할 것인지 “현대적(대화적)” 화법을 사용할 것인지 를 두고 언론인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이 있었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따라 대중연설 양식이 변화하는 것은 국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