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다의 범주 교육을 위한 이론적 논의
2. 다의 범주의 내적 구조와 인지적 특성
2.2. 다의 범주의 비대칭성
2.2.1. 구조적 비대칭성
다의어의 기본의미와 비기본의미 간에는 ‘구조적 비대칭성’(structural asymmetry) 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구조적 비대칭성은 형태적으로나 통사적으로 기본의미가 중 립적인 데 반해, 비기본의미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음을 뜻한다. 아래에 이러한 형태 적, 통사적 제약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형태적 비대칭성을 알아보기 위해 복 합어의 생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파생어는 특정 어근에 파생접사가 결합하여 형성된 복합어로, 이 파생어의 의미 형성에 어근의 의미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근이 여 러 의미를 지니고 있어 다의성을 띠는 경우, 이들 의미들 중에서 어떤 의미가 파생 어의 의미 형성에 참여하는지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동사
‘죽다’의 어간인 ‘죽-’이 어근으로 하고, 이에 명사파생접사 ‘-음’이 결합하여 형성된 파생명사 ‘죽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파생어 ‘죽음’을 형성하는 어근인 ‘죽-’은 사전의 기술상 다음과 같은 여러 의 미를 지니고 있다.40)
40) 동사 ‘죽다’는 본동사로 쓰이는 의미 이외에도, 보조동사로 쓰이게 될 경우, 형용사 뒤에
(1) 생명이 없어지거나 끊어지다.
(2) 불 따위가 타거나 비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3) 본래 가지고 있던 색깔이나 특징 따위가 변하여 드러나지 아니하다.
(4) 성질이나 기운 따위가 꺾이다.
(5) 마음이나 의식 속에 남아 있지 못하고 잊히다.
(6) 움직이던 물체가 멈추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다.
(7) 경기나 놀이 따위에서, 상대편에게 잡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다.
(8) 글이나 말 또는 어떤 현상의 효력 따위가 현실과 동떨어져 생동성을 잃다.
(9) 상대편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상대편을 위협하는 말.
(10) (주로 ‘죽도록’, ‘죽어라 (하고)’, ‘죽자고’ 따위의 꼴로 쓰여)있는 힘을 다한다 는 뜻을 이르는 말.
(11) (은어로) 감옥에 가다.
위와 같이 동사 ‘죽다’는 총 11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다의적인 동사
‘죽다’와 파생접사 ‘-음’이 결합하여 형성된 파생명사 ‘죽음’은 ‘죽는 일. 생물의 생명 이 없어지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미의 형성에 참여한 어근 ‘죽-’의 의미는 오직 (1)에 해당하는 ‘생명이 없어지거나 끊어지다.’로 볼 수 있다. 즉, 파생어의 의미 형성에 참여한 어근의 의미는 그것의 기본의미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역으로 표현한 다면, 파생어를 형성하는 어근의 확장의미는 일반적으로 파생어의 의미 형성에 참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합성어의 형성에서도 특정 어근의 여러 의미들 중 기본의미가 전체 합성어의 의미에 반영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를 보이기 위해 여기서는 명사 ‘집’의 경우를 예로 들기로 한다. 명사 ‘집’의 사전 의미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1)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 은 건물.
(2)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사람이나 동물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수 효를 세는 단위.
(3)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
(4) 칼, 벼루, 총 따위를 끼거나 담아 둘 수 있게 만든 것.
서 ‘-어 죽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상태나 느낌의 정도가 매우 심함을 나타냄
‘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동사로의 쓰임에만 국한하기로 한다.
(5)『운동』화투나 마작 따위의 놀이에서 어느 한편을 이르는 말.
(6)『운동』바둑에서, 자기 돌로 에워싸 상대편 돌이 들어올 수 없게 한, 바둑판의 빈자리.
(7)『운동』((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바둑에서, 자기 돌로 에워싸 상대편 돌 이 들어올 수 없게 한 빈자리를 세는 단위.
(8) (‘우리 집에서’, ‘집에서’ 꼴로 쓰여) 집사람.
(9)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물건을 팔거나 영업을 하는 가게를 나타내는 말.
(10)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택호’를 나타내는 말.
위와 같이 명사 ‘집’은 사전기술상 총 10가지의 의미로 구분되는데, 해당 명사가 포함되는 합성어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ㄱ. 초가집, 벽돌집, 흙집, 풀집, 새집, 닭집, 개집...
ㄴ. 갈빗집, 고깃집, 꽃집, 피자집, 중국집, 일식집...
위의 명사 ‘집’이 포함된 합성명사들 중에서 (1)은 ‘집’의 사전 의미들 중 (1)에 해 당하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의미가 반영된 것이고, (2)의 합성어의 경우, ‘집’의 사전 의미들 중 (9) 에 해당하는 ‘물건을 팔거나 영업을 하는 가게’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 다.41) 즉, 합성어의 의미 형성에는 그 구성 요소의 전체 의미가 아닌 매우 제한된 의 미만이 참여함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만약 특정 낱말이 다의적이라면, 그것이 파생어나 합성어의 형성에 참여할 경우, 해당 낱말의 기본의미가 다른 의미에 비해 우선적으로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는 것이다. 이는 다의어의 여러 의미가 형태론적 구성에 있어 서로 다른 위치에 처 해 있음을 보여 주는 근거라 할 수 있다.
다음, 다의어의 통사론적 구성에서의 비대칭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일반적으 로 다의어는 기본의미로 쓰이는 경우보다 비기본의미로 쓰이는 경우에 여러 가지 공
41) 사실, 명사 ‘집’의 사전 의미들을 살펴보면, 이들 의미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통합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데, 예컨대, 그 의미를 ‘사람이나 동물 그리고 사물을 보호하 기 위하여 만든 공간’ 정도로 기술할 수 있을 듯하다. 만약 이렇게 하나의 의미로 통합 이 가능하다면, 이 의미를 바탕으로 명사 ‘집’이 포함된 그 어떤 합성명사의 의미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제약을 받는다.
명사 ‘얼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이 낱말은 사전기술상 다음과 같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눈, 코, 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
(2) 머리 앞면의 전체적 윤곽이나 생김새.
(3) 주위에 잘 알려져서 얻은 평판이나 명예. 또는 체면.
(4) 어떤 심리 상태가 나타난 형색.
(5) 어떤 분야에 활동하는 사람.
(6) 어떤 사물의 진면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표상.
이상의 명사 ‘얼굴’의 사전의미들 중에서 (1, 2)을 기본의미로 볼 수가 있고, 나머지 (3-6)은 확장의미라 할 수 있는데, 기본의미로 사용되는 ‘얼굴’의 경우는 그 앞뒤에 다른 어휘와 결합하지 않아도 그 의미는 독립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데 비해, 비기본 의미로 사용되는 ‘얼굴’의 경우는 그 앞뒤에 반드시 일정한 어휘가 결합되어야만 해 당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예들을 보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1) 체면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 얼굴을 세우다, 얼굴을 팔다, 얼굴을 알리다, 얼굴 을 들 수가 없다. 얼굴에 먹칠하다...
(2) 형색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 기쁨에 충만한 얼굴, 생각에 깊이 잠긴 얼굴, 겁 에 질린 얼굴, 실망한 얼굴, 심각한 얼굴...
(3) 어떤 분야에 활동하는 사람: 문단의 새 얼굴, 새로운 얼굴이 회장으로 선출되다, (4) 어떤 사물의 대표적 표상: 돌ㆍ바람ㆍ여자는 제주도의 얼굴이다. 고려청자는 고
려시대 문화재의 대표적 얼굴이다.
위와 같이 명사 ‘얼굴’이 비기본의미로 쓰이는 경우에 다른 낱말과 결합하여야만 해당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체면’의 의미를 나타내는 ‘얼굴’의 경우, ‘얼 굴을 세우다, 얼굴을 팔다, 얼굴을 들 수가 없다’와 같이 그 뒤에 동사나 동사가 포 함된 구의 형태가 따라야만 그 의미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형색’,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 ‘대표적 표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얼굴’도 그 앞에 수 식어나 수식어구가 와야만 해당 의미를 나타낼 수가 있다. 즉, 비기본의미로 사용되
는 ‘얼굴’은 제한된 부류의 낱말과만 결합하는 특성을 보인다 할 수 있다.
동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비기본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공기제약을 보이는데, 동사 ‘서다’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이 동사는 사전기술상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사람이나 동물이 발을 땅에 대고 다리를 쭉 뻗으며 몸을 곧게 하다.
(2) 처져 있던 것이 똑바로 위를 향하여 곧게 되다.
(3) 계획, 결심, 자신감 따위가 마음속에 이루어지다.
(4) 무딘 것이 날카롭게 되다.
(5) 질서나 체계, 규율 따위가 올바르게 있게 되거나 짜이다.
(6) 아이가 배 속에 생기다.
(7) 줄이나 주름 따위가 두드러지게 생기다.
(8) 물품을 생산하는 기계 따위가 작동이 멈추다.
(9) 남자의 성기가 발기되다.
(10) 부피를 가진 어떤 물체가 땅 위에 수직의 상태로 있게 되다.
(11) 나라나 기관 따위가 처음으로 이루어지다.
(12)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대상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다.
(13) 사람이 어떤 위치나 처지에 있게 되거나 놓이다.
(14) 장이나 씨름판 따위가 열리다.
(15) 어떤 모양이나 현상이 이루어져 나타나다.
(16) 체면 따위가 바로 유지되다.
(17) 어떤 역할을 맡아서 하다.
(18) 줄을 짓다.
위의 동사 ‘서다’의 의미들 중에서 비기본의미인 ‘처져 있던 것이 똑바로 위를 향 하여 곧게 되다’의 의미를 나타내는 ‘서다’는 ‘토끼의 귀가 쫑긋 서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다’와 같이 그 앞에 특정된 명사(구)와 부사(어)가 와야만 해당 의미가 나타난다. 또한 ‘서다’가 ‘무딘 것이 날카롭게 되다’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 ‘칼날이 시퍼렇게 서다’와 같이 역시 그 앞에 특정된 명사(구)와 부사(어)가 결합되어야만 해 당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즉, 동사의 경우도 명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기본의미 로 사용되는 경우 다른 낱말과의 결합에 있어 제약을 나타낸다.42)
42) 다의어가 비기본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나타나는 제약에는 공기제약 외에, 다양한 문법 제약도 존재한다. 예컨대, 명사의 경우, 격조사와의 결합 제약이나, 관계절의 표제명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