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다의 범주 교육을 위한 이론적 논의
2. 다의 범주의 내적 구조와 인지적 특성
2.1. 다의 범주의 내적 구조
하나의 낱말이 둘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경우에 그 의미들이 어떤 모습으로 구조 화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사전에서는 다의어의 의미들을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제시하지 않고 있기에 이들 의미 간의 관련성을 파 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다의어의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 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필요가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의어의 의미구조를 바라 보는 입장은 고전주의와 인지주의에 큰 차이가 있다. 곧, 고전주의는 ‘핵의미 구조’를 인정하는 반면에 인지주의는 원형이론을 바탕으로 ‘의미연쇄 구조’와 ‘의미망 구조’를 인정한다.35) 그럼 아래에 이 세 의미구조의 성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 다.
2.1.1. 핵의미 구조
‘핵의미 구조’는 다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핵의미’(core meaning)를 공 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한 낱말의 여러 의미들로부터 핵의미를 추출하고 이 를 바탕으로 의미의 확장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다의어의 모든 의미들이 하나 의 핵의미를 공유해야 한다는 요건은 구성원의 필요충분조건의 집합에 의한 ‘고전범 주화’36)의 모형에서 유래한다. 다의어의 핵의미 구조는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35) 다의어의 의미구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임지룡(1996)을 참조할 수 있다.
36) ‘고전범주화’의 기본 원리를 요약하면 범주는 필요충분 자질의 집합이고 분명한 경계를 가지며 그 구성원은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것인데, 다의어의 ‘핵의미 구조’는 이들 중
‘필요충분 자질의 집합’과 관련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임지룡 1993: 43-5).
α¹, α², α³, α⁴...
위에서
α
는 다의어의 여러 의미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의미 요소인 핵의미를 뜻하고, α¹, α², α³, α⁴는 이 핵의미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미 자질들이 추가되어 형성된 구체적인 의미들을 뜻한다. 이러한 핵의미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어 명 사 ‘머리’를 예로 들어 보자. 먼저, ‘머리’의 사전적 의미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37)(1) 사람이나 동물의 목 위의 부분. 머리를 긁다 (2)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머리가 뛰어나다 (3) 머리털. 머리를 기르다
(4) 한자에서 글자의 윗부분에 있는 부수. ‘家’, ‘花’에서 ‘宀’, ‘艹’ 따위.
(5) 단체의 우두머리. 우리 모임의 머리 노릇을 하고 있다.
(6) 사물의 앞이나 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장도리 머리 부분. 기차의 머리 (7) 일의 시작이나 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머리도 끝도 없이 일이 뒤죽박죽
이 되었다.
(8) 어떤 때가 시작될 무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질 머리
(9) 한쪽 옆이나 가장자리. 한 머리에서는 장구를 치고 또 한 머리에서는 징을 두드 려 대고 있었다.
(10) 일의 한 차례나 한 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한 머리 태풍이 지나고 햇빛이 비쳤다.
(11)『음악』=음표 머리.
여기서 제시된 ‘머리’의 사전적 의미를 바탕으로 이들 의미에 공통되는 핵의미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어떤 대상의 위나 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의 (1-11)까지의 구체적인 의미들은 모두 이 핵의미에 구체적인 문맥이 적 용되면서 해당 의미로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낱말의 핵의미 구조는 명 사에서뿐만 아니라 동사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예로 동사 ‘주다’의 의미를 살펴 보기로 하는데, 먼저 이들의 사전적 의미는 보이면 다음과 같다.
37) 본고가 낱말의 사전적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참조한 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임을 밝 혀 둔다.
(1) 물건 따위를 남에게 건네어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다 (2) 남에게 어떤 자격이나 권리, 점수 따위를 가지게 하다.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주다.
(3) 좋지 아니한 영향을 미치게 하다. 고통을 주다.
(4) 실이나 줄 따위를 풀리는 쪽으로 더 풀어내다. 연줄을 더 많이 줘라.
(5) 시선이나 몸짓 따위를 어떤 곳으로 향하다. 대문 위로 눈을 주다.
(6) 주사나 침 따위를 놓다. 엉덩이에 주사를 주다.
(7) 속력이나 힘 따위를 가하다. 손에 힘을 더 줘라.
(8) 다른 사람에게 정이나 마음을 베풀거나 터놓다. 그는 친구에게도 좀처럼 정을 주지 않는다.
(9)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여 성적 관계를 맺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동사 ‘주다’에 핵심의미가 존재한다면, 그 의미는 ‘한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옮겨감’으로 설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인 핵심의미는 해당 동사의 대상의 구체성과 추상성에 따라 서로 관련된 구체적인 의미로 실현된다 고 볼 수 있다. 즉, 가장 기본적인 의미라 할 수 있는 ‘용돈을 주다’에서의 ‘주다’의 의미는 그 대상으로 구체적인 사물이 선택되었는데, 이 경우, 그 사물이 한 사람의 소유에서 다른 사람의 소유로 소유의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또한 ‘정을 주다’에 서처럼 그 대상이 추상적인 ‘정’의 경우, 해당 대상의 이동의 의미는 여전하고, 단지 그 이동의 대상이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앞선 구체적인 대상의 이동의 의미와 차이가 있다.
요컨대, 핵심의미는 추상도가 높은 개념으로서, 일부 다의어는 핵의미 구조를 지니 는 것으로 보이나, 다의화의 과정에서 초기 단계는 핵심의미를 바탕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핵심의미로 포괄할 수 없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 경우 다의 어는 연쇄의 방식으로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임지룡 1996: 244).
2.1.2. 의미연쇄 구조
‘의미연쇄 구조’란 다의어가 ‘의미연쇄’(meaning chain)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음을 말한다. 의미연쇄의 개념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953)의 ‘가족 유사성’38)의
38)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은 가족들 사이에 체격, 용모, 눈색깔, 걸음걸이, 기질 등에서 다양한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특정한 자질들을 공유
은유와 일치하는데, 그 구조를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A(abc)→B(bcd)→C(cde)→D(def) ...
이는 인접 요소끼리 공통요소를 가지지만, 전체를 망라하는 의미의 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39) 이는 고전범주화에 대응되는 원형범주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홍사만(1985: 67-71)은 ‘손’의 다의적인 의미를 연쇄적으로 풀이한 바 있다.
(1) 사람의 팔목 끝에 달린 부분(‘손과 발’) (2) 일손 곧 사람(‘손이 달리다’)
(3) 마음(‘손이 맞다’) (4) 아량(‘손이 크다’)
여기서 ‘손’은 ‘손→사람→마음→아량’의 연쇄 구조를 나타낸다. 즉, 다의어 ‘손’은 그 기본의미인 ‘사람의 손’을 기준으로 ‘일손’, ‘마음’, ‘아량’ 등의 의미로 순차적으로 확장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원형이론에 의한 의미연쇄는 다의어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많은 이점이 있 지만, 다의어의 의미구조가 전부 의미연쇄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한 의미연쇄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범주의 한계를 규정하기에 곤란하다. 다의어의 핵 의미 구조와 의미연쇄 구조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의미망 구조이다.
2.1.3. 의미망 구조
‘의미망 구조’란 한 낱말의 다의적 의미는 관련된 ‘의미망’(semantic network)으로 구조화되어있음을 뜻한다. 이 의미망 구조에 대해 래내커(Langacker 1987: 372-3)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몇몇 자질만이 중첩되고 교차된다는 것이다.
39) 극단적으로 영어의 ‘sanction’은 하나의 표제 아래 ‘permission, authorization’(허가)와
‘prohibition, embargo’(금지)라는 모순적인 의미가 공존하며, ‘fast’는 빠른 동작(He ran fast; 그는 빨리 달렸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작의 부재(Hold fast: 꽉 잡아라)를 나 타내기도 한다(테일러, Taylor 1995: 120).
다의관계의 전형적 의미를 원형이라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의미가 확장되며, 이러한 원형의미와 확장의미를 추상화한 것을 도식으로 보았다. 이러한 망의 기본 구조도는 확장과 도식의 순환 작용에 의해 보다 복잡한 망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러한 다의어의 의미망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임지룡(1996: 247-8)은 동사 ‘가다’
의 의미를 분석하였는데, 먼저 ‘가다’의 다의적인 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학생이 학교에 간다.
(2) 소가 간다.
(3) 새가 앉았다 간다.
(4) 기차가 간다.
(5) 시간이 간다.
(6) 동정이 간다.
(7) 판단이 간다.
(8) 맛이 간다.
(9) 결심이 오래 간다.
여기서 (1)은 ‘가다’의 원형의미로서 사람이 두 발로 이동하는 것인데, 이 의미는 확장을 거쳐서 네 단계의 도식을 이룬다. 첫째, 원형의미인 (1)을 바탕으로 의미 (2) 와 (3)으로 확장되는데, (2)의 사지동물은 네 발로 이동하고 (3)의 날짐승은 두 발 및 날개로 이동한다. 이들은 모두 동물의 이동으로 도식화된다. 둘째, 동물의 이동을 바탕으로 (4)의 동력에 의한 ‘차량’의 이동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구체적 대상의 이동 으로 도식화된다. 셋째, 구체적 대상의 이동을 바탕으로 (5)의 시간적 이동과 (6), (7) 의 추상적 이동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동작으로 도식화된다. 넷째, 동작을 바탕으로 (8), (9)의 상태의 이동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이동’으로 도식화된다.
이러한 의미망 구조는 수직적으로 보면 구체적인 층위에서 추상적인 층위에 이르 기까지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중 가장 상위 층위의 도식인 ‘이동’에 초점을 맞 추면 ‘핵의미’ 구조가 되고, 가장 구체적인 층위, 고다 ‘가다’의 구체적인 용법에 초점 을 맞추면 ‘의미연쇄’ 구조가 된다. 그러나 다의어의 ‘의미망’ 구조의 기본적인 입장 은 ‘핵의미’와 ‘의미연쇄’의 장점을 취하고 한계점을 보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곧 원형을 중심으로 한 ‘확장’은 ‘의미연쇄’의 방식이며, 그러한 확장을 추상화한 ‘도식’
은 ‘핵의미’의 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