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2) 말로 표현하는 감정의 한국적 실천
: 상황 기술적 언어와 한국인의 화의 감정 모델
한국인들은 어린이의 울음을 금기시하여, 양육자는 우는 아이가 화가 풀리고 울음이 그치도록 즉각적으로 보살피고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적 믿음 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뻘’의 보조교사는 이와 같은 생각에 근거하여 아이를 달 래고 울음을 그치도록 여러 방식으로 도와주었다. 보조교사가 아이의 화에 반응 하는 방식에 대하여 담임교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는 되도 록 지양해야 할 방식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담임교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교사가 독려하고 도와주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어린이가 학생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 질 혹은 능력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로 표현하는 감정’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A 유치원에서 감정 교육을 위해 활용하는 자료로는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 말 화나면...』 혹은 그 원서인 When Sophie Gets Angry - Really, Really Angry...라는 동화책이 대표적이다.51)
51) 뱅, 몰리 (이은화 옮김) 2004『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서울: 어린 이 미디어 교육 연구소.
Bang, Molly 1999 When Sophie Gets Angry - Really, Really Angry..., London:
Scholastic.
<사진Ⅱ-2> 화의 감정 교육과 관련한 대표적인 동화책
: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과 When Sophie Gets Angry - Really, Really Angry...
이 책은 아이들의 감정 교육을 위한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그림책으로, 유치원 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감정 교육의 교과서처럼) 자주 읽혀진다.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쏘피가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언니가 와서 “내 차례야.”라며 고릴라를 빼앗 았습니다.
“안 돼.” 쏘피가 말했어요.
“그래도 돼, 쏘피. 언니가 갖고 놀 차례야.”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언니가 고릴라를 빼앗아 갔을 때, 쏘피는 트럭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저런! 지금처럼 쏘피는 화난 적이 없었습니다. 쏘피는 발을 굴러댔어요.
쏘피는 소리를 질렀어요.
쏘피는 이 세상을 작은 조각으로 부셔[부숴]52) 버리고 싶었습니다.
52) 번역서에는 ‘부셔’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표준어는 ‘부숴’이다.
쏘피는 소리를 질렀어요. 새빨간 빨간색처럼 소리 질렀어요.
쏘피는 막 폭발할 화산 같았어요.
쏘피는 달립니다. 쏘피는 달리고 달려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립니 다.
그런 다음 쏘피는 한참동안 울어버립니다.
얼마 후에 쏘피는 바위를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고사리도 바라봅니다.
쏘피는 지저귀는 새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쏘피는 커다란 빵나무에 올라갑니다.
쏘피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을 느낍니다. 바다와 파도를 바라봅니 다.
쏘피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쏘피는 나무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은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납니다. 모두들 쏘피가 집에 돌아와 기뻐합니다.
쏘피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습니다.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53)
이 책과 관련한 감정 교육 수업에서 교사는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라는 학습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교사는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후 쏘피가 왜 화가 났고 어떻게 했는지에 대하여 책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였고, 화가 났던 자 신의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 보도록 하였다. 뒤이어 교사는 독후 활동으로 아동이 ‘언제 화가 났고’, ‘어떤 방식으로 화가 풀렸는지’에 대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에 대하여 간단한 이야기를 하게 하였다. 독후 활동의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흥 미로운 점은 아이들이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설명을 하며, “동생이 내 물건을 뺏 어서...”, “아빠가 사탕을 못 먹게 해서...”라는 대답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아이 들은 교사가 명시적으로는 가르치고자 하나, 무의식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배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울림반 아이들은 감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화가 났던, 특히 자신에게 화를 불러일으켰던 ‘상황이나 맥락을 중심으로’ 대답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말에서 화의 감정을 표현 하는 감정에 관한 어휘, 예를 들어, ‘화난다’, ‘속상하다’, ‘짜증난다’와 같은 표현 53) 이 책은 영문 원서로도 자주 읽혀진다. 공식적인 영어 수업 시간이 없는 A 유치원 에서는 원서로 읽혀지지는 않았으나, 영어 유치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본 연구의 일 부 어머니들은 오히려 번역되지 않은 원서를 읽어주고 이에 대하여 자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아이들의 영어 교육 및 ‘감정 교육’에 적절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 였다.
은 생략되거나 혹은 공유되는 전제로 맥락 속에 남겨 놓아져 있는 셈이다. 아이 들은 오히려 “○○가 ~ 해서”에 보다 초점을 두어 말하고, 때문에 아이들의 감정 표현의 말하기는 “혜준이가 나 밀었어요.”와 같은 고정적인 말하기 형태를 보였 다. 따라서 한국의 유아교사가 바라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의 말하기 양식은, 실제로는 화가 나는 ‘상황’이나 ‘맥락’에 대하여 인과 관계를 잘 설명하는 것에 보다 강조점을 두고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어린이의 감정 표현 언어의 특징은 미국 중산층의 사례, 노동자 계층의 사례 그리고 본 연구의 아이들의 사례들을 비교해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미국 중산층 유아교육기관에서는 말을 사용한 감정 표현, 특히 “나는 어떤 감정을 느 껴요.”(“I feel emotion.”)라는 감정 표현을 하도록 가르친다. 예를 들어, 화가 났 을 때는 친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화가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언어는 친절함, 공손함, 좋은 매너라는 친사회적 가치의 영역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안준 희 2009: 135). 이에 비하여, 미국 노동자 문화에서 ‘놀리기’는 노동자 계층 언어 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아이들은 어른의 놀림에 단호하게 자기 주장 (self-assertion), 자기 방어(self-defense)를 할 수 있도록 사회화된다. 어린이는 놀림에 대하여 화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배우는데, 그 표현이란 “나는 울었다.”,
“나는 테이블을 찼다.”와 같은 ‘행동 중심적 언어’(action-oriented language)(Miller 1986)라는 특성을 보인다. 그런데 비교하자면, 현대 한국 사회 의 어린이는 화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라는 교육을 받는다는 점에서 미국의 어린 이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어린이의 감정 언어는 미국 중산층 어린이와 같은 감정 단어를 사용한 자아 혹은 감정 표현은 아니며, 미국 노동자 계층의 어린이와 같은 화난 감정에 대한 행위적 표현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어 린이들의 “○○가 (나를) 때렸어요.”, “○○가 (나를) 밀어서 넘어졌어요.”와 같은 언어 표현의 경향은, ‘상황 기술적 언어’(situation-oriented language)라고 명명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란 어떠한 감정으로 정의되며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에 대하여, 미국인의 심리 모델과 비교해 보는 것을 통하여 한국 어린이들의 상황 기술적 언 어에 대하여 분석해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중산층의 화에 대한 관념에서는 화 의 ‘개인적 측면’이 강조된다. 이들에게 화는 개인 내부의 감정으로, 외부의 도발 없이도 표현될 수 있는 ‘표면 아래’에 이미 존재하는 감정으로 묘사된다. 말하자
면, “화는 정신역동학적 근원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고, 화를 내는 것은 개인의 심 리적 문제로 생각되며, 이에 따라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 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개인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평가되어 결국 화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감정의 통제 또한 개인 의 (감정에 대비되는 이성적) 자아가 감정 통제의 주체이며, 이것이 미국적 사람 됨의 바탕을 구성한다”(정향진 2003b: 136-137).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문화의 화에 대한 감정 모델에서는 화의 ‘사회적 측 면’이 보다 중시된다. 다시 말하여, 화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과 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때그때 구성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 회적 상호작용의 맥락을 중시하며, 한국인들은 화를 내는(화가 나는) 것은 화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된 직접적인 사건이나 타인의 도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이에 따라 미국 중산층 문화와 비교해 보았을 때, 화는 개인 내부의 감정 이라기보다는 상황과 맥락에 매우 의존적인 감정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 존 재한다고 지각된다. 말하자면, 화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과정의 산물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믿어진다. 따라서 한국 아이들의 “나는 누구 때문에 화가 났다.” 혹은 “나는 누구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났다.”라는 상황 기술적 진술은, 한국 문화 특히 화에 대한 한국 문화 특유의 민속 심리 모델에서 기인하 는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어린이들의 ‘말로 표현하는 감정’이 란, 한국의 심리 모델과 문화적 배경에 새로이 유입된 서구 교육 이론에 근거한 실천이 만들어낸 새로운 말하기 양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 화의 감정의 언어 사회화 관습은 한국 문화에 맞게 재해석된 모델(localized model)이라 할 수 있 겠다.
3) “누가 그랬어?”와 “울지 말고 말하세요.” 사이에서 : 새로운 환상과 교실 언어
교사와 많은 어머니들은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을 통하여 아이 들이 쏘피와 같이 화를 낼 수 있음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아이들은 스 스로 분노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믿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 다. 그러나 한 어머니는, 이 책은 쏘피의 화가 스스로 삭여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 추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읽혀질 뿐 실천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앞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