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 사회언어적 변이어로서의 ‘어린이말’
본 연구의 어린이들은 ‘어린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적극 적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말의 방식과 목록들을 가지고 있다. 연구자는 이러한 어 린이들의 말을 한국어의 중요한 사회언어적 변이어(variety)로 보아 ‘어린이 말’(children talk)이라는 용어로 정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어린이말이란 ‘아기말’의 비유적으로 확대한 표현으로, 어울림반에서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일련의 말들은 일견 ‘아기말’의 양상을 보인다.54) Ferguson 에 따르면, 아기말이란 “개별 언어 공동체에서 일차적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말하 는 데에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러나 정상적인 어른들이 사용하는 데에는 적 절하지 않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개별 언어의 특수한 형태”(Ferguson 54) 한국 사회의 아기말 연구는 왕한석(2008a)이 대표적이다. 이 연구는 아기말의 어휘 집합을 중심으로 그 목록을 수집하고 그것의 개략적인 구조 및 사용상의 특색들에 대 한 분석이다. 한국의 아기말은 의미 범주의 구분 면에서, ‘⑴ 친척 및 기타 호칭들’,
‘⑵ 신체 부위 및 신체적 기능’, ‘⑶ 음식’, ‘⑷ 동물의 이름들’, ‘⑸ 특성(위험한 환경 내의 대상이나 사건)’, ‘⑹ 놀이’로 조직된다. 아기말은 많은 수의 어휘가 의성어, 의 태어에서 연원하였고, 반복, 기본적인 자음, 모음이 사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단지 몇 개의 어휘만이 ‘정상어’, 즉 어른의 말에서 형태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런 데 어른들이 어린이의 언어 습득을 촉진하기 위해 아기말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 지만, 만3세 즈음이면 (말하자면, 모국어 습득을 거의 이루는 시점 즈음이면) 더 이 상 아기말을 쓰지 않을 것이 기대된다. 이 연구가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유 아의 신체적, 인지적, 언어적 발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민간 모델’(folk model)을 제 시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민간 모델에 따르면 한국 문화에서 유아의 발달은 서 구 문화의 그것과는 부분적으로 다르다. 이를 테면, 어린이의 신체적 발달과 관련하 여, 서양에서는 표준적인 발달의 단계란 ‘앉기’(sitting)→‘배밀이’(creeping)→‘기 기’(crawling)→‘서기’(standing)→‘걷기’(walking)→‘쪼그려 앉기’(squatting)의 여섯 단 계라 인지되는 데 비하여, 한국의 어린이는 ‘앉기’ 이전에 ‘배밀이’, ‘기기’를 하는 것 으로 인지된다. 그리고 서양 문화와는 달리 한국인들은 ‘쪼그려 앉기’는 중요한 발달 의 단계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어린이의 언어 발달과 관련하여서는, 영어권에서는 유아가 말하기 전(前) 단계로 ‘cooing’과 ‘babbling’을 구 분하여 사용하여 왔으나, 한국에서는 (일부 지역에서는 ‘엉가리 한다’와 ‘사설 한다’로 구분하여 범주화하여 왔음에도) 모두 ‘옹알이’로 이해 혹은 번역 하여 왔다(ibid, 459-460).
1964: 103, 왕한석 2008a: 430에서 재인용)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아기말에 는 적어도 세 종류의 ‘자료들’이 포함되는데, 한 종류는 “정상 언어 및 다른 아기 말 자료들과 함께 사용되는 억양 및 부차언어적 현상”이고, 또 한 종류는 “정상 적 언어로부터 수정된 형태소나 단어 그리고 어구들”이고, 그리고 마지막 한 종 류는 “아기말에만 특이한 어휘 항목의 집합”(ibid, 430)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 데 본 연구의 어린이들의 이 특수한 성격을 지닌 말들을 단지 아기말이라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기말은 어른이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하여 말을 하기 전까지(주로 만3세 이전) ‘임시적으로만’ 사용하는 말이고, 언어 습득이 거의 완성 단계로 접어든 만3~4세의 어린이들은 이 전형적인 아기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말 의 목록들을 가고 있으며, 이 ‘특수한’ 말들은 단지 어휘 목록일 뿐만 아니라, 문 법적 특징이나 부차언어적 특징, 그리고 담화적 특징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이때 변이어란, 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 그 구성원이 사용할 수 있는 여 러 특정한 말하기 방식의 자원, 즉 ‘의사소통 목록’(communicative repertoire) 중 선택되는 특정한 말하기 방식을 일컫는다. 개별 화자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 코드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이를 선택하게 하는 특정한 사 회적 영향력 속에 놓여져 있다(사빌-트로이케 2009: 63).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 언어적 변이어로서의 ‘어린이말’이란, 어린이라는 사회적 정체성 안에서 아이들이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자원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어의 한 중요한 사회언어적 변이어로서의 어린이말이란 어 린이들 특유의 사회언어적 특징을 보여주는 말이며, 이는 어휘적으로, 통사적으 로, 부차언어적으로 그리고 담화적으로 특수한 의사소통의 양상을 드러내는 말의 목록이 될 것이다.
아동들은 어린이말을 통하여 또래 언어문화를 형성하고 이러한 또래 언어문화 를 통하여 어린이로서 정체성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어린이말은 아이들 이 특정한 상황에서 창조해 낸 문화적 구성물이며, 아이들의 언어적 세계의 실재 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는 탐구되어야 할 흥미로운 연구의 영역이다. 따 라서 연구자는 어린이를 사회적인 존재로서 능동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 며,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해 나가는 주체 로 보고, 그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본 장에서는 아이들의 (연령 관련 변이어로서의) ‘호칭어’와 여러 형태의 ‘존댓말’,
(젠더 관련 변이어로서의) ‘경쟁적 말하기’와 같은 말하기 양식들을 면밀히 살펴 봄으로써, 사회화 주체로서의 아이들 또래 집단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어린이말 의 특성과 현대 한국 사회의 어린이 언어 사회화의 한 양상에 대하여 기술・분석 하고자 한다.
2) ‘어린이’라는 정체성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의 사회적 세계는 교사와 아이들 또래 집단이라는 관계로 구성된다.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는 어른과 어린이라는 엄연한 지위 차이가 있는 관계적 특성을 지니며, 아이들은 교사와의 관계에서 어른과 어린이 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언어 사용의 수직적 질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 한 것은 어린이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어른들과 구분되는 ‘어린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연령을 기준 으로 외부적 시각에서는 ‘영아’(嬰兒)와 ‘유아’(幼兒)로 범주화될지라도,55) 본 연구 의 어린이들은 스스로의 눈으로는 ‘어른’과 구분되고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어린 이’ 혹은 ‘아이’라고 자신들의 또래 집단을 정체화함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주로 “우리는 어린이”라는 언명으로 표현되었다.
<사례Ⅲ-1>
승우(5세, 남): <연구자에게> “여기는 너무 짧아[낮아]. 어린이만 들어오는 데야.
어른은 오지 마.”
<사례Ⅲ-2>
주연(5세, 여): “어른은 키가 크다.”
서윤(5세, 여): “엄마, 아빠는 키가 커.”
주연(5세, 여): “아니야, 아빠가 더 커.”
55) ‘유아’라 함은 보통 만3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의 어린이를 말한다(법률 제 7120호, 유아교육법 제1장 총칙). 유아교육학계에서는 대체로 0~8세를 유아기로 규 정하며, 넓은 의미로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 서는 만3~4세의 유아기 아동을 지칭하는 유아라는 용어를 유아교육 내지는 유아교육 과정과 같이 규정된 맥락에 한정하여 사용할 것이다. 대신에 사회적 정체성의 개념을 보다 강조하고자 할 때에는 아이들 세계에서 보다 유의미한 개념인 ‘어린이’를 주된 용어로 사용하고, ‘아이’, ‘아동’ 등의 용어를 글의 맥락이나 사용상의 의미에 따라 적 극적으로 혼용하고자 한다.
서윤(5세, 여): “그럼 엄마가 아기란 말이야?”
주연(5세, 여): “아니, 우리 엄마, 아빠를 보니까 엄마보다 더 크던데?
서윤(5세, 여): “아니, 그게 아니고...”
위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는 일단 ‘신체적 차 이’에서 비롯된다. <사례Ⅲ-1>에서 담임교사에게 야단을 맞아 화가 난 다섯 살 남아 승우는 미끄럼틀 아래의 빈 공간이 낮은 곳임을 핑계로, 승우를 달래주려던 연구자에게 그 곳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 “어린이만 들어오는 데야. 어른은 오지 마.”라는 승우의 말은 어린이인 자신과 어른인 연구자와의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공간을 분리하고, 동시에 연구자와 심리적 거리감을 두려는 의도로 읽 힌다. <사례Ⅲ-2>에서도 아동들이 인지하는 어른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다섯 살 여아 주연이의 “어른은 키가 크다.”라는 말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키가 작다’
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연이의 이 말에 서윤이는 그 예로 가장 가까운 어 른인 ‘엄마’, ‘아빠’로 구체화하였다. 그런데 서윤이의 말을 부분적으로 이해한 주 연이가 부모 중 키가 큰 쪽은 남자인 아빠라고 하였고, 그 때문에 다시 둘 사이 에 의사소통의 오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상대적으로 엄마가 아빠보다 키가 작다 고 한 주연이의 말에, 서윤이는 ‘엄마가 아기냐’라며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주연 이가 다시금 자신의 말을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자, 서윤이는 주연이가 어떤 점에 서 오해를 하였는지 깨닫고 어른과 아이의 신체적 차이의 이야기로 말 상황을 되 돌렸다.
<사례Ⅲ-3>
담임교사(26세, 여): <점심시간, 승우가 은진이에게 장난을 친다.> “승우야, 밥 먹어.”
승우(5세, 남): <교사를 흘낏 흘겨보고는, 두 팔을 들어 은진이를 향해 뻗으며>
“나 사람 잡아먹을 거야. 이은진 먹을 거야.”
재윤(5세, 남): <웃으며> “나는 지구까지 잡아먹었어. 우주까지 잡아먹었어.”
승우(5세, 남): <웃으며 그러나 굵고 낮은 톤의 성인 남자의 목소리를 내며>
“이놈!”
은진(5세, 여): <정색하며> “야, 정승우! 니 어른이가?”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놓인 분리의 벽은 단지 신체적 차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가진 배타적 권위 혹은 그 반대의 편에 있는 아이들만이 가진 (어른의 시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