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 한국인의 이중적 가치관과 사회화 관습
현대 한국 사회는 전통적 집단주의(collectivism)와 서구적 개인주의 (individualism)라는 ‘전통’과 ‘서구화’로 대표되는 이중적인 가치 체계가 혼재하 는 사회라 할 수 있다.29) 흔히 서구 사회를 대표하는 가치관으로 인지되는 개인 주의적 가치관이란 ‘독립적 자아’, ‘심리적 중심으로서의 개인’, ‘개인적인 행동 규제’, ‘죄의식’(guilt)이라는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서구 사회에서 개인의 자 아(self)는 외부 세계와 경계가 뚜렷한 독립적이고 고유한 실체로 여겨진다. 개인 의 가치를 중시하는 개인주의 가치 규범 하에서 서구의 자아 개념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반면에 한국 사회와 같은 비서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집단주 의란 ‘관계적 자아’, ‘심리적 중심으로서의 내집단(ingroup)’, ‘내집단의 행동 규 제’, ‘상호의존과 조화’, ‘수치심’(shame)으로 특징지워진다(앨퍼드 2000: 93). 비 서구 사회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규범은 맥락적이고 사회지향적인 자 아 개념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서구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이란 내면 적 지향성과 자기 통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사람이란 좋은 대인관계를 지닌 사람으로 흔히 그려진다. 그리고 (언어) 사회화 과정에서도 그 차이는 두드러져서, 서구 사회에서는 독립성과 자율성, 개성, 자아 29) “서구의 개인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독특한 완성체로서 구성된다고 여겨진다. 서구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개인은 부분적 조정은 있을지언정 본인의 자아를 그대로 유지하 며, 이때 개인이란 개별자이다. 그러나 한국 문화에서 개인은 그 자체로 완전성을 갖 는 개별자라기보다는, ‘우리’라는 사회적 관계 단위 속에서 부분으로서의 성격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자아의 특징은 우리 속에서 자신의 역할 및 기능에 따라 규정 되며, 그것이 자아 구성에서 핵심적 요소가 된다. 한국인의 우리관은 동질성, 하나됨, 상호의존, 상호보호, 상호수용 등을 그 내재적 속성으로 한다. 따라서 한국인의 인간 관계에서 가장 일차적이고 중요한 목적은 우리성 집단을 구성하고 확인하고 유지하는 일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은 독립된 개인으로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불완전 부분자’(imperfect partial individual)이라는 개인관 혹은 인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상호의존적 자 아(interdependent self)(Markus and Kitayama 1991)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인은 자신과 공동 운명에 있는 또 다른 부분자를 우리 관계 속에 포함시키고, 동시에 우리 속에 포함된 부분자들 간의 우리성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곧 인간관계의 일차 적 기본 축이 된다(최상진・김기범 2011: 54).”
표현 등에 대한 사회화가 중심이 되는 반면, 한국 사회 등 비서구 사회에서는 타 인의 욕구나 감정에 민감하도록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져 왔 다.
현대 한국 사회에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문화가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모든 문화에는 집단주의 및 개인주의 가치관이 항상 공존하 며 이 두 가지 가치들의 갈등이야말로 인간의 속성이라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한 국인들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주의적이어서 한국의 문화, 모든 한국인의 심 리의 중심에는 개인주의적 자아와 집단주의적 자아 간의 대립이 있으며, 동시에 이는 모든 문화,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집 단주의 간의 대립은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이 다른 사람 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관점이라고 하는 해석도 가 능할 것이다(앨퍼드 2000: 75).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사회와 비서구 사회가 각각 독립성과 관계성을 특질로 하며, 이것이 사회화 과정에서도 상이한 문화적 가치 를 강조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은 가치들의 역동적인 실천 과정을 간과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사회 내에서 가치들 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또한 그 이해가 문화마다 어떻게 다른지, 개인이 대립적 가치를 실제로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간과하기 때문이다(Spiro 1993: 144-145).
따라서 이러한 비판적 관점의 최근의 연구들(Kusserow 2004; Raeff 2006;
Suizzo 2004)은 공존하는 가치들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른 이해와 실천에 주목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한국 사회의 양육자들의 사회화의 관습과 실천을 살펴보는 것을 통하여, 대립적이고 모순적이라고 일컬어져 온 가치들이 한국 양 육자들의 양육 실천의 과정 속에서 공존하는 과정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미국 중산층 사회에서는 아동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이 중요하게 생각됨에 따 라, 영아들은 출생 후 첫 6개월 동안 대체로 어머니와 신체적으로 분리되어 자신 의 침대 또는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30) 그 뒤에도 영아가 하루를 보내 는 일반적인 모습은 놀이 울타리(play-pen) 속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어머니가 지
30) 최근 미국 등 서구 사회에서는 아이를 부모와 분리되는 아이 자신의 방에서 자게 하는 종전의 관습과는 달리, 아이와 함께 잠을 자는 것(bedsharing)이 아동의 성격 발달에 더 유익하다는 믿음이 확산되는 경향이 대두하였고, 그 실천에도 변화의 모습 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Weisner 2009: 183).
켜보는 가운데 혼자 노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달라붙거나 안겨 있기보다는 환경 을 탐색하거나 장난감을 조작하는 아기가 정상적이고 좋은 아기로 여겨져서, 어 머니와의 신체적 접촉은 꼭 필요한 경우로 제한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아는 다루기 어려워지고 영아의 독립성 발달을 저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는 아기를 달래는 경우에도 안아 주기보다는 먼저 딸랑이 같이 아기의 관심을 끄는 장난감이 주어진다. 그리고 서구 백인 중산층 사회에서 (그리고 현대 한국 사회에 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직접적인) ‘청자’(addressee)이자, 대화의 상대로 서 간주된다. 미국 백인 중산층 사회는 핵가족이 가구의 단위이며, 주된 양육자는 대개는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유아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고, 어머 니는 유아를 부르며, 유아에게 소리를 내어 말한다. 이러한 유아에 대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는 어머니와 유아, 두 사람이 참여하여 말 순서를 주고받는 ‘A→B→A
→B…’의 양자적 대화 모델의 원형이 된다. 이처럼 영아가 언어를 이해하기 전부 터 미국 중산층 어머니는 언어적 의사소통을 시도하며, 유아는 스스로의 요구를 언어로 표현하도록 격려되며, 이것은 유아기 이후의 성장 과정에서도 또한 성인 이 된 후의 사회생활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31)
31) 위 내용은 현대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의 양육자, 특히 어머니들이 많이 읽는 대중 적인 번역 육아서 혹은 번역된 (유아교육학 혹은 심리학) ‘이론’들로 무장된 육아 서 적들과 언어 인류학의 논문들(Ochs and Schieffelin 1984; Schieffelin and Ochs 1986a)을 바탕으로 미국 유아들의 언어생활과 관련되는 하루의 일상을 연구자 나름 대로 재구성하여 본 것이다. 참고로 하였던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베이비 위스퍼: 행복한 엄마들의 아기 존중 육아법』
(트레이시 호그・멜린다 블로우 지음, 2001, 서울: 세종서적.) 2. 『양육 쇼크: 아이들에 대한 새로운 생각』
(포 브론슨・애쉴리 메리언 지음, 2009, 서울: 도서출판 물푸레.) 3. 『화내는 아이, 숨겨진 마음 읽기: 화내는 아이에게 화내지 마라!』
(스티븐 브라이어 지음, 2010, 서울: 아주 좋은 날.) 4. 『큰 소리 치지 않고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는 법』
(루스 보든 지음, 2008, 서울: 웅진 리빙 하우스.)
5. 『3세와 7세 사이: 자기주도형 아이는 7세 이전에 결정된다』
(김정미 지음, 2010, 서울: 예담.) 6. 『아이의 사생활』
(EBS 제작팀 지음, 2009, 서울: 지식채널.)
7. 『아이의 자존감: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받는 당당한 아이로 키우는 양육 법』 (정지은・김민태 지음, 2011, 서울: 지식채널.)
8. 『아이의 사회성: 세상과 잘 어울리고 어디서나 환영받는 아이로 키우는 양육법』 (이영애 지음, 2012, 서울: 지식채널.)
반면에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에서 혹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아기들은 부모 와 함께 잠을 잘 뿐만 아니라, 깨어있는 시간에도 부모, 조부모 또는 다른 친척들 이나 형제들, 즉 누군가에게 안겨있거나 업혀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 한국 사 회의 핵가족에서도 혼자 있지 않으려는 아기를 업고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흔 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아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아기에게 가장 매력적 인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신체 접촉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한국 사회는 유아에게 일찍부터 말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려는 언어 사회화에 대한 문화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왕한석 2008a: 459), 한국인의 이러 한 초기 언어적 환경의 특성은 신체 접촉 지향, 비언어적 의사소통 지향, 인간관 계 지향의 방향으로 자녀의 (언어) 사회화를 이끈다고 볼 수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양육 행동은 자녀의 성격, 태도, 사회성, 인지, 정서 발달 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부모의 양육 실천들은 아동에 대한 부모의 신념과 부 모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인간형에 따라 달라질 것이므로 양육 행동은 그가 속 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반영하게 된다. 달리 말하여, “사회화란 한 사람이 태도와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속성들을 획득하는 것을 통한 내면화의 과정 으로, 어른들은 적절한 행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라는 규칙들을 초심자에 게 직접적・간접적인 표현으로 드러낸다. 말하는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발화 와 마찬가지로 성원들의 문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표현되고 있으며, 어떤 식의 사회화 행동에 관한 맥락이라도 그것은 참여자들이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조에 의해서 변형되게 마련이다”(Schieffelin 1986:
166).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서구의 양육 행동은 서구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이상적인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배경을 간과하고 서구의 양육 행동을 그대로 하기도 불가능하겠지만, 설사 그렇 게 따른다 하더라도 어머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녀 행동을 형성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이 모방하는 것은 ‘모델’(models)이 아니라 어른의 행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여 널리 읽혀지는 육아 서적들이 다루는 내용에는 아동 의 건강이나 식습관, 생활습관 등에 관한 것도 있지만, 보다 큰 줄기 하나는 ‘아동의 마음 읽어주기 활동과 나아가 그에 근거한 문화 자본으로서의 감정 통제’에 관한 것 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교육적 측면’에 관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에서는 “아이 의 감정에 공감하여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어라. 그렇게 하면 감정을 잘 표현하고 통 제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다.”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후자에서는 아동 교육(“초등 입학 전에는 교육을 시키지 말라, 그래서 ‘똑똑한 아이’가 아닌 ‘행복한 아이’로 키우 라.”라는 내용 대 이와는 반대로 적극적인 (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지)이 그 내용의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