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3) 부산 방언의 특수한 종결어미: ‘-디’, ‘-리’의 사용상의 특징과 의미
연구 대상 아이들의 말에서는 ‘-디’와 ‘–리’라는 부산 방언의 특수한 종결어미 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앞서 제시된 <표Ⅲ-3>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반 말의 하위 종류 중 하나로, 반말이라는 동질적인 말단계 내에서 특정한 기능과 목적을 전달하는 어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디’: “김근우는 남자인데도 참을 줄을 모른디.” (서술형)
‘-리’: “이거 똑바로 해놔리!” (명령형)
제시된 문장은 ‘–디’로 끝나는 서술형, ‘-리’로 끝나는 명령형의 대표적인 표현 예이다. 그런데 각 문장에서 ‘모른디’와 ‘해놔리’는 각각 부산 방언인 ‘모른대이’
와 ‘해놔래이’로 대체하여도 그 의미상의 차이는 일견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디’와 ‘–리’가 부산 방언의 ‘-대이’, ‘-래이’와 형태상으로 거의 같기 때문으로, 서술형 ‘–대이’의 축약형으로서 ‘–디’, 명령형 ‘–래이’의 축약형으로서의 ‘–리’라
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가령 ‘-디’는 부산의 많은 성인 화자들이 여전히 사용 하는 ‘–대이’ 어미가 가지는 기능, 즉 상대에 대한 ‘배려’와 ‘완곡 표현’의 기능을 분명히 지니고 있고, 또한 이 종결어미들은 해라체이기에 연령상 상위자가 하위 자에게 혹은 동일 연령 간에 사용되는 것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인 화자들의 어느 연령까지가 ‘-디’와 ‘-리’를 사용하는지에 대하여서는 본격적인 경험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부산 방언 화자로서) 연구자의 경험에 의존 해보자면, 2013년 현재 30대 이하의 부산 방언 화자들은 ‘–디’와 ‘–대이’, ‘-리’
와 ‘–래이’를 어려서부터 사용하였고 현재에도 종종 특정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대들에서는 ‘–대이’와 ‘–래이’만을 사용하 는 것으로 관찰되며, 이때 연령이 보다 높은 화자들의 ‘-대이’와 ‘–래이’의 사용 (가령 “욕봤대이.”, “욕보래이.” 등)은 상대적으로 연하인 청자에 대한 ‘배 려’[+politeness]와 ‘정의’[+affection]을 함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들이 연 구자에게 존댓말이 아닌 반말의 ‘해라체’를 사용하는 상황이 곧잘 있었는데(예를 들어, “선생님, 나 잡아 봐라.”, “선생님, 나 어제 엄마랑 해운대 갔다~”), 그럼에 도 ‘–디’, ‘-리’의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말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달리 말하여, 이 ‘–디’와 ‘-리’로 끝나는 문장들은 연령이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어 린이) 또래 집단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부산 방언의 독특한 종결어미라 할 수 있 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다 선호하는 말의 형태는 ‘–대이’와 ‘-래이’보다는 ‘–디’와
‘–리’이며, 이는 아이들이 의도하고 실천하는 ‘–디’와 ‘–리’는 어른들이 보다 많이 쓰는 ‘–대이’와 ‘-래이’와는 다소간 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때문에 어린이들의 ‘–
디’와 ‘–리’ 사용은 ‘–대이’와 ‘–래이’를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고, 그 사용상의 맥락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 다. 말하자면, ‘누가 누구에게’ ‘–디’와 ‘-리’를 사용하는지에 대하여 보다 민감하 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디’와 ‘–리’가 어린이 또래 집단에서 서로에게 (형태상으로는) 대칭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 할지라도, 누가 누구에게 사용하는지, 특히 연령 차원과 깊게 관련하여 상위 연령 아동이 하위 연령의 아동에게 혹은 하위 연령의 아동이 상위 연령의 아동에게 그리고 동 일 연령 간에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서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 다.
‘-디’ 사용의 예
⑴ 6세 아동이 6세 아동에게: a. “이거(로봇) 사람으로 변신했디.”
b. “김근우는 남자인데도 참을 줄을 모른디.”
⑵ 6세 아동이 5세 아동에게: “그럼, 나 안 한디!”
⑶ 5세 아동이 6세 아동에게: “형아, 얘(다섯 살 남아)가 형아한테 ‘니’라고 했 디.”
⑷ 5세 아동이 5세 아동에게: a. “나는 언니디.”
b. “이은진은 기도 안하고 먹었디.”
먼저 ‘-디’ 종결어미의 사용 예를 보면, 화자와 청자의 연령에 따른 서로 다른 세 가지 의사소통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⑴과 ⑷는 여섯 살 아이들 간 그리 고 다섯 살 아이들 간 즉 동일 연령 아이들이 사용한 말이며, ⑵는 연상의 아동 이 연하의 아동에게, ⑶은 연하의 아동이 연상의 아동에게 사용한 말이다. 그리고 이를 말의 내용에 따라 분류해보면, 적어도 세 가지의 다른 양상을 볼 수 있다.
첫째, 예문 ⑴의 a. “이거(로봇) 사람으로 변신했디.”, ⑷의 a. “나는 언니디.”
(혹은 “나는 형아디.”)에서와 같이 단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에게 진 술해주는 것이다. 이는 주로 역할 놀이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같은 연령 간에만 사용되는 것도 매우 특징적이었다. 아마도 역할 놀이는 (예외는 있을 지라도) 대개는 동일한 연령 간의 유사한 수준의 역할 놀이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례Ⅲ-25>
해우(5세, 여): “보라색 (색연필) 좀 빌리면 안 돼?”
근우(5세, 남): <해우에게 보라색 색연필을 준다.> “같이 놀자.”
해우(5세, 여): “그래.”
근우(5세, 남): “나는 형아디. 공부하고 있디.”
해우(5세, 여): “나는 언니디. 언니 학교 간다.”
세형(5세, 남): “나는 아빠디. 아빠 회사 갔다 왔다.”
근우(5세, 남): “우리 ‘엄마아빠 놀이’ 하는 거 아니거든. 우리 ‘언니형아 놀이’
하거든.”
세형(5세, 남): <토라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위 대화가 시작되기 전, 근우와 해우는 책상자리에 앉아 제각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근우가 해우에게 “같이 놀자.”라고 놀이 제안을 하자, 해우는 “그래.”라 고 하며 놀이에 응하였다. 근우는 “나는 형아디. 공부하고 있디.”라고 하면서 역 할 놀이를 제안하고, 동시에 자신은 이미 역할을 정하고 놀이에 몰입하여 역할에 적절한 행동까지 하고 있음을 알렸다. 해우는 근우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역할 놀 이에 기꺼이 동참하여, 자신의 역할은 근우가 맡은 형아에 대응하는 ‘언니’라며
“나는 언니디. 언니 학교 간다.”라고 하였다. 아이들의 역할 놀이에서 그들이 ‘행 하는’ 역할에는 그 역할에 주어진 전형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엄마’
역할은 (실제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대개가 ‘전업맘’이 아닌 ‘워킹맘’임에도 불구하 고) 음식을 만들고 집을 청소하는 자녀를 보살피는 주부와 엄마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아빠는 회사에 다니고, 아기는 집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존 재로 그려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위 사례에서 ‘언니형아 놀이’를 하는 두 아 동은 각기 “공부를 하고 있는 형아”, “학교에 가는 언니”로 자신의 역할을 상정 하여, 형아와 언니는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나아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고 교실 담화에 잘 적응하는 리터러시 능력 자체가 아 이들의 형, 언니 되기에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상정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놀이가 즐거워 보였던지 곁을 맴돌던 세형이가 “나는 아빠디.”라고 하며 전형적인 아빠의 역할, 즉 아빠는 회사에 간다며, 놀이에의 동참 의사를 표시하였 지만, 근우는 세형이가 놀이 집단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으려 하였다. 이 는 “우리 ‘엄마아빠 놀이’ 하는 거 아니거든. 우리 ‘언니형아 놀이’ 하거든.”이라 며, 이 놀이에는 ‘아빠’ 역할이 필요하지 않음을 ‘-거든’이라는 분명한 거절 의사 를 전달하는 종결어미를 통하여 표출하였다. 말하자면, 이 사례에서 근우와 해우 는 서로 간에 구축된 신뢰와 연대감에 기반을 두어 둘만의 협력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둘만으로 구성되어 이미 진행되고 있는 놀이 맥락에 세형이라는 타 인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배타적인 관계를 구성하였다.
둘째, ⑴의 b. “김근우는 남자인데도 참을 줄을 모른디.”, ⑷의 b. “이은진은 기도 안하고 먹었디.”와 같은 사회적 관계 특히 협력적・배타적 관계의 형성과 관련되는 언어적 조절 장치로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보고의 말하기 (reported speech)는 상대에 대하여 청자에게 말을 전달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 라, 여기에는 지칭되는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도 함께 전달하는 것을 함의한 다. 그리고 이는 ‘–디’라는 종결어미가 사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인 것으로 관 찰되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사례Ⅲ-26>
시호(5세, 여): “이은진 밥이 제일 많이 남았디. 내 밥보다 더 많이 남았다. 나는 국물 다 먹었는데.”
재윤(5세, 남): “근데 이은진은 기도 안 하고 먹었디. <은진이에게> 니 기도 하 고 먹어.”
은진(5세, 여): “나 다 먹었다, 반찬.”
승우(5세, 남): “다 먹었다고 자랑하면 안 되는데.”
<사례Ⅲ-26>에서는 아이들이 한 아동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배타적 으로 대하는지(동시에 그 아동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협력적이고 공고한 관계) 를 볼 수 있다. 은진이는 대다수가 재원생으로 구성된 학급에 새로이 등원하기 시작한 아동인데, 이 아이는 그간 유아교육기관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었고, 때문 에 가정에서 엄마, 할머니와의 관계에 보다 익숙한 은진이가 유치원에서 일상의 생활 규칙 혹은 말하기 규칙에는 다소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은진이가 유치원의 규칙과 그 적응에 서툴고 때로는 규칙에 위반되는 행동을 할 때, 비난 을 공모하고 그것을 공유하면서 자신들 간의 연대감을 단단하게 구축하였다. 게 다가 자신들도 잘 지키지 못하는 혹은 지키지 않는 수많은 일상의 규칙들을 은진 이가 어길 때에 자신들이 가진 우월감을 확인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위 사례에 서 은진이가 밥을 느리게 먹는 것에 대하여 시호가 (시호 자신도 편식이 심하여 밥을 느리게 먹고 그것이 문제가 된 적이 많으면서도) “이은진 밥이 제일 많이 남았디.”라고 하며, 은진이의 또래 세계에서의 무능이나 불완전한 능력이라 생각 되는 것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렸고, 다른 아이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나아가 재 윤이는 “이은진은 기도 안 하고 먹었디.”라며 은진이의 또 다른 규칙 위반을 지 적하였다. 은진이가 ‘밥은 많이 남겼을지라도 반찬은 다 먹었다’라고 말하며, 자 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불식시키려 하자, 이번에는 승우가 (자신은 늘 자랑을 일삼으면서도, 동시에 앞서 시호가 국물은 다 먹었다며 ‘자랑’을 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자랑하는 것은 안 된다’라며 은진이의 말을 다시 한 번 비난하였다. 아이 들은 ‘-디’ 종결어미를 통하여 학급의 새로운 친구인 은진이를 소외시키고, 은진 이가 반찬은 다 먹었다며 이 또래 집단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것조차 다시 제지한 것이다. 이렇듯 화자의 ‘–디’ 사용이 지칭되는 아동에 대한 비난을 말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는 것을 막는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