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 람의 감정을 똑같이 따라 느끼는 것으로 상대방이 슬퍼하면 나도 같이 슬픔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나와 타자가 각자의 객 체로 분리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인지적 차 원에서 ‘아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아기들이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고 따라 웃거나 근처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함께 우는 것은 감정전염 의 현상에 가깝다. 감정을 따라 느끼는 타고난 능력이 아동의 발달 단계 에 따라 함께 발달하며 다른 사람의 정서적 상태를 함께 느낄 뿐만 아니 라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공감 능력으로 발달하게 된다.
인물 간 공감 관계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는 이 단계는 가까운 사이일 수록, 타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훨씬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아담과 에블린』 속 아담은 자신의 고객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맞춤옷을 재단하여 입히고는 자신의 창조물에 도취된 채 피 날레를 장식하듯 여자 손님들과 성관계를 맺는다. 손님으로 찾아온 릴리 와 관계를 마친 뒤 목욕탕에서 씻고 있는 도중에 예기치 않게 에블린이 집으로 돌아와 아담을 찾으면서 아담의 불륜 현장은 그대로 에블린에게 발각되고 만다.
“이게 당신의 가봉이야?”(AE: 24) 라며 비난하는 에블린을 두고도 아 담은 자신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에블린이 받았을 상처나 충격을 가늠하 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원에 있다고 변명해주지 않은 릴리에게 원망스 러운 마음을 느낀다. 릴리가 황급히 아담의 집을 떠난 후에도 아담은 모 든 것이 정상적일 것이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에블린이 던져놓은 열쇠와 짐들을 정리하며 태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위층 방으로 올라간 에 블린이 조용하자 혹시라도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진 않을까 걱정하며 불
안해한다. 이는 곧 아담에게 신체적인 “통증”(AE: 26)으로 나타난다.
갑자기 그는 통증을 느꼈다. 뭔가 딱딱한 것이 그곳에 꽂혀 있는 것처럼 갈비뼈 아래가 욱신거리며 쑤셨다.202)
아담에게 나타난 신체적 통증은 에블린의 감정 상태에 이입한 결과로 나타난 증상으로 해석된다. 프리들마이어는 공감이란 타인의 감정 상태 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특징이라고 정 의하는데,203) 여기서 말하는 감정적 반응이 아담에게는 ‘신체적인 통증’
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연인 사이인 아담과 에블린은 심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큼 감정이입 또한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정서적 상태를 그대로 이해하는 인지적 행동 이기도 하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경청함으로써 살아온 삶의 배 경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며 이입하는 방식으 로 나타난다.『심플 스토리즈』의 제니와 디터 슈베르트는 ‘애인’ 사이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매춘’으로 맺어진 부정한 관계로 보이기도 하는 특 수한 관계를 형성한다. 디터 슈베르트는 제니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모 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제니는 그저 곁에서 디터의 이야기를 묵묵히 경 청해주는 태도를 보인다. 대화가 끝나고 나면 디터는 제니에게 돈을 건 네는데 이를 두고 제니는 그가 선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불쌍한 남자 라며 연민의 태도를 보인다. 제니와 디터의 소통 방식은 ‘일방적 경청’으 로 나타나며 제니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상처 와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인다. 제니와 같은 인물은 타인이 하는 말 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며, 듣기를 통해 공감의 역량 202) AE: 26쪽. ☞
203) Wolfgang Friedlmeier: Entwicklung von Empathie, Selbstkonzept und prosozialem Handeln in der Kindheit. Konstanz 1993, S.33.
을 더욱 확장시킨다.
크르즈나릭은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철저히 듣기”라고 부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204)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는 제니는 ‘철저히 듣기’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인물에 해당한다. 황승환은 제니가 나이는 어리지만 이야 기를 듣기 좋아하며 상대방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가한다.205) 제니는 호텔 바에서 에드가와 대화를 나 누는 중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나이든 사람들이 좋아요.” 제니가 말했다. “노인들에게서는 일이 어떻 게 작동되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거든요. 당신이 그들에게 뭔가를 질문하 면 노인들은 우선 한 가지만 말해요. 다시 물으면 뭔가 다른 걸 이야기하 죠. 그러고 나서 세 번째로 묻는 거예요. 그때서야 끝이 나죠.”206)
제니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동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과거에 대해 잊지 않으려는 의도 가 담겨있다. 그러나 제니는 과거의 일을 들으며 과거의 삶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삶에서의 경험을 통해 배울 점을 찾고 새 로운 정체성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의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해 황승환은 사라져버린 동독의 정체성 혹은 새로 마주치게 된 서독의 정체성도 아닌 새로운 통일 독일에서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 이라고 평가한다.207)
이 단계에 속하는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정서적 차원에서 의 공감이 가장 우선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정서적 공감은 의도적이 204) Roman Krznarick: a.a.O., S.112.
205) 황승환: 앞의 논문, 190쪽.
206) SS: 266쪽. ☞
207) 황승환: 앞의 논문, 193쪽.
라기보다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감능력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부터 타고나는 선천적 자질이라는 주장이 타당해 보인다. 또한 가까운 사람일수록 공감이 더 빠르게 나타나고 강하게 전달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정서적 공감은 상대방과의 친밀도가 높거나 타 자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때, 혹은 감정이 풍부하고 공 감능력이 높을 때 더욱 활성화된다. 인물 간의 공감 관계는 감정적 이해 차원에서 그치기도 하지만 그 다음 단계의 공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자아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자아는 타자의 감정을 느끼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타자가 나 자신은 아니기 때문에 스스 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 보통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공감을 느끼고 난 후 더욱 친밀 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므로 그 다음 단계의 심화된 공감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