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상에게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타나는 공감의 반응과 공감의 수준은 개인의 성격 및 사고방식과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다르다. 튀 르머와 미하엘라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들 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고 풀려난 튀르머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건의 정황을 조금 더 앞의 시점에서부터 살펴보 도록 한다.
튀르머는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에 대해 시종일관 시니 컬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마치 “퇴근 분위기”(NL: 437)처럼 모여드는 모습을 시위라고 한 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일은 다 하고 시위에 참여하 257) AE: 108쪽. ☞
는,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진정성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단의 배우인 아내 미하엘라는 당장에라도 라이프치히에 가서 시대의 주인공이 되고자하며 시대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장담한다. 미하엘라는 함께 시위 현장에 나가지 않으려하는 극장 사람들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끼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기 혼자서라도 행동에 나서려는 것이 아 니라 튀르머의 뒤에 숨어있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튀르머는 시위 현장에 다녀온 일을 계기로 내적 갈등을 경험하 게 된다. 그동안 튀르머는 동독 사회 체제를 비판하며 체제에 항거하는 글을 쓰겠다는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튀르머는 동독 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적에 대항하는 ‘영웅’이 되고자 한 것이지 동 독 자체가 사라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동독이 없어지면 작가로서 자신 의 가치나 이상, 자기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면의 갈등을 겪 을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튀르머에게도 사고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관찰자로 서 시위 현장에 가담했으나 시위가 연일 계속되며 격해지던 어느 날 어 머니가 체포되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입소문을 통해, 라디오에서 전해들은 시위 현장의 모습이 궁금한 마음 에 길을 나선 튀르머의 어머니는 드레스덴 중앙역 앞에서 체포되어 군인 들에게 구타와 언어폭력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도 이틀 후 풀려나게 되 었지만 어머니는 만약 자신이 아직도 체포되어 있었다면 아무도 어디에 있는 줄 몰랐을 거라고 말하며 당시 겪었던 두려움을 표현한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문이었다. 미하엘라는 눈물을 참으려 노력 했고, 어머니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부담스러워하셨기 때문 에 그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258)
258) NL: 498쪽. ☞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미하엘라는 어머니에게 감정이입하며 어머니 가 겪었을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느낀다.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잡아주 는 것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위로하며 공감을 표현하려는 미하엘라와 달 리 튀르머는 그런 행동이 오히려 어머니로 하여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정적 동요를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이후 보 이는 튀르머의 행동은 어머니가 겪은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에 그치는 것 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공감으로까지 나아가 자신의 관점과 행동태도 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 고초 를 겪은 어머니의 모습은 당시 사회를 살아가고 있던 개인이 국가와의 갈등으로 인해 상흔을 입는 사례를 대표한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 내에 서 ‘관찰자’로 머물러 있던 튀르머를 본격적인 ‘주체적 참여자’로 변화시 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국가적, 사회적 사건이 개인의 삶으로 투영 되는 순간 이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가 되며 개인의 삶 을 위협하는 요소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 다.
공감은 과정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작용이다.259) 상대방의 상황과 정서 를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 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아담과 에블린』은 아담과 에블린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두 인물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의 단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아담은 동독 사회에서 전혀 부족함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아왔 기 때문에 서방세계에 대한 기대감이나 호기심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담과 달리 동독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원 한 것이 아닌 당에서 정해준 대로 종업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에블 린은 동독을 떠나 서독에서의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 결국 아담은 계속 해서 동독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에블린에 대한 사랑으로 에블린의 선 259) Vgl. Wolfgang Friedlmeier und Gisela Trommsdorff: a.a.O., S.145.
택을 존중하여 함께 서독에서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서독에 서 대학 공부를 시작하며 생기 넘치는 모습의 에블린과 달리 아담은 마 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사회에서 부유하는 존재로 추락한다. 기젤 라 아주머니가 아담에게 재단 강의를 소개해 주기도 했으나 아담은 고객 의 입맛에 맞춰 주는 것이 아니라 동독에서 그랬듯 창조주의 역할을 고 집하며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 태도로 일자리와 기젤라의 호감 모두를 잃고 만다. 에블린은 그건 아담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카탸에게 토 로한다.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을 구매하는 여기 사람들은 맞춤 재단사가 필요 없나 봐. 기젤라조차도 아담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질 않아, 무보수로, 말하자면 방세 대신 해준대도 싫대. 왜 이곳의 여자들은 자신들한테 정말로 딱 맞는 옷을 원하지 않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옷을 말이 야. 아담 말로는 이곳의 여자들은 맞춤옷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감 각을 잃어버려서 그런 거래. 광고를 내도 아무 연락도 없어.”260)
에블린은 카탸에게 아담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담을 격려하며 서독의 사람들은 왜 맞춤복을 입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리고 이 의문 속에는 아담의 실력에 대한 인정과 자부심이 내포되어 나 타난다. 아담의 실력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이 뛰어났지만 서독의 사회와 시대의 흐름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에블린은 안타까움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아담이 서독에서의 삶에 녹아 들기를 바라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너처럼 맞춤 재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정도로 재단을 할 수 있는데 다가 그런 아이디어들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냥 놔두겠 어? 비록 네가 일단은 보조 역할을 하더라도, 일 년, 혹은 이 년 정도 기간 동안,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아. 그때 너는 사업 기술들을 살펴보고, 그러고 260) AE: 273쪽. ☞
나서 고객의 절반을 차지해 오는 거지. 너에게 한 번이라도 왔던 사람은 더 이상 어느 곳으로도 가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너도 잘 알잖아.
믿음, 사랑, 희망, 그런 건 여기 어딘가에 존재해. 사랑, 그건 우리에게 있 고, 너에 대한 믿음도 있고, 너에게는 그저 희망만 빠져 있는 거야. 오로지 희망만. 하지만 당신에게는 내가 있잖아. 내가 바로 희망이야.”261)
에블린은 사실 아담이 과거 동독에서처럼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인정 받으며 서쪽에서도 사회적 지위를 누릴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이미 서독은 개인의 ‘몸’에 맞춘 옷보다는 옷이 갖는 브랜드적 가치가 더 높이 평가받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아담이 가진 재단사로서의 재능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가 가진 재능을 인정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에게 계속해서 포기하지 말고, 허드 렛일이라도 하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에블린과 카탸는 아담을 걱정하 는 마음에 그가 가진 재능이 언젠가는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하지만 아담 또한 서독에서의 분위기를 파악하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점 점 더 예민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아담이 시작하기만 하면.”이라고 카탸가 말했다.
“정말로 네가 일을 시작만 하면, 두 사람은 어디서든지 살 수 있어. 거의 어디에서든 말야.”
“그런 말 좀 하지마! 내가 도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 거지? 여긴 아주 다르게 돌아가. 완전히 다르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야, 그걸 모르겠어?”262)
아담은 자신 또한 얼마 전까지는 서독에서도 재단사로서 자신의 가치 를 인정받으며 일을 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 으나 이제는 완전히 낙담한 상태임을 대화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그러 261) AE: 267쪽. ☞
262) AE: 304-305쪽. ☞
면서 모두가 무채색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살아가는 서독 사회의 모습을 비난한다. 아담은 점점 더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채 부유한다. 설상가상으 로 장벽이 붕괴된 후 찾아간 그의 집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훼 손된 상태였고 마치 아담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해낸 것 같은 인상을 준 다. 갈기갈기 찢어진 아담의 사진들을 보며 아담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 에블린은 찢어진 사진을 모두 가져와 손수 조 각을 이어붙이며 원상복구 하기 위해 애를 쓴다.
“네가 이것들을 앨범 안에 잘 넣으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거야.”
“난 그렇게 하고 있어, 그의 모든 창작물들이 담긴 앨범, 적어도 어느 정도 는 쓸 수 있어. 아담이 지원을 할 때 이 앨범을 제출할 수 있을 거야.”263)
에블린과 아담은 이별과 재회의 과정을 거쳐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 랑을 깨닫고 관계를 회복한다. 아담이 자신을 좇아 ‘파라다이스’라고 여 기던 동독에서의 생활을 버린 채 함께 와준 것에 대해 에블린은 진심으 로 그의 사랑에 감동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에블린은 감정이입을 통해 연인들이 서로 다른 감정을 파악하면 화해하게 된다는 프레콥의 말처럼 아담에게 감정이입하여 그의 상황과 처지가 되어보고 그가 느낀 상실감 을 함께 느끼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 라 그를 위해 격려해주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자기 스스로의 태도를 전환시키기에 이른다. 그래서 에블린은 아담의 이전 작 품들을 찍은 사진을 복구하여 포트폴리오를 제작해주고 또 다른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모색한다.
“너는 나를 모델로 삼아서 다른 걸 만들 수 있을 거야. 내가 그것들을 다 입어보고, 당신의 모델이 될게. 모델을 보기만 해도 옷들이 잘 만들어질 거 야.”
“체형, 걸음걸이, 몸매에 따라서 다 좌지우지되는 걸….”
263) AE: 29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