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차이 인식의 단계
4.3.2.2 차이 수용과 다름 인식
한편 상대방과 나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고 여기에 대해 부정적인 감 정을 느끼거나 판단을 하며 갈등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그대 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상호 공감을 위한 기초적 관계를 형성하 는 예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아담과 에블린』에 등장하는 223) 이와 유사하게 박치범은 공감의 형성 관계가 항상 일정하게, 일정한 단계 를 거쳐 일정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주체이더라도 상 황 혹은 대상에 따라서 감정 전염을 경험할 수도 있고, 뒤따라 느낌을 경험 할 수도 있으며, 공감에 이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박치범: 앞의 논문, 36 쪽.)
아담과 미하엘, 그리고 『새로운 인생들』에 등장하는 왕세자와 신문사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확인해본다.
작품 『아담과 에블린』에 등장하는 동독 출신의 남성 아담과 서독 출신의 남성 미하엘은 에블린을 사이에 둔 연적 관계이다. 이들은 살아 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서독 과 동독의 문화 및 체제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이들의 대화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난 무엇보다도 에비한테 대학생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어.”
“우리 쪽에 오면 아담 너도 대학에 다닐 수 있고 무제한으로 공부할 수 있 어.”
“제한 없이?”
“몇몇 사람들은 십 년 혹은 그 이상 대학을 다니기도 해.”224)
아담은 에블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서 직업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에블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아담은 그녀에게 공 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미하엘은 자신들 쪽, 서 독으로 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학업을 할 수 있고, 아담 역시도 원한다 면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며 서독에서의 이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학과 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예술사는 돈이 안 되는 학문이지.”
“어째서? 예술사학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적게 벌지는 않아.”
“너희 쪽에서는 그렇겠지만, 어쨌든 거기서도 일자리가 필요하잖아.”
“우선 대학에서 자리가 나면 그 후엔 일자리도 나. 대학이 그에 대한 책임 도 져야 하거든.”
“왜 대학이 그래야해?”
224) AE: 170쪽. ☞
“네가 스스로 일자리를 찾는 게 더 좋긴 하지. 하지만 아무 일자리도 못 구하면 대학이 직업을 구해 주든가 아니면 그 학생을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해.”
“참 희한하네.”225)
아담과 미하엘은 우리 쪽, 그 쪽 이라고 칭하며 서로 살고 있는 동독 과 서독의 사회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각자가 살아온 사회 체제 속에서의 방식 및 자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편협한 사고방식이 나타난다. 여기서 편협성은 ‘차이에 대한 존중의 결핍’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실천이나 신념들을 포함하며 차별의 출발점이 된다.226) 그러나 자 신들의 편협한 시각을 기준으로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동독을 대표하는 아담과 서독을 대표하는 미하엘이 대화에 응하는 태도는 차이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며 향후 공감하 는 관계로 개선될 여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하엘은 동독에서는 국가가 일자리를 정해준다는 말에 ‘괴상한 제도’
라고 말할 뿐 거기서 살고 있는 아담이나 에블린을 이상하다고 말하진 않는다. 아담 역시도 이상하다고 말하는 미하엘에게 자신과 자신이 살아 온 사회에 대한 무시나 비하로 느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 야기를 그저 듣고 자신이 살던 사회를 성찰적으로 생각해보는 태도를 보 인다. 이들의 모습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는 과정은 상대 방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며 감정이입의 과정을 경 험하고 의사소통하며 서로 이야기하는 방법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알 게 한다.227)
브라이트하우프트에 따르면 우리가 사람들의 집단 대화를 관찰할 때, 225) AE: 170쪽. ☞
226) 민춘기, 김순임: 앞의 논문, 75쪽 참조.
227) Vgl. Jirina Prekop: Einfühlung oder die Intelligenz des Herzens. München 2002, S.152.
우리의 “공감적 주의 empathische Aufmerksamkeit”는 종종 한 사람에게 서 다른 사람으로 빠르게 이동한다고 한다.228) 이는 잉고 슐체가 작품을 서술하는 방식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새로운 인생들』 말 미에 등장한 왕세자는 신문사 사람들과 둘러 앉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 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은 왕세자 앞에서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자신 들의 지나온 삶을 털어놓고 왕세자는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 하는 자세를 보인다. 곁에 있는 신문사 사람들 역시 같은 동독에서 살아 온 주민들이고 함께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였으나 처음 듣는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들에 놀라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기도 하며 공감하 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 왕세자를 가운데 두고 한 사람 한사람씩 번갈 아 가며 이야기하는 서술 구조는 왕세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작품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독자들 역시 함께 공감적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한다.
신문사 직원들은 왕세자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명씩 털어놓는다.
모나 Mona는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을 다시 아쉬워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런 세상은 싫다고 말한다. 복숭아나 피망 같은 간단한 식료품마저도 긴 줄을 서서 사야 했던 과거의 시간들이 이제는 까마득히 옛일처럼 느 껴지게 됐으며, 물질적으로 풍족한 지금의 삶에 만족스러움을 표현한다 는 모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 역시 동조한다. 프링겔 Pringel은 자신이 동 독 시절 통일사회당에 있었으며 그 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털어놓고는 과거의 일에 대해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왕세자는 누 군가 말을 할 때마다 매번 가능한 한 그 사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휠체어를 움직이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 다. 반면 동독 사람들은 한숨을 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또는 서로 시선 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듣는 데,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상대방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상호 공감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의 태도가 어색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고백하는 과오가 228) Fritz Breithaupt: a.a.O., S.9.
자신들의 이전 삶 어느 한 부분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는 경험이기 때문에 섣불리 동조를 하거나 비판을 하는 등 어떤 한쪽의 행동을 결정 할 수 없었던 것으로도 해석된다.
모리스 스탠리 프리드만 Maurice Stanley Friedman은 다른 사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로 신뢰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직관적인 이해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229) 왕세자는 타인에 대한 개방성 있는 태 도로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인물로 프리드만의 이론에 따르면 이해력이 높은 인물로 평가된다. 왕세자는 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마치 아름다운 향기를 맡는 것처럼”(NL: 615) 사람들의 이 야기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사연에 공감을 표현하며 가치를 부여한 다. 이러한 왕세자의 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이 끌어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다시금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 생성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