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차이 인식의 단계
4.3.2.1 차이로 인한 갈등 관계의 형성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낯섦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는 낯선 누군가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낯선 사람으 로 대하고 낯선 것으로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때에는 다름에 대한 차 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차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가치판단을 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때 가장 먼저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언어’의 차이이다. 이는 대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 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나와 상대방이 ‘다르다’라는 인식을 만든다. 이보 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차원에서의 차이는 바로 ‘사회 및 문화체제’의 차 이이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함께 어우러 져 생활하다 보면 나타나는 사회 및 문화체제의 차이는 즉각적으로 알기 는 어렵고 그 사람의 행동방식, 사고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 에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차이를 수용하는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며 ‘가치관’의 차이 역시 타자와의 공감을 방 해하는 요소로 나타난다.
1) 언어차이: 『새로운 인생들』의 캐시 사건
독일 전환기시기에 동독인과 서독인은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과정에서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서독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외래어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들이 동독 사람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기 때 문이다.
슐체의 작품 『새로운 인생들』에서는 언어 차이로 인한 갈등 상황이 드러난다. 신문사의 운영자인 게오르크와 요르크, 그리고 튀르머와 미하 엘라는 신문사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투자금을 받기 위해 서독의 사업 가인 얀 스텐을 만나러 간다. 스텐은 알텐부르크 신문사에 전면 광고를 게재하기로 하고 2만 마르크를 선금으로 제시하며 튀르머를 비롯한 일행 들에게 ‘캐시’가 좋을지, ‘수표’가 좋을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호기롭게 큰 금액을 제시하며 베포 큰 사업가의 모습을 과시하는 얀 스텐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서독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 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동독 태생인 튀르머, 게오르크, 요르크 그 리고 미하엘라 모두 ‘캐시’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캐시!” 스텐이 결정을 내렸고, 유리잔을 움켜잡았지만,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자 주춤거렸어.
“현금”, 볼프강이 말하면서 이번엔 그가 잔을 들었어. “캐시가 현금이란 말 입니다.”
정적이 흘렀지. 요르크는 현금이 좋겠다고, 매우 좋다고 말했어. 그때 스텐 이 몸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입을 벌리며 웃음을 터뜨렸어. 벽이 쩌렁쩌렁 울리는, 내가 생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웃음이었어. “캐시”
스텐은 킥킥거리며 웃었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다시 웃음을 터뜨리 며 헐떡거렸어. 그러다 숨이 막힌 듯 기침을 했지. “혀어어언금!”.209)
스텐의 비서인 볼프강 Wolfgang이 캐시란 현금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중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캐시를 알아듣지 못하는 동독인들을 무식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스텐의 모습은 독일 사회가 통합되는 과 정에서 동독인과 서독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의 차이 때문에 갈등 을 겪게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어대는 스텐을 보고 튀르머는 다소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스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일행들 역시 2만 마르크를 209) NL: 43쪽. ☞
받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단순히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서로 존중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상 대방을 비하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드는 등 갈등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2) 사회 체제와 문화의 차이
분단되어 살아온 기간 동안 동독 주민들은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서 독 주민들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맞춰 생활해 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인하는 차이점은 명백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회 제도로 인한 차이에 속한다. 동독 주민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살아온 생활 방식과는 다르게 자본주의 체제에 맞춰 모든 생활 체계를 바꿔야 했고, 가차 없는
‘현대화의 압력’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몰라서 방황하게 된다.
또한 생전 처음 접해보는 자본주의 사회의 규칙을 접하면서 당황하는 모 습을 보이기도 한다.210) 물건을 사고파는 개념이 없었던 동독인들은 필 요한 물건을 가져가라는 시청 공무원 글래슬레 Glasle의 제안에 아무 생 각 없이 마치 ‘노략질’ 하듯이 물건들을 주워 담기 시작한다.
난 때때로 생각했어, 아직도 서독이 있다고. 반복되는 이 몽상과 오래된 반 사작용이라니. 글래슬레와 같은 사람들은 [...] 우리를 야만족 정도로 생각 할거야.211)
그들은 물건의 비용을 응당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들 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 담는 다. 동독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를 아직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였을 210) Manuela Glaab: Doppelte Identitäten? Zum Orientierungsdilemma im vereinten Deutschland. In: Revue d’Allemagne et des pays de langue allemande, 28, 1996, S.417(417-422).
211) NL: 36쪽. ☞
뿐만 아니라 장벽이 붕괴된 이후 서독에서 주는 환영금과 선물에 익숙해 져서 당연히 그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 다. 이내 비용을 할인가로 계산해주겠다는 글래슬레의 말을 듣고 나서야 튀르머와 일행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린 먼저 문명화 되어야만 해. 우리는 성격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문제였던 거 같아.212)
이 에피소드를 두고 튀르머는 서독인과 동독인이 여전히 의식상태를 기준으로 볼 때 둘로 나뉜 상태인 듯하다고 자각하게 되며, 서독인들이 자신들을 ‘야만적인 오랑캐’로 보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조한다. 이는 동 독인들이 시장경제의 규칙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서로 살 아온 체제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후 서독인과 비교하 면서 자신들의 태도에서 고쳐야 할 점이 무엇이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를 스스로 생각해보고 판단하는 튀르머의 모습은 동독인들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차이를 발견하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적 태도를 습득해갔음 을 보여준다.
3) 선입견과 편견
동독인과 서독인의 갈등은 신문사 대 신문사 간의 자존심을 사이에 둔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는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에서 기인한다. 서독의 기센 신문사는 지속적으로 알텐부르크에 관 심을 보이며 눈독을 들이는데, 이들은 알텐부르크 신문사 사람들을 대할 때 동독은 서독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하대의 태도를 보인다. 이 는 동독의 기술과 인적 자원의 전문성이 당연히 서독의 것보다 수준이 낮다는 선입견과 편견에서 기인한다. 기센 신문사와의 첫 만남은 알텐부 212) NL: 37쪽. ☞
르크 신문사 설립 초기에 이루어졌다. 튀르머와 신문사 사람들이 창간호 를 준비하고 있을 시점에 기센 신문사의 사람들이 사무실에 찾아온다.
그들은 마치 박물관에 관람 온 관람객 마냥 호기심과 놀라옴이 가득 담 긴 시선으로 이것저것을 구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납으로 된 활자판이라니!! 당신들은 활자판을 가지고 작업을 하나요?! [...]
너희들은 이게 뭔지도 전혀 모를 거야.”213)
그들은 허름하고 열악한 시설들을 살펴보면서 감탄 아닌 감탄을 하는 데, 여기에는 뒤쳐져 있는 동독의 상황과 기술 등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서독인의 태도가 담겨 있다. 영업 실장의 과장된 감탄은 마치 구시대의 유물을 발견한 듯 놀라움을 표현함으로써 서독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동 독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이 너무 낡고 오래된 것들인데다가 그런 뒤쳐진 물건으로 신문을 제작하는 동독인들 역시 무능력한 비전문가라고 비아냥대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몇 달 후 다시 찾아온 기센 신문사의 영 업실장은 튀르머와 게오르크에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서 알텐부르크 신문사를 인수할 의사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는 마치 기 센 신문사가 알텐부르크 신문사에게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처 럼 좋게 포장하여 제안을 하면서도 “생각할 시간이 넉넉지 않다.”(NL:
297)며 당장 내일 아침 9시 회의에서 이 사안을 다루기 위해 빨리 결정 하라고 재촉한다. 이는 돈만 주면 당연히 신문사를 넘길 것이라고 안일 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튀르머와 요르크를 진짜로 함께 일할 동등한 파트 너가 아니라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고 무시해도 괜찮은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업무실장의 태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신문의 기사는 누가 쓰냐는 요르크의 질문에 기센 신문사의 업무실장 은 튀르머와 요르크의 손에 달린 거라고 말하면서도 실력을 입증할 기회 를 기다리고 있는 “젊고, 성실하고, 우수한 교육을 받은 청년들”(NL:
213) SS: 95-9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