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행사도는 국가와 왕실의 경축할만한 행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기록화를 말한다. 궁중 행사도의 제작 연원은 15세기부터 관료사회에 만연하였던 관청의 계(契)와 계회(契會)를 기념하여 제 작된 기념화, 즉 계회도(契會圖)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자신이 소속된 관청을 중심 으로 동료들끼리 결계(結契)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결속력과 자부심을 키워나갔다. 계회도의 제 작은 동료애와 소속감을 발현함과 동시에 행사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조 선시대 관료사회의 독특한 산물이 된 계회도 제작은 국가의 특정한 행사를 마치고 난 뒤 여기에 참 여한 관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경로로 궁중행사도를 만들어 나누어 갖게 되었다. 궁중행사 도는 의궤도처럼 국가에서 주도하여 제작되고 국가에서 보관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 아니라 관료들의 자발적인 발의와 주관 아래 개인이 물력(物力)을 부담하여 개인의 집에 소장하였던 그림이다. 궁중 행사도가 관료들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궁중행사도의 양식과 성격을 형성하는 데 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사실이다.
Ⅲ. 16-18세기 궁중연향도
궁중의 연향은 행사도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로서 현전하는 행사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작품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궁중연향도(宮中宴 享圖) 한 종류만 가지고도 조선시대 궁중행사도의 시대에 따른 변화과정을 짚어보는 것이 가능할 정 도이다. 궁중연향은오례(五禮)의 분류 중에서 가례(嘉禮)에 해당되므로 기념화로서 가장 많이 채택된 주제였다.
궁중연향은 설행 목적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에 의례절차가 정해진 예 연(禮宴)과 그렇지 않은 비공식적인 연향이 있다. 전자는 규모에 따라 진풍정(進豊呈),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그리고 양로연(養老宴)으로 구분되며 후자에는 친림사연(親臨賜宴), 소작(小 酌), 곡연(曲宴) 등의 이름으로 설행되는 작은 연향이 포함된다.
현재 알려진 궁중연행도 중에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은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 圖)>이다. 1535년(중종 30) 경복궁에서 중종이 당시 왕세자이던 인종을 교육시켰던 세자시강원(世子 侍講院)의 서연관(書筵官)들에게 내린 사연을 그린 것이다. 의령남씨 집안에 가전되었던 행사도를 18 세기 후반 후손이 장첩한 ≪의령남씨가전화첩(宜寧南氏家傳畵帖)≫에 수록되어 있던 그림이다.
<서총대친림사연도(瑞葱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19일 명종이 창덕궁 서총대에서 문 무 재상(宰相0들에게 글짓기와 활쏘기를 시험하고 연회를 내렸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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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완성되었는데 사연에 참석한 80명이 넘는 많은 신하들이 하나씩 나누어 갖기 위해서는 4년이 라는 긴 시간이 소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와 <서총대친림사연도>는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궁중행사도가 매우 드믄 상황에서 16세기 궁중행사도의 특징을 말해주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크다. 왕이 그려지지 않는 점, 좌우대칭의 화면 구성, 부감시의 사용, 여러 시점의 혼용 같 은 특징들이 16세기에 이미 확립되어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의 궁중연향도는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와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제 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 속의 연향도가 대표적이다. <숭정전진연도>는 1710년(숙종 36) 숙종의 환 후가 회복되고 성수가 50세 됨을 기념하여 숭정전에서 열린 진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화축(畵軸)에 그려졌는데 계축(契軸)의 전통이 계첩(契帖)과 계병(契屛)에 밀려 사라지지 않고 18세 기까지 오래 계속되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 궁중행사도에서 특별한 주제 중의 하나가 기로소(耆老所) 관련의 연향도이다. 기로소는 국가의 원로정치인을 우대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기관이다. 나이 70세, 정2품 이상 되는 자만이 가입 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므로 기로신(耆老臣)이 된다는 것은 관료로서 매우 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기로소에 들어간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4명의 왕이다. 태조의 입기로 소(入耆老所)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에 고사(故事)으로만 전했지만 숙종은 입기로소를 단행하고 계첩 형식으로 행사도를 남겼다. 영조는 이 고사를 충실히 계술하였으며 고종은 입기로소 후에 10첩의 병 풍그림을 남겼다.
숙종대의 <기사계첩(耆社契帖)>과 영조대의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에는 연향 장면이 두 장면씩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기로신들과 함께 양로연의 형식을 빌어 베푼 친림기로연(親臨耆老宴)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이 기로신들에게 내린 기로소 사연(賜宴)을 그린 것이다.
숙종이 1719년 59세 때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기사계첩>은 영조와 고종이 기로 소에 들어간 기념화를 제작할 때 하나의 기준작이 되었다. 숙종의 <기사계첩>은 총 12건이 제작되어 기로소에 1건 보관되고 11명의 기로신에게 분상되었다. 숙종의 <기사계첩>은 그림의 수준이 우수할 뿐만아니라 궁중행사도의 제작 화원이 누구인지 명료하게 밝혀져 있어 주목된다. 숙종의 <기사계첩>
은 예외적으로 계첩의 마지막에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박동보(朴東普), 장득만(張得萬), 허숙(許俶)이라는 제작 화원의 명단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모두 어용도사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당시 최고의 인물화 및 초상화가였다.
영조의 <기사경회첩>은 1744년 영조가 51세 되던 해에 숙종의 고사에 따라 기로소에 들어갔던 사 실을 기념하여 제작된 계첩이다. 제작 화원은 장득만, 장경주(張敬周), 정홍래(鄭弘來), 조창희(趙昌 禧) 등이며 내용과 형식은 숙종 때의 <기사계첩>과 매우 유사하다.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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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화성능행도병>과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은 1795년(정조 19) 윤2월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부 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顯隆園(顯隆園)에 참배하고 華城(華城)에서 모친에게 進饌(進饌)한 사실을 그 린 8첩의 병풍이다. 이 병풍은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득 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의 8장면으 로 구성되어 있으며 같은 제목의 그림이 의궤에도 목판화로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봉수당진찬도>는 19세기 궁중연향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낙남헌양로연도>는 조선시대 친림양로연을 그린 그림으 로서 유일하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는 <화성능행도병>의 제작배경과 내용을 상세하게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관련 문헌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는 체제와 의궤도의 형식면에서 기존의 의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며 19세기에 궁중연향도 병풍이 유행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병풍과 의궤의 그림을 실제로 그린 화원은 최득현(崔得賢),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이명규(李 命奎)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윤석근(尹碩根), 허식(許寔, 1762-?), 이인문(李寅文, 1745-1821) 등이며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는 감독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능행도병>
은 그림의 내용을 살리는 다양한 구도, 장대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효과적인 공간구성, 사실에 기반 을 둔 정확한 묘사와 치밀한 필치, 원근법 등 서양화법의 반영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궁중행사 도의 대표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Ⅴ. 19-20세기의 궁중연향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진연과 진찬을 그린 병풍이 8종이나 남아 있다. 1795년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봉수당 진찬 이후 처음 설행된 공식적인 궁중 예연은 1809년 혜경궁 홍씨가 관례(冠 禮)를 치른 지 60주년이 된 것을 경하하는 진찬이다. 이 진찬의 준비과정에서 순조는 모든 의절을 1795년의 예에 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후 궁중연향은 전례(前例)를 따르는 상고정신에 입각하여 1795년의 을묘년진찬이 기준이 되었다. 여기에 19세기에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장수하여 이들에 대 한 진찬이 빈번하게 설행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19세기에 진찬, 진연과 관련된 많은 의궤와 연 향도병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19세기의 궁중연향은 설행 내용면에서 18세기의 진연과 많이 달랐는데, 순조 재위기간 중 대리청 정을 한 효명세자(익종, 1809-1830)가 야연(夜宴)과 翌日會酌(翌日會酌)이라는 18세기에는 없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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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신설한 것이 큰 요인이 되었다. 한편 효명세자는 새로운 궁중 정재(呈才)를 창안하여 연향을 매우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은 19세기 궁중연향도병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이는 1848년(헌 종 14) 3월 대왕대비(순원왕후 김씨)의 육순과 왕대비(신정왕후 조씨)의 망오(41세)가 된 것을 기념 하여 헌종이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올린 진찬례를 그린 8첩 병풍이다. 여기에 관한 의궤가 바 로『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이다. <무신진찬도병>은 진하(陳賀), 내연(內宴), 야연(夜宴), 익일 회작(翌日會酌)의 4장면과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궁중연향도병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이 후 제작된 연향도병은 대한제국기까지 모두 이 형식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