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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의 일본 활동작품 분석 1. 김명국의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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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의 병자․계미통신사행 활동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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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살펴보자.

임진왜란의 발발 이전,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8-1573)에 선화와 그 배경을 이룬 선종 사상은 유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모든 예술 분야에 자극제가 되었다. 무로마치시 대는 기타야마(北山, 1392-1467) 문화시대와 히가시야마(東山, 1467-1573) 문화시대로 나눌 수 있 다. 전자는 전통 귀족문화와 새로운 선종문화의 결합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선종문화가 지 방에까지 널리 퍼지고 지방의 다이묘들의 세력이 커져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되었던 시기였다.

선종문화의 확산으로 미술에서도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 수묵화 화풍의 선화가 크게 성행했으며 선 사들이 직접 그림을 많이 그렸다. 선화는 자연의 단순함을 통해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형상을 갖추 고 있었으며, 새로움을 추구하던 승려들에 의해 유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 선화를 남긴 대표적인 일본 화가는 셋슈 도요(雪舟等楊, 1420-1506)이다.50) 그런데 셋슈의 작품과 같이 엄숙하고 기괴한 느낌을 강조하여 도상의 神性을 고취시킨 선화에 익숙해 있던 일본인들에게, 김명국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강경하면서도 자연스럽고 대담한 필치는 강렬한 인상 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그려내는 속도감 넘치는 단순한 필치의 선화는 선종이 갑작스런 깨달 음, 곧 頓悟論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연계되어 선종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 을 것이다.51) 물론 이 당시 일본의 민간신앙에서 달마나 포대화상이 시치후쿠진(七福神)과 같은 의 미로 받아들여졌다는 측면까지고려해보면 일반 민중에게 이르기까지 김명국의 선화, 그중에서도 달 마도가 그렇게 요구가 많이 되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2)

Ⅲ. 김명국의 일본 활동작품 분석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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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雪舟等楊, [慧可斷臂圖], 紙本淡彩, 112.8×183.8cm, 1496, 日本

愛知縣 齊年寺所藏

취옹은 ‘취한 늙은이’의 뜻을 담고 있다. 취옹의 호를 쓴 1643년, 스스로 늙은이라는 표현 한 김명국은 당시 몇 살이었을 까? 김명국의 정확한 생몰년은 밝혀진 바가 없다.54) 그의 인물 전을 썼던 鄭來僑(1681-1757)는『浣巖集』에서 그의 태생과 내 력을 알 수 없다고 했다.55) 다만, 1661년《孝宗祔廟都監儀軌》

와 《顯宗明聖后中宮殿受冊時冊禮都監儀軌》에 차출되어 두 차 례의 의궤제작에 참여하였으며,56) 왕성한 활동으로 생존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해인 1662년 『倭人求請謄錄』3월 13일조 기록을 보면, 일본 측에서 다시 김명국을 통신사 일원으 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확인된다.

그러나 동래부사의 보고는 “김명국이 연로하고 병이 있어 내려올 수 없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57) 이런 정황으로 김 명국의 졸년이 1662년 이후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宋子大 全』기록에서 김명국의 재미난 기록이 보인다.

“화원 김명국으로서 아비가 죽어 장사도 하기 전에 아내를 맞 이한 자이니, 모름지기 이를 근거로 탐문해서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나하나 다 말하지 못하네.”58)

위 기록은 1659년 兪武仲(호는 市南, 시호는 文忠)에게 보낸 편지이다. 1662년 “김명국이 연로하

54) 김명국의 생몰년 기록은 『槿域書畵徵』에 전하지 않으나, 『서울六百年史』〈人物篇〉(서울市使編纂委員會, 1993), 174-175쪽과 류복렬, 『韓國繪畫大觀』(문교원, 1974), 245쪽에 의하면 1600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두고 洪善杓의 『朝鮮時代繪畫史論』(文藝出版社, 1999), 383쪽에 의하면, 劉復烈의 『韓國繪畫大觀』(문교원, 1969)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김영진의 「(한국회화사 신자료②) 海巖 柳慶種의 破寂 에 실린 조선 회화사 자료」(『문헌과 해석』, 2008.1.4.) 발표문에 의하면 김명국이 수로조천사행(수로조천은 1620-1636까지 17년간 만 있었던 사행이다)에 수행원이 끼었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생년은 1600년즈음일 개연성은 농후하다.

55) 鄭來僑, 「浣巖集』〔〕「畫師金鳴國傳」, “畫師金鳴國者 仁祖時人也 不知其氏族所出 而自號蓮潭: 鄭來僑는 金明國의 이름을 金鳴國으로 기록하고 있다.

56) 朴廷蕙, 「儀軌를 통해서 본 朝鮮時代畵員」(美術史硏究, 1995), 221-243쪽의 <자료1>-奎章閣 소장 儀軌에 나타난 畵員명단.

57) 倭人求請謄錄』Ⅱ, (정경주 번역,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 2007), 104쪽, 1662년3월13일 기록: (東萊府使李元禎三 月初六日成貼狀啓:) “金明國段, 下送有弊, 以該曺所貿畵綃, 自此繪畵以送, 以爲便當, 尺量長廣及綵色與否, 使譯官詳問於 差倭, 處以爲依請起畵之地事, 關是白乎等用良.”

58) 宋子大全』卷三十三, 與兪武仲 己亥, “所謂中部悖常者, 甘土廛行廊後畫員金命國, 父死未葬而娶妻者也, 須使以此跟問, 而告于憲府, 如何, 不能一一.”

김명국의 병자․계미통신사행 활동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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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병이 있다”고 언급된 시기와는 불과 3년의 차이를 보인다. 1659년 아내를 맞이한 것으로 보아 당시 건강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명국의 【四季山水畵帖】은 1662년 작품 으로 당시 건강상 큰 문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59) 【四季山水畵帖】은 검은색 비단위에 泥金山 水로 사계절을 8폭에 담은 화첩 중 [初春], [晩春], [初夏], [晩夏]의 네 폭이다. 【四季山水畵帖】에 는 ‘壬寅秋 蓮潭’이란 관기가 적혀있는데 ‘임인추’는 1662년 가을이다.60)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의 卒記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중기 평균수명은 64.9세이다.61) 생몰년 기록이 전하는 안산 김 씨 인물은 김명국을 포함하여 총 6인이며, 김명국을 제외한 5인은 모두 70-80 세 까지 장수하였다.62) 이러한 면으로 보았을 때, 김명국의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대략 1600년 전후에 태어나 1662년 이후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 [達磨圖]

[蘆葉達磨圖] 의 작품분석

達磨는 남인도 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으나,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으 로 중국으로 건너가 520년경 梁나라에 들어 왔으나 전법의 뜻을 펴지 못하였고, 북위 嵩山 少林寺 로 건너가 수행하였다. 이후 禪法을 慧可에게 전수하여 선종의 1대 조사로 존숭되었다.

달마의 형상은 두건을 쓴 被巾형과 삭발한 승려 형으로 구분되지만, 서역 출신에 착안해 큰 눈과 높은 코를 지닌 이국적인 용모로 전형화되었다. 달마도의 형식은 달마대사의 전신 혹은 반신을 그린 달마 독존, 갈대 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蘆葉達磨, 벽을 바라보고 좌선하는 面壁達磨 등이 대표 적이다.63)

59) 1662년 김명국에 의해 제작된 【四季山水畵帖】은 87.8×61.2㎝크기의 검은 비단에 泥金한 산수도이다. 1662년 『倭人 求請謄錄』3월 13일조 기록을 보면, 일본 측에서 다시 김명국을 통신사 일원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확인된다. 당시 제 작중인 【四季山水畵帖】로 인해 일본 측 요청을 무산했을 가능성과 화원가문을 형성한 咸悌建(?-?)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60) 安輝濬, 『韓國繪畵史硏究』(시공사, 2000), 612쪽.

61) 金洪均(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 2010년, 민족의학신문 특별기고 7772호: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의 박성규, 이가은, 홍세 영 연구팀의 졸기(卒記)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사대부의 일생을 알아볼 수 있다. 생몰 연 대가 분명한 1,408명의 수명을 분석한 평균 수명은 64.7세로 오늘날 1977년의 통계 치와 일치된다. 100세 이상을 산 사 람도 2명이나 등장하며, 70세 이상을 산 사람도 517명에 달하여 36.7%에 달한다. 더구나 조선 초기에 61.9세였던 평균 수명이 중기에는 64.9세가 되고 말기에는 69.3세인데, 이는 지난 1987년의 69.8세의 통계와 비슷하여 꾸준하고도 다대 한 의학적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동의보감 東醫寶鑑>이 등장한 조선 중기 이후에 비약적 증가를 보이고 있어 그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62) 생몰년대가 남아 있는 안산 김 씨 족보 기록에서 발췌: 金景庸(1041-1125)은 84세, 金仁揆(?-1142: 대략 60년생으로 보 면 82세이다.), 金漑(1405-1484)는 79세, 金定卿( 1345-1419)은 74세, 金正連(1895-1968)은 73세까지 생존하였다.

63) 洪世泰, 『柳下集』13, 「題達摩面壁圖」: 壬戌使行 시 譯官 시인으로 일본에 이름을 알린 홍세태(1653-1725)가 달마 면 벽도에 제시를 남긴 기록이 있다.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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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자사행 [達磨圖]와 계미사행 [達磨圖]의 비교

圖2.[達磨圖]

3.[達磨圖]

<表1> [達磨圖]年度, 所藏處 및 規格

圖2 圖3

製作年度 1636年 1643年

國 籍 韓 國 日 本

所 藏 處 國立博物館 尼ケ崎市博物館準備委員會

規 格 83×57㎝ 84.4×37.8㎝

材 料 紙本水墨 紙本水墨

手 署 蓮潭 醉翁

[達磨圖](圖2)와 [達磨圖](圖3)는 각각 1636년 병자사행과 1643년 계미사행시 김명국에 의해 제작 된 작품이다. 그림주제인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 중국 선종의 初祖가 되었다. 달마는 중국으로 와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실천행인 선의 씨앗을 뿌린 祖師이기 때문에 선수행의 표상 이 되었다. 달마의 모습은 곧 선수행의 상징이었으며, 달마도는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그림이었다.64) 당시 일본의 달마화상은 예배용으로도 제작됐지만, 減筆法(형식적인 면을 극도로 생략한 동양화 기 법)의 수묵화는 주로 종교적 감상을 위해 그려졌다. 그리고 에도시대의 [달마도]는 주로 기이한 얼 굴에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다루어진 것이 특징이다.65)

64) 교양교재편찬위원회 저, 『선과 자아』(동국대학교출판부, 2002) 166쪽.

65) 洪善杓, 『Koreana Korean』제21권1호, 「김명국의 [달마도] 호쾌한 필치에 깃든 고매한 정신세계」(한국국제교류재단, 2007), A Quarterly on Korean Art&Culture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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