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정서 및 전통 화법과 조화
중국 본토에 서양미술의 진정한 전파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582년 예수회 선교사로 마카오에 이르렀고, 이후 예수회사 루지에리(Michele de Ruggieri, 羅明堅, 1543~1607)를 따라 廣東 肇慶에서 거주하면서 이름을 ‘利瑪竇(호 西泰)’로 개명하고 중국의 풍속을 적극 수용하면서 徐光啓, 李之藻 등 명나라 관료를 대상으로 서방의 자연과 학과 문화예술을 수단으로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마테오리치는 1601년(만력 29) 1월, 神宗의 허락으 로 북경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마테오리치는 天主圖像 1폭, 天主母圖像 2폭, 天主經 1본, 진주 를 상감한 십자가 1좌, <萬國圖志> 1冊, 자명시계 2架, 西洋琴을 신종에게 바쳤다. 천주모 도상 두 폭 중 1폭은 로마에서 가져온 고화로 성 루크(St. Luke)가 그린 聖母子像을 모사한 것이었고, 천주 상 1폭은 비교적 작았는데 당시 사람이 그린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聖像畵는 北京에 들어온 초기 서양화의 대표적 사례였다.
1605년 마테오리치는 宣武門 근처에 북경 전통 景敎의 건축양식을 토대로 예배당을 건립하였는 데, 중국 전통건축 양식을 이용하여 장식을 최소화하고 교당 위에 간단한 십자가 상징을 세우는 형 식을 취하였다.
북경 전교 초기 마테오리치가 취하였던 중국 전통과 융합하려는 노력은 천주당 내 성상화 제작에 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마테오리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受刑像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괴리된 소재로 관료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거부감을 갖는 점을 지적하며, 천주당 회화를 중국 전통신앙 의 送子觀音圖와 유사한 聖母子의 제재로 바꿔 서방 종교에 대한 감화를 유도하였다. 벽에는 성모가 예수를 안고 있는 도상을 걸었는데, 일본인 화가로 선교사가 된 倪雅谷(Jacques Neva, 1579-1638) 이 제작한 것으로 그 내부 성화는 그곳을 방문한 중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 천주당에 걸렸 던 도상 유형은 1606년에 徽州의 程大約이 마테오리치가 제공한 동판화를 모본으로 출판한, 程氏 墨苑 에 포함된 《寶像圖》중 제4폭 <聖母子像>에서 찾을 수 있다. 마테오리치는 북경 교당 내에 그림 외에도 지구의 ․ 혼천의 ․ 日晷儀 ․ 西洋琴 ․ 자명종 등을 배치하여 서학에 관심이 많은 중국 지 식인들의 참관을 유도하였다.
1601년 마테오리치가 북경에 들어와 천주당을 세운 이후, 1662년(강희 원년)에는 42개 전도소를 두고 敎會堂 160여 개를 건설하였으며, 교인 15만 명을 확보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고, 그에 따 른 漢譯西學書도 크게 증가하였다. 1593년 출판된 나달(Jerónimo Nadal, 1507-1580)의 복음고사를 모은 도상인 《Evangelicae Historiae Imagines》는 명말 중국에 전래된 가장 대표적인 종교 도상 서로,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에 의해 1637년 한역판 《天主降生出像經解》로 간행 되었다. 이는 예수의 일생을 153개 삽도에 넣어 편집한 것으로, 예수회 선교사가 가지고 들어온 유화
조선후기 연행을 통한 서양화법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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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대량복제 또는 중국의 목판 장인들이 개작하여 서적의 삽도로 인쇄하여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1640년 11월 아담 샬(Jea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은 독일의 바바리아 주군 이 기증한 천주성상 1점과 《天主降生事迹圖》를 한역하여 명나라 의종에게 바쳤다. 특히 1644년 북 경에서 조선의 소현세자를 만나 종교서적과 천문의기를 증정하여 주목되는 인물이다. 1645년 청나라 에서 아담 샬은 외국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欽天監正이 되어 숭정역서 에 기초한 시헌서 를 완성 하였는데, 이 달력은 1645년부터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다.
2. 바로크 양식의 본격적 도입
강희연간 북경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 대부분은 자연과학은 물론 지리 ․ 역법 ․ 회화에도 재능이 있어 청 궁정에 복무하였고, 천주당 벽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서구문물 수용에 관심이 높았 던 황제의 요구로 심지어는 평신도 화가까지 들어와 북경 궁정에서 활동하였다.
독일 선교사 베르비스트(Fernand Verviest, 南懷仁 1623-1688)는 1666년 아담 샬에 이어 두 번 째로 흠천감정이 되었고, 1673년에서 1681년 삼번의 난 때 화포를 주조하여 청조에 신의를 얻었다.
1673년 북경 관상대에 천문관측기계 설치하고, 강희영년역법 및 곤여도설 저술, <곤여전도> 제 작하였다. 1678년 전교 부흥을 위해 유럽 선교사에 공개장을 보내 중국에 오도록 권유하여 청나라 전교활동의 기초를 닦았다. 1687년 11월 서양선교사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 퐁타 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 1654-1707) 일행 5명이 강소성 영파에 도착하였다. 1692년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 걸린 강희제를 외국 선교 사가 치료해 준 것을 계기로 청나라 전역에 포교와 천주당의 증축도 허용하였다. 강희제는 1693년 부베를 다시 프랑스로 보내 유럽의 미술과 과학을 청조에 보급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학자와 미술가 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1699년 부베가 중국으로 돌아올 때, 예수회 선교사로 회화 ․ 조각 ․ 건축에 조예가 있었던 벨빌(Charles de Belleville, 衛嘉祿, 1657-1730)을 비롯하여 선교사는 아니지만, 프 레마르(Joseph Henri Marie de Prémare, 1666-1736), 파레닌(Dominique Parrenin, 1665-1741), 레지스(Jean-Baptiste Régis, 1663-1738)와 건축투시원근법을 적용한 화가 게라디니(Giovanni Gherardini, 1654-1725)를 포함한 10명과 동행하였다.
1703년(康熙 39) 벨빌은 부베, 제르비용과 함께 북경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거처할 천주당 北堂을 새로 지었고, 게라디니는 여기에 투시학을 적용하여 환상적인 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중국인들 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게라디니는 서양인 전업화가로서 7명의 중국 화가들에게 유화를 가르쳤 으며, 궁정 내의 畵學生에게 투시화법과 유화기법을 전수하여 중국인 徒弟를 양성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마테오 리파(Matteo Ripa, 馬國賢, 1682-1746)는 1711년 2월 7일 궁중화사로 임명되어 서양동판 화 기술을 중국에 전해준 첫 인물로 1711년 沈嵛가 그리고 1712년 朱圭가 새긴 궁정목판화 《御制避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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暑山庄三十六景詩圖》를 저본으로 하여 1713년 9월 銅版畵로 제작하여 강희제에게 바쳤다. 1711년부 터 1723년까지 12년 동안 궁정 회사에 복무하면서 청 내무부 소속 조판처에 西洋畵房을 설치하고,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郎世寧, 1688-1766) 등과 함께 중국인 油畵工 도제를 양성하 여 서양 유화를 궁정에 자리매김하였다.
강희연간 후반부터 중국 내 천주교 정책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福建省 주교였던 메그로(Charles Maigrot, 顔璫, 1652-1730)의 牧會書信을 시작으로 1704년(강희 43)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예 수회를 믿는 중국인들이 공자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과 天主를 ‘天’ 또는 ‘上帝’로 칭하는 것을 금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금령 7조가 발표되었고, 결국 1715년 유교 의례를 미신으로 규정하 기에 이르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격노하여 1706년 청 내부에서 발부한 印票를 소지하지 않은 선 교사를 모두 마카오로 추방하고, 1722년에는 중국에 거류하는 선교사들에게도 중국인 대상의 포교행 위를 엄금하였다.
천주교당 설립연도 선교사 위치 비고
南堂 1652 독일 예수회
아담 샬(湯若望, 1561-1666)
宣武門 근처 利瑪竇 예배당
옛터
프랑스 국적을 제외한 예수회사 거주 1775년 화재로 중건
방문사절:김창업, 이기지, 이의현, 이덕무, 홍대용, 박지원, 강세황, 서유문 外
東堂 1685
부글리오(Ludovicus Buglio, 利類思, 1606-1682) 마 갈 렌 스 ( G a b r i e l d e Magalhaens,安文思, 1609-1677)
東安門街 乾魚胡同 옆
포르투갈 예수회사 거주
1807년 동당 소실 및 파손 1884년 중건
방문사절:이기지, 홍대용
北堂 1703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비스델루(Claudusde Visdelou, 劉應 1665-1737)
황성 西華門과 西安門 근처
프랑스 선교사 거주, 1827년 파괴, 1864년 舊북당터 救世堂 설립 방문사절:이기지
西堂 1723
페드리니(Teodoricus Pedrini,德理格, 1670-1746)
西直門 내 대가 남쪽
나자로 수도회 선교사 페드리니(伊) 처소, 布敎聖部에 헌납 이후 독일신부 거주, 1811 년 파괴, 1867년 중건
俄羅斯館 성마리아 교당
1715 러시아 正敎會 北京傳敎士團 파견
옥하교 회동관 (구 고려관)
1727년 회동관(고려관), 아라사관 전용으로 사용, 1732년 성마리아교당 건립
방문사절: 김경선, 이항억 外
<표 1> 북경 천주당 위치 및 연혁
강희연간 청 조정은 중국에 영구적으로 남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曆法이나 지도, 회화 등 신문물과 관련한 궁중 내 문예활동은 더욱 장려하였다. 강희제에 의해 중국 내 각성에 파견된 서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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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제작해온 측량도는 1717년 《皇輿全覽圖》와 같은 중국 측량지도 제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강희말년부터 수차례에 걸친 천주교 정책 변화는 천주당의 건물 및 벽화 체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초기 전교 활동에서 천주당은 중국인들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었기 때문 에 중국적 정서와 전통 양식에 부합하는 送子觀音圖와 유사한 성모자상이 주를 이루었으나, 1722년 이후 중국인에 대한 천주교 금령이 강화되면서 천주당 벽화의 성격도 교리에 더욱 부합하는 내용과 서구적 양식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1720년(강희 59) 북경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南堂과 東堂이 파손되자 1721년 신성로마 황제 페 르디난트 3세(Ferdinand Ⅲ, 1578-1637)의 재정 지원으로 독일 선교사 프리델리(Xavier Ehrenbert Fridelli, 費隱, 1673-1743)가 남당과 동당을 중건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해 건축학에 조예가 깊은 프랑스 선교사 모기(Ferdinad-Bonaventura Moggi, 利博明, 1684-1761)가 북경에 들어오자 건축설 계를 감독하게 하여 십자형 基臺에 교당 내부는 열주를 세우고 궁륭형 천정을 올려 당시 유럽에서 성행하던 바로크 양식을 반영하였다. 바로크식 건축 장식의 특징은 화판 대신 투시학과 광학을 응용 하여 천정이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 1642-1709)의 건축투시 도법에 입각한 벽화 제작은 초자연적 장엄함을 느끼게 하였는데, 카스틸리오네는 제단을 비롯하여 동당의 각종 장식회화를 창작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인 카스틸리오네는 1715년 8월 예수회 포르투갈 전도부 소속으로 중국에 들 어와 그해 11월 북경에 이르러 1766년까지 그의 예술 생애를 북경에서 보냈다. 그는 낮에는 궁정에 서 황제의 명을 받들고, 밤에는 동당에서 寓居하였다. 카스틸리오네가 동당에 그린 通景油畵와 壁畵 는 모두 투시화법이 주가 된 서양화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그가 남당의 벽화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였 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30년(옹정 8) 북경에 재차 지진이 나면서 남당과 북당 두 천주당 역시 일부가 파손되었다. 이에 남당은 옹정제가 내린 銀 1천 냥으로 바로크식 건축 양식을 반영하여 중수하였는데, 궁중에서 활동 하던 카스틸리오네를 비롯한 그의 徒弟들이 참여하여 교당 내부 벽화도 복원하였을 것이다. 카스틸 리오네는 실제 1757년(건륭 22)에 南堂의 양벽 크기에 맞춰 서양투시도법을 적용한 線法畵 2점을 그렸는데, 그중 하나는 로마 콘스탄틴 大帝(Constantine the Great, 280-337) 凱旋圖이며, 다른 한 점은 대제가 십자가에 의지하여 승리하는 장면으로 남벽과 북벽에 있었다. 특히 1775년 제5차 중수 이후 카스틸리오네가 남당 전면을 투시화법을 적용하여 그린 작품이 전하여 그와 남당의 특별 한 인연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773년 로마교황청은 청조와 의례논쟁으로 초래된 천주교 분파 간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예수회를 해산시켰고, 중국 내 포교활동을 인계받은 나자로 수도회는 서양문화의 매개자로 소양을 갖추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달리 종교적 교리에 치우쳐 1846년 도광제의 해금칙령이 있을 때까지 중국 내에서 고립을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