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말기(약 1850-1910)에는 세도정치(世道政治)와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시대의 정치적 혼란, 열강의 침입과 위협, 일본에 의한 국권의 상실 등 격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19 세기 중반 예단(藝壇)의 리더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진경산수화를 낮게 평가하였으며 서
23) 이인문의 생애와 <강산무진도>의 회화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오주석,『이인문의 강산무진도』(신구문화사, 2006) 참조.
24) 파노라마식 산수화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는 Sherman E. Lee and Wen Fong, Streams and Mountains Without End: A Northern Sung Handscroll and It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Early Chinese Painting (Ascona, Switzerland: Artibus Asiae Publishers, 1955); Wen Fong, Summer Mountains: The Timeless Landscape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75) 참조.
25) 왕휘의 산수장권(山水長卷)에 대해서는 Wen C. Fong, Chin-Sung Chang, and Maxwell K. Hearn,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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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바탕으로 한 남종문인화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청대(淸代) 문 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고증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화단을 남종화 지상주의적, 모화(慕 華)적인 것으로 이끌었다. 김정희의 지나친 중국적 화풍에 대한 경도(傾倒)는 결국에는 한국적인 화 풍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그의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 우월주의적 태도는 <세한도(歲寒圖)>(1844년, 개인 소장, 도 30)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 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에 역관으로 저명했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으로부터 귀 한 중국의 서책(書冊)을 선물로 받은 후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김정희는 갈필(渴筆)을 사용하 여 텅 빈 초가와 주변의 송백(松柏) 나무들을 매우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단순한 구성, 주변 배경의 대담한 생략, 정제된 서예적 필법, 차갑고 적막한 화면 분위기는 김정희가 추구했던 남종문인화의 세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26) 그 동안 <세한도>에 대해서는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생활과 관련하여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고매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세한도>는 근본적으로 원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였던 예찬 (倪瓚, 1301-1374)의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한도>에 보이는 텅 빈 초가와 주변의 키 큰 나 무들, 황량하고 적막한 화면 분위기 등은 예찬의 <용슬재도(容膝齋圖)>(1372년, 대만 국립고궁박물 원, 도 31)와 같은 작품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찬 양식은 명대 이후 많은 문인화가들이 추 종하였으며 화보를 통해 조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예찬의 산수화는 단순한 구성 때문에 문인화 가들이 쉽게 방작(倣作)할 수 있었다.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와 같은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창의적 인 서예가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화가로서의 재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현전하는 김정희의 작품은
<세한도>를 포함하여 거의 예외 없이 단순한 구성을 지닌 매우 평범한 예찬 스타일의 산수화이다.
따라서 <세한도>에 대한 과대해석보다는 화가로서 김정희의 능력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연구가 필 요하다.
김정희의 예찬에 대한 존경은 이후 전기(田琦, 1825-1854)와 허련(許鍊, 1809-1892) 등 김정희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전기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1849년, 국립중앙박물관, 도 32)에 보 이는 텅 빈 정자들과 키 큰 두 그루의 나무들은 이 그림이 철저하게 예찬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 을 알려준다. 한편 진도(珍島) 출신의 지방화가인 허련은 김정희의 각별한 배려 속에 남종화의 대가 로 성장하였다. 허련은 예찬 및 황공망(黃公望, 1269-1354) 계열의 구도와 거칠고 소박한 느낌의 갈필법(渴筆法), 담청(淡靑)의 설채법(設彩法)을 즐겨 사용하였다. 허련의 <죽수계정도(竹樹溪亭圖)>
(서울대학교박물관)는 전경에 키 큰 나무들, 중경에 대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텅 빈 정자, 원경에
26) 김정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국립중앙박물관 편, 『추사 김정희-학예 일치의 경지』(국립중앙박물관, 2006) 참조. <세 한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박철상, 세한도-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문학동네,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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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의 산 등 전형적인 예찬의 산수화풍을 보여준다.27) 김정희가 주창한 남종문인화 지상주의와 예찬식 산수화의 존숭은 허련과 그의 아들 허형(許瀅, 1862-1938), 손자 허건(許楗, 1907-1987), 친족인 허백련(許百鍊, 1891-1977)으로 이어졌다. 중인 출신의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김정희 에게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전기, 허련과는 달리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조희룡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간송미술관, 도 33)는 복잡한 화면 구성과 마구 찍은 것과 같은 거친 점 들에 나타난 표현주의적인 필묵법에 있어 김정희-전기-허련으로 이어지는 단순하고 생략적인 그림 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준다.
19세기 중엽 경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수철(金秀哲)은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간송미 술관, 도 34)에서 보듯 대담한 구성과 맑은 담채를 사용하여 마치 현대 수채화와 같은 새로운 감각 의 산수화를 그렸다. '이색화풍(異色畵風)'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화풍은 김창수(金昌秀)의 <동경산수 화(冬景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같은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준법을 배제하고 바위 표현에 있어 오 직 윤곽선, 담채, 점들만을 사용한 점은 기존의 산수화와는 달리 간결한 구도와 대담한 필묵법을 추 구했던 이색화풍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한편 조선 말기의 거장인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산 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器皿) 등 모든 화목에서 뛰어난 재주를 드러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 의고 몹시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수표교(水標橋)부근에 살고 있던 이응헌(李應憲)의 집에 기 식하면서 글과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는 40세 전후하여 화명(畵名)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 아 화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감찰(監察)이란 관직을 제수 받았다. 장승업은 술을 좋아하고 방만 한 기질을 지녔으며 기행(奇行)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일탈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 그의 산수화에 는 기괴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다. <산수도(山水圖)>(간송미술관)와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 圖)>(삼성미술관 리움, 도 35)에서 볼 수 있듯이 장승업의 산수화는 강렬한 필묵법(筆墨法), 과장된 형태,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장승업의 화풍은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 던 해상화파(海上畵派), 즉 상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의 영향을 받아 형성 된 것이다. 인천을 통해 유입된 중국 청나라 말기의 기괴하고 파격적인 화풍이 장승업의 개인 양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화풍은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에게 계승되었으며 근대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장승업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 구하고 중국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혁신적인 주제와 형식의 그림을 개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비전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즉 그는 재주가 뛰어난 괴짜 화가였는지는 모르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창조적 화가는 아니었다. 장승업과 근대화단이 이루지 못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산수화는 현재 우리 화가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27) 허련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김상엽,『소치 허련』(돌베개, 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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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Ⅰ. 초상화의 전통
Ⅱ. 인품과 권위를 재현하는 초상화
Ⅲ. 최고의 초상화-어진(御眞)
Ⅳ. 빛(照)과 그림자(影), 그리고 귀신(鬼神)
Ⅴ. 근대로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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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