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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의 시작, 정조의 책거리

Dalam dokumen 속표지 (Halaman 134-138)

책거리는 조선시대 문화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정조 때 시작되었다. 정조가 기획하고 궁중화원이 그린 책거리가 우리나라 책거리의 첫머리를 연 것이다. 정조의 방대한 문집인 홍제전서 弘齋全書 에서 그 역사의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어좌(御座) 뒤의 서가를 돌아보며 입시한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도 보이는가? 하시었다. 대 신들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 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 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 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책 끝의 표제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썼고 제자 백가 중에서 오직 장자(莊子)만을 썼다.’

책거리로 본 조선민화의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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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탄식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즈음 사람들을 글에 대한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 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 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대체로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 두기 위한 것도 있다.”

이 기사에는 책거리에 대한 세가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첫째, 책거리란 장르를 처음 만든 이가 정조라는 사실이다. 둘째, 책거리는 ‘후세의 병든 글’을 바로 잡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책거리를 어좌 뒤에 설치하여 그 의미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인용문 가운데 굵게 표시한 “내 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予爲此畵)”이란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조가 책거리를 만들었 다는 내용이다. 과연 그가 책거리를 직접 그렸을까? 정조는 인조, 선조, 영조 등과 더불어 직접 그 림을 그린, 몇 안 되는 왕 중의 하나다.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매화와 국화 그림이 전한다. 그렇지 만 이러한 여기로 그린 소품의 문인화는 모르지만 궁궐에 설치하는 궁중장식화를 임금이 직접 제작 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조선 전반기만 하더라도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하찮은 물건에 집착 하면 큰 뜻을 잃는다고 하여 임금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물론 즐기는 일조차 경계하기도 했다. 정조 책거리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그가 책거리란 그림을 구상했다는 정도로 새겨야 할 것 같고, 실제 그 림은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조가 구상한 책거리는 완전 창안은 아니다. 중국의 다보각경(多寶閣景) 또는 다보격경(多 寶格景)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 시렁 안에 책을 비롯한 기물들을 배치하 는 방식이 다보각경과 다보격경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책가도 혹은 책거리란 이름이 시사하듯 그 중 심이 책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 즉, 중국 그림들은 많은 보배스러운 물품인 다보(多寶) 로 꾸몄다면, 한국에서는 책을 강조한 것이다. 그만큼 조선에서는 책, 더 나아가 학문을 중시했던 것이다. 같은 시렁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것을 치장한 물품이 이처럼 다른 것 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인 귀세페 카스틸로네(중국명 郎世寧, 1688-1766)가 그린 것으 로 전하는 〈다보격경〉이 조선의 책거리와 비슷하나, 여기서도 책이 중심이 아니라 청동기가 중심 을 이루고 책은 이를 꾸미는 소재다.

다시 홍제전서 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면, 그가 책거리를 제작한 이유로 후세의 병든 글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 했다. 후세의 병든 글이란 당시 명말청초에 유행한 문집, 소품, 패관잡기(稗官雜 記), 소설, 고증학 등을 가리킨다. 정조는 통속적인 이들 글이 정통의 고전적인 문체를 오염시켜 성 리학이 이념으로 무장된 국가체제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1787년 김조순과 이상황이 예문관에서 숙직 하면서 당송시대의 소설과 평상냉연 平山冷燕 이란 책을 읽다가 왕에게 발각되어 파직되고 책이 불 태워진 ‘정미년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1792년에는 명말청초의 문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정통적 인 고문을 진흥하기 위한 문체반정을 단행했다. 책거리는 이러한 문체반정과 연관되면서 정치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으로 만 보면, 정조가 추진한 문체반정의 개혁은 회화에서 책거리란 장르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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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책거리는 이미 문체반정 이전에 제작되었다. 정조는 책거리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였지 만, 이를 문체반정과 연관시킨 것은 후대의 일이다. 문체반정을 시행하기 14년 전인 1778년, 정조는 신한평(申漢枰)과 이종현(李宗賢)이 책거리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다. 그 사정 에 대해서 내각일력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 내라는 명이 있었으면 책거리(冊巨里)를 마땅 히 그려 내야 하는 것이거늘, 모두 되지도 않은 다른 그림을 그려내 실로 해괴하니 함께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신한평은 풍속화로 유명한 신윤복의 아버지이고, 이종현은 뒤에 살펴볼 책거리의 대가 이형록의 할아버지다.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원하는 것을 그리라고 하면서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은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정조가 책거리를 창안했는데, 그 뜻을 알아서 받들지 않은 두 사람의 행동이 야속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기록은 책, 더 나아가 학문에 대한 정조의 애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렬했다는 것을 상징적으 로 보여준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를 보면 좋아하고 효자도(孝子圖)․성적도(聖蹟圖) 같은 그림 보기를 즐기며, 늘 공자처럼 제물 차리는 시늉을 했다.

왕이 되어서도 스스로 ‘우문일념’(右文一念)이라고 표현했듯이 문화정책에 힘쓰고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했으며 학문의 생활화를 주장했다. 정조는 학문에 대한 자신감을 토대로 과거에 합격한 신진 관료를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 制)를 운영하고, 문체를 통해 사대부의 학풍 을 바로잡는 문제반정(文體反正)이란 문풍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는 학문으로 신 하들을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책거리가 바로 이 러한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으로 창안된 궁중회화인 것이다.

어좌 뒤에 책거리를 설치한 것도 이례적이다. 원래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 병풍을 설 치하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이들 그림 대신 책거리를 보란 듯이 내세운 것이다. 이것 자체가 학문 의 중요성을 신하들에게 일깨워 주는 프로퍼갠더라 할 수 있다. 어떤 교육기관에서 정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책상만 문지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고 한 정자의 말처럼, 정조는 업무로 바쁠 때 에는 책거리에 그려진 책을 보면서 늘 책과 학문에 열정만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정조 당시 책거리 분야에서는 김홍도가 그 명성이 높았다. 이규상(李奎象)이 쓴 「화주록 畵廚錄」의 기록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화원의 그림이 처음으로 서양의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畵法)을 본떴는데, 그림의 이루어짐 을 한쪽 눈을 감고 보면, 무릇 기물이 가지런히 서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책가(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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架)’라고 불렀다. 그릴 때 반드시 채색을 입히니, 한때 귀인들의 벽에 이 그림을 바르지 않은 경우가 없었는데, 김홍도가 이 기법에 뛰어났다.”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이란 평면의 화면에 깊이 있게 표현하는 르네상스식의 원근법인 선투시도법 (linear perspective)를 가리킨다. 선투시도법이란 물상이 뒤로 물러나면서 점점 작아져서 결국에는 점으로 모아지게 하여 깊이 있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서양의 원근법이다. 이 기법을 활용하여 책거리 는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가 뛰어났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아쉽게도 그의 책거리가 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기록을 통해 적어도 정조가 책거리를 그리게 한 화원 중에는 김홍도가 포함되 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림에 관한 일이라면 김홍도에게 전적으로 맡겼다는 정조의 술회를 보면, 더욱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더욱이 그의 책가도가 귀인, 즉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정조가 기대하던 책가도의 모델이 김홍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의 작품은 전하지 않지만, 그가 활동한 시기와 가장 가까운 책거리로 장한종(張漢宗, 1768∼

1815)의 〈책가문방도병풍〉(경기도박물관 소장, 도록 도판 16)이 있다. 장한종은 책가도보다는 물고 기와 해물을 그린 어해도로 유명한 화원이다. 그는 젊었을 때 숭어․잉어․게․자라 등을 사서, 그 비늘과 등껍질을 자세히 관찰하고 본떠서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사람들이 똑같이 그린 핍진함 에 찬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린 어해도로 유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공교롭게도 신한평과 이종현이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서 귀양 간 그날, 김재공(金 在恭), 허용(許容)과 함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임명됐다. 자비대령화원이란 기존 예조에 서 운영한 도화서(圖畵署)와는 별도로 왕이 규장각에 설치하여 직접 주관한 화원제도다. 이 제도는 영조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조 때 본격적인 직제로 정립한 뒤, 고종 때까지 약 100년간 운영되었 다. 그에게 책거리를 그리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비대령화원의 시험제 도인 녹취재(祿取才)에서는 책거리인 문방을 한번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814년 ‘중희당 책가도’라는 제목의 시험에서 낮은 성적인 차중(次中)을 받았다. 녹취재의 성적은 모두 9등급으로 이 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 (次下) 순으로 매긴다. 이 기록으로 보면, 장한종의 〈책가도병풍〉은 19세기 초에 그려졌을 가능성 이 있다. 또한 장한종은 야담인 『어수록 禦睡綠』 일명 『어수신화 禦睡新話』를 지은 작가로도 유 명하다. 세상을 경계하기 위한 바보 이야기와 음담패설을 수록하여 잠을 쫓을 만한 이야기라 했다.

그런데 〈책가도병〉에서 이러한 탈권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병풍은 노란 휘장을 걷어 올리면서 책가의 위용이 드러내 보이게 하는 극적인 구성부터 예사 롭지 않다. 책가는 아랫단에 문갑이 달리고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는 책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과일, 꽃 등이 진열되어 있다. 당시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선투시도법의 공간에 음영법(shading technique)까지 표현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유소에 달린 구 슬장식에는 하이라이트(highlight)까지 표현하여 서양화법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깊었음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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