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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 선화에 대한 일본측의 요청 배경

Dalam dokumen 속표지 (Halaman 102-105)

당시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외교문서를 통해 김명국과 같은 자를 조선통신사 수행원에 반드시 포 함시켜 줄 것을 요구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41) 그렇다면 양국 간의 문화교류 에 있어 가장 규모가 큰 통신사행에 김명국을 굳이 지정하면서까지 그의 그림을 얻고자 했던 일본 측의 구청은 어떠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우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김명국 그림에 대한 일본 측의 높은 선호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에 대해서는 적잖은 문헌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예가 곧 金世濂의『海槎錄』의 그것이다.

“글씨나 그림을 구하는 왜인들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寫字官 朴之英 ․ 趙廷玹과 화원 金明國이 괴 로움을 견디지 못했는데, 심지어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42)

38) 戶田禎佑, 「元代道釋畵の諸問題」, 『中國文化叢書』, 卷7 藝術, 大修館書占, 1971, 200쪽.

39)惟政, 『四溟大師集卷7, 「有一老倭僧, 持以蒙頭達磨畵幀, 徵讚, 書之云」, 「倭僧悟初, 持達磨幀來見 仍以徵讚, 之」,「達麽後品」, 「達麽到金陵」의 구절로 본법사에서 늙은 왜승이 달마의 그림 족자를 가지고 와 찬을 구한 내용과 왜승 오초(悟初)가 달마 영정을 가지고 와 찬을 부탁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중 왜승 오초가 유정에게 가져온 [달마도]는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가이호 유쇼(海北友松, 1533-1615)의 달마도이다.

40) 유홍준, 「화가의 삶과 예술, 蓮潭 金明國-기인이 되고만 한 천재의 이야기」, 『역사비평 통권11호』(역사비평사, 1990) 315-343쪽.;『화인열전』(역사비평사, 2001); 洪善杓, 『조선시대회화사론』(문예출판사, 1999); 박경묵, 「연담 김명국 의 회화적 특성」(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임덕수,「연담 김명국의 선화연구」(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한의정, 「연담 김명국의 작품연구」(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안재옥, 「蓮潭 金明國生涯와 繪畵世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1982)

41) 春官志, 『通信使節目講定別軍』, “先年入來, 加蓮潭者潭送可也.”; 增正交隣志卷之五, 信行各年例, 癸未使行, “畵員加數.”

42) 金世濂,『海槎錄』, 崇禎九年丙子 十一月 十四日甲寅: “倭人求書畫者, 日夜坌集, 朴之英趙,廷玹金明國, 不勝其苦, 金明

김명국의 병자․계미통신사행 활동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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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밀려드는 그림의 요청과 그로 인한 작업의 강도를 견디다 못해 김명국이 얼마만큼의 고초를 겪었는가를 보여주는 기록도 되겠지만, 반면에 그의 그림에 일본의 朝野가 얼마나 열광했는가를 보 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정세는 이긍익의 『燃藜室記述』을 통해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明國이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 일듯 떠들썩하여 명국의 그림이라면 한 조각의 종이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여겼다….”43)

또한 1662년 3월13일자 왜인구청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8폭의 八仙人圖와 山水, 人 物이 포함된 春夏秋冬 사계절을 8폭으로 나눠 그려 보내 줄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일본에서의 그의 명성을 추측할 만하다.44) 이러한 김명국의 그림에 대한 선호는 먼저 조선 문화에 대한 우호적 인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통신사에 대하여 일본인과 일본문화인들의 관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나 從軍僧은 우리나라의 중앙 · 지방의 관인이나 지식층의 양반 유학자들 과 접촉하거나 또 왕궁이나 사원 등에서 우수한 문화재를 보고 각종전적을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 를 납치하여 그들의 인쇄기술과 도자기류 제조 기술 등은 일본문화 발전에 수혈적인 역할을 하여 주 었고 이에 힘입어 조선고전의 복간 등으로 도쿠가와 시대의 문물 興隆과 그 후의 명치유신으로 새로 운 길을 여는데 이바지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통신사의 파견이 있을 때마다 일본문화인들은 沿道 여관에 모임은 물론 체재기간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통신사와의 면접을 이루어 한시, 서화와 휘호, 필담 등 역사, 經學, 風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지식을 얻으면서 그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45)

일본인들의 조선화에 대한 관심이 폭주하자 대마번주는 이를 이용하여, 중앙에 대한 자신의 영향 력 증대에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화원의 초빙을 둘러싼 권한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南龍翼은 『扶

國至欲出涕.”

43) 李肯翊, 『燃藜室記述』 別集 14卷, 「文藝典故-畫家」: “明國. 隨通信使. 行至日本. 擧國奔波. 得片紙如拱壁. 有一倭 精造三間屋. 以毛緞塗四壁. 千金僞幣. 邀明國精畵. 明國轟飮倚醉. 始索筆. 倭奉泥金汁一椀以進. 明國人吸滿口噴四隅. 空 器而止. 倭驚怒拔劒. 明國大笑. 拈筆揮灑. 成山水人物. 隋手天成. 淋漓活動. 盖平生得意筆也. 倭警喜叩頭致謝. 子孫傳守. 遂爲國中奇觀云.”

44) 倭人求請謄錄』Ⅱ, (정경주 번역,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 2007), p.105, 1662년3월13일 기록: 島主求貿見樣別單:

白綃二十六幅內十幅長二尺, 眞彩色彩女之畫, 八幅長三尺淡,彩色八仙人之畫, 所謂八仙人乃飮中八仙人之謂也, 畫出之後, 以白色段子, 裁作小籤, 使善畫人書其八仙之號, 各付其幅之上, 又作一籤, 書以某年月日朝鮮國人金明國寫是如爲遣, 又着其 , 書於寫子之下, 付於八幅中末幅之下, 八幅之長三尺, 眞彩色春夏秋冬四時大山水之景, 及人物之畫, 而書以某某景是如, 各各付籤求貿爲在, 畫綃二匹, 若不足於此尺數, 則或加貿用, 亦無所妨是如, 爲齊謄書.”

45) 曺命采, 『奉使日本時聞見錄』, 戊辰年, 四月九日: “倭人之求書行中者。日以益煩。至如賤倭。則求之於格卒之輩。或書給 諺文得之者猶以爲貴。或言倭俗。得置我國人筆蹟則謂之事事必遂.”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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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錄』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글씨와 그림을 絶寶로 삼기 때문에 그 보배를 독차지하려는 때문이라 하니….”46)

“의성이 平戶守를 위하여 寫字官 畫員을 요청하므로 잠깐 金義信 韓時覺 등을 보내 주었다.

이로부터 가는 곳마다 그들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여 자기의 안면을 내었다. 글씨와 그림을 요구하는 자가 밤낮으로 모여들매 書畫하는 사람들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고, 또한 그 기쁨도 금할 수가 없었다.”47)

이와 같이 일본인들의 서화구청에 대한 대마번주의 간섭과 권한은 1682년의 임술사행 때부터 노 골화되었던 듯 하며.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당시 역관이었던 金指南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왜인들 중 우리나라 서화를 구하려는 자가 몹시 많으나 대마도 도주는 이를 일절 금하여 써 주 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서화를 얻으려는 사람이 도주에게 청하면 도주가 정사에게 청해서 자기 생 색을 내자는 까닭이다.”

귀로 시 부중에서의 체류기간은 1-2주 정도 되는데 대마도 종가의 1643년도 『信使記錄』에 의하 면, 9월30일에서 10월1일과 3일 ․ 4일 ․ 5일 ․ 6일까지 6일간 “繪書兩人召寄”했으며, 1655년의 을 미사행 때는 대마도 번주의 아들이며 주의 4품인 義眞이 제술학사와 서화인을 초청한 바 있다. 병자 사행 귀로 때에도 수행화원 김명국이 대마번주에게서 卦硯과 硯匣․大手鏡을 하나씩 선물로 받았던 것으로 보아 도주의 서화인 초빙에 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48)

이런 점으로 보아, 숙박지가 바뀐 때마다 이러한 시재 행사는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사행기간 내 내 수행화원의 주요 일정을 다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각계각층을 망라한 일본인들이 통신사행원들 의 서화구득에 지나칠 정도로 열을 올렸던 것은 당시 쇄국체제 하에서의 외국문화 접촉에 대한 갈망 과 임진왜란 등을 통해 증대된 조선 문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시․서․화 등 고급문화에 대한 기호의 확산 등에 연유되었다고 본다.49)

그런데 이런 조선화 중에서 김명국의 그림이 더욱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작품에 선화가 많았 으며 더불어 그의 필치가 호방하였다는 측면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

46) 南龍翼, 『扶桑錄』, 扶桑日錄 七月一日癸未: “或云渠等以我國書畫爲絶寶, 欲專其寶故也, 未知孰是.”

47) 南龍翼, 『扶桑錄』, 扶桑日錄 七月二十二日甲辰: “義成爲平戶守, 要得寫字官及畫員, 暫送金義信, 缺 時覺等, 自此到處 請送, 以爲自己顏面, 求之者晝夜塡擁, 書畫人等, 不勝其苦, 亦不勝其喜矣.”

48) 洪善杓,「朝鮮後期 通信使 隨行畵員이 繪畵活動」, (미술사학회, 1998), 190쪽.

49) 姜大敏․李貞慇, 「朝鮮通信使 隨行畵員硏究Ⅰ」, 『文化傳統論集』(慶星大學校附設韓國學硏究所, 2003), 133쪽.

김명국의 병자․계미통신사행 활동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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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살펴보자.

임진왜란의 발발 이전,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8-1573)에 선화와 그 배경을 이룬 선종 사상은 유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모든 예술 분야에 자극제가 되었다. 무로마치시 대는 기타야마(北山, 1392-1467) 문화시대와 히가시야마(東山, 1467-1573) 문화시대로 나눌 수 있 다. 전자는 전통 귀족문화와 새로운 선종문화의 결합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선종문화가 지 방에까지 널리 퍼지고 지방의 다이묘들의 세력이 커져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되었던 시기였다.

선종문화의 확산으로 미술에서도 그 영향이 크게 나타나 수묵화 화풍의 선화가 크게 성행했으며 선 사들이 직접 그림을 많이 그렸다. 선화는 자연의 단순함을 통해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형상을 갖추 고 있었으며, 새로움을 추구하던 승려들에 의해 유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 선화를 남긴 대표적인 일본 화가는 셋슈 도요(雪舟等楊, 1420-1506)이다.50) 그런데 셋슈의 작품과 같이 엄숙하고 기괴한 느낌을 강조하여 도상의 神性을 고취시킨 선화에 익숙해 있던 일본인들에게, 김명국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강경하면서도 자연스럽고 대담한 필치는 강렬한 인상 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그가 그려내는 속도감 넘치는 단순한 필치의 선화는 선종이 갑작스런 깨달 음, 곧 頓悟論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연계되어 선종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 을 것이다.51) 물론 이 당시 일본의 민간신앙에서 달마나 포대화상이 시치후쿠진(七福神)과 같은 의 미로 받아들여졌다는 측면까지고려해보면 일반 민중에게 이르기까지 김명국의 선화, 그중에서도 달 마도가 그렇게 요구가 많이 되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2)

Ⅲ. 김명국의 일본 활동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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