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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성풍속도를 대변해주는 춘화

Dalam dokumen 속표지 (Halaman 70-73)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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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은 예술적 소신을 확고히 밝힌 신윤복의 근대적 작가정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의 풍아한 그림은 조선인 바탕에 깔린 삶의 멋과 정서를 일깨워 지금도 변함없는 감흥을 일으 킨다. 그 감명은 인물묘사력, 색채감각 등 신윤복이 꾸준히 추구한 사실적 창작태도의 견실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대회화의 여명을 알리는 성과이다. 이와 함께 신윤복 풍속화의 또 다른 가치는 문 화사료로써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길이가 짧아져 젖가슴이 드러난 저고리나 다양한 남성 복의 모양새 등 치밀하게 그린 의상은 각 계층과 노소성별의 유행 복식을, 삼현육각을 비롯한 2~3 인조의 소규모 악단은 민간의 춤과 음악문화를 추정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신윤복류의 풍속도는 그 이후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쪽으로 더 이상 진 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린 남녀인물의 도상과 화풍은 19세기 춘화의 격조를 높이는데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후기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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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소설이 유행하고, 古今笑叢 같은 성표현의 해학과 풍자가 어울린 민담이 묶여 출간되고, 남녀상 열지사를 읊은 시조나 판소리, 소설, 연행의 발달은 지속되었다.

아직은 조선후기 춘화에 대한 낱낱 작품의 공개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나, 꽤 많은 화 첩류가 전한다. 비교적 안정된 묘사기량을 보이는 화원풍부터 수준이 떨어지는 민간화가의 치졸한 솜씨까지, 19세기에서 일제 시대까지 수요의 증가에 따라 지속적으로 복제되었다. 화격을 갖춘 화첩 으로는 10폭 짜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김홍도의 도장과 신윤복의 낙관이 있는 개인 소장품의 일부가 알려진 정도이다.

현존하는 춘화첩은 대부분 신윤복의 화풍과 무관하지 않아서 속칭 신윤복이 그렸다고 전해 올 정 도이다.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속설을 확증할 수 없으나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섬세한 필치에다 신윤복의 <蓮塘野遊>, <嫠婦耽春>이나 <妓房無事> 같은 풍속도를 변형시킨 화폭이 등장하 는 점으로 보아 그렇다. 한편 김홍도가 춘화첩을 그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정조의 은총을 받은 화원으로서 정조의 통치이념과 크게 괴리된 그런 소재를 선택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김홍도 자신도 삶의 방식이나 인생관이 단아한 사대부적 태도를 짙게 풍겼던 점에 비추어 더욱 회의적이다. 물론 유곽풍정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오지만(서유구, 林園十六誌 ), 현존하는 김홍도의 풍속화로 볼 때 그렇게 노골적인 남녀의 성행위까지 그렸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김홍도는 고작해야 목화밭이나 빨래터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남정네가 훔쳐보거나, 우물가에서 벌이 는 남녀의 수작 정도의 풍속도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춘화첩에 등장한 인물묘법이 김홍도보다는 신윤복의 화풍에 근사하다. 특히 여인들의 머리모양에서, 크고 풍성한 가체는 신윤복 그림의 그것과 유사하다. 김홍도 풍속도에 보이는 여인의 首飾은 얹은머리 형태로 가체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이 춘화첩은 김홍도보다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19세기 초 화원의 작품일 터인데, 오히려 신윤복 쪽에 마음이 간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화가들 가운데는 입담이 좋고 애주호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 민간의 음담패설집 고금소총 에 수록된 조선 초기 선비화가 姜希孟(1424-1483)의 「村談解頤」와 후 기의 화원화가 張漢宗(19세기)의 「禦睡新話」 등을 그 한 사례로 들 수 있겠다. 특히 장한종의 「어수 신화」 혹은 「어수록」에 담긴 39首는 주인선비와 하녀, 사족 아녀자와 머슴, 과부와 총각, 객주나 창 가에서 벌어지는 양반과 하급관료의 엽색행각 등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오갔을 그야말 로 ‘잠을 쫓는 이야기’이다. 마치 조선후기의 야한 풍속도나 춘화첩에 담긴 내용을 읽는 듯하다.

한편 장한종이 남긴 춘화가 전해오지 않아서 아쉽지만, 이로 미루어 조선후기 화가들이 스스로 춘화 에 관심을 갖거나, 주문에 의해 고급 춘화를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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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춘화에는 기방의 성희를 중심으로 매화분재나 국화 화분이 배치된 방안, 죽석도(竹石 圖) 족자가 걸린 사랑방, 두겹닫이에 화조화가 그려진 안방, 대청마루, 우물가나 뒤뜰, 달밤의 연못 가, 깊은 산 속, 들녘 등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능한 남녀의 성행위가 두루 담겨 있다. 그리 고 여러 가지의 자세를 포함하여, 등장인물도 기방에 출입하는 청장년층, 주인과 여종, 승려와 아낙, 처녀 총각, 노인 부부, 한 남자와 두 여인의 혼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 현장을 실감나게 포착 한 것이 많다. 뒤뜰에서 벌어진 처녀 총각의 성희장면에 배치한 나무절구와 절구공이, 절에 온 여인 과 노승의 성희를 문틈으로 구경하는 승방의 동자승, 대청마루에서 벌어진 집주인과 하인의 성희를 훔쳐보는 댕기머리 하녀의 달아오른 표정, 초가 마루에서 옛 기억을 살려 보려 시도하는 노인 부부 의 안타까운 몸짓,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고 사랑방 댓돌에 한 쌍의 남녀 가죽신만을 나란히 놓은 장 면의 설정 등이 그러하다.

우리 춘화의 적나라한 장면들은 단순히 도색적인 성희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하나로 표현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리고 해학적이면서 낭만이 흐르고 가식 없는 표현들로 감칠맛 나는 것 이 사랑스러운 점이다. 이런 격조가 동시기에 그려진 중국과 일본의 춘화와는 구분되는 조선적인 품 위와 예술성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도 알려진 중국의 도색화는 혼교가 많으면서 화사하고 섬세한 궁 정취향을 짙게 풍기고, 일본의 우끼요에 춘화는 성기와 안면의 표정에 괴기스러울 정도로 과장이 심 한 편이다.

또한 춘화첩들은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담은 것으로, 당시 사회를 유교적 이념으로만 파악하는 것 이 아니라 면면의 인간이 살았던 역사로 복원 가능케 해준다. 또 거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 람들을 볼 때, 유교적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가 깔려 있다. 그래서 춘화는 윤리관이 흐트러진, 유교 의 도덕개념으로는 철저히 타락한 당대사회의 성문란을 보여주지만, 한편 유교이념의 벽에 대응하려 는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이는 신윤복의 풍속도들에 이어서, 무너져 가는 봉건사회를 꼬집거나 남녀의 정념을 노골적으로 서술한 애정소설이나 사설시조, 변강쇠타령을 비롯한 판소리, 탈춤이나 연희예술의 유행 등 동시대 의 문예동향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한 예로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에서 남근을 드러낸 홍 동지가 발가벗은 채 평양감사(혹은 평양감사 부인)의 상여를 메겠다고 나서는 장면 같은 경우는, 대 사와 함께 지배층의 권위와 격식을 깨려는 사회의식을 선명하게 담아내었다. 이런 문예경향은 변할 수밖에 없는 도덕관과 새로운 생활감정을 읽게 해주는 근대적 리얼리즘 예술이 준비되는 시류에 편 승한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 사회에서도 그러한 회화와 문예가 확산되 었던 점을 감안할 때, 신윤복의 남녀 애정사를 담은 풍속도에서 춘화에 이르는 회화유형은 시대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

조선후기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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