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계미사행 당시 일본 화단은 선화가 일대 유행이었다.79) 특히 선화중에서도 [달마도]를 선호 하였고, 김명국이 구사한 화풍은 일본취향의 선화를 더욱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김명국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선화와 달리 배경을 생략하고, 중첩이 난무한 일본선화와 달리 간략한 획수로 달마상을 그린 그의 기질에 있다하겠다.80)
78) 南泰膺, 『聽竹別識』,「聽竹畫史」, “則前無金明國, 後無金明國一人而己.”
79) 유홍준, 『화인열전1』(역사비평사, 2001), 34쪽.
80) 필자는 일본 선화의 대가 셋슈, 기치잔 민초(吉山明兆, 1352-1431),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등의 [달마도] 비교해 본 바, 모두 배경과 달마상이 어우러진 반면, 김명국의 달마상은 달마도상 자체만으로 禪을 보여주고 있다.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116
圖6.말아서 보관
구성면에서도 김명국은 탁월한 비율구성을 보였으며, 바탕지 위에 주저하지 않고 내려 그은 먹을 그대로 一筆揮之하여 표현하였다. 김명국의 달마그림은 3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다만, 계미사행 시 제작된 두 점의 작품은 접혀진 종이위에 그려 져 그림의 획들이 모두 이 수평선에서 끊어지고 혹은 지나친 渴筆 로 그어져있다.81) 한지의 특성상 말아서 보관 혹은 이동하는데 안 쪽에 말린 종이의 경우 이런 접지가 간혹 발생된다. 매끄럽지 않은 바탕 종이의 아쉬움은 김명국의 달마도상의 자세와 표정의 자연스 러움에서 잊게 된다.
일본의 도식화된 달마상을 뛰어 넘은 김명국, 그의 [달마도] 진가를 그들은 알아본 것이다. 병자 사행과 계미사행의 수행화원이었던 김명국은 또다시 1662년 일본 측 요청을 받게 된다. 이 기록은 1668년 임술사행 수행화원으로 김명국을 지목한 것으로 짐작되며,82) 乙未使行 수행화원 韓時覺 (1621 - ?)은 방일시 김명국의 빈자리를 채워내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요청했던 김명국의 방 일은 조선 측에 의해 무산되었으며, 壬戌使行 수행화원으로는 咸悌建(?-?)이 방일하였다. 함제건은 방일기간 선화를 그려 남겼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전하는 선화는 없다.
김명국에 대한 일본 측의 요청은 계미사행에 이어 두 번째이며, 계미사행 시 우회적으로 ‘연담과 같은 자’ 로 요청한 반면,83) 1662년에는 직설적으로 ‘김명국’을 바로 지목하였다. 병자사행에서 1662년은 26년이 지난 시간이다. 김명국은 요즘 말로 한류1세대이며, 大畵員이라 감히 칭할 만하다.
김명국은 수행화원으로 활동 시 일본에 많은 수의 선화를 남겼다본다. 그런데 현재 확인되는 김명 국의 선화는 고작 15점뿐이다. 그러나 이 수치도 명확하지 않다.84) 김명국의 선화는 존재하지만, 그
81) 계미사행 시 제작된 [達磨圖](圖3)와 [蘆葉達磨圖](圖5)의 규격을 합산하면, 760×1810㎝이다. 정확한 수치로 떨어지는 크기로 보아 동일한 종이를 잘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조선시대 화구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요하는 바이다.
82) 倭人求請謄錄』Ⅱ, (정경주 번역,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시, 2007), 104쪽, 1662년3월13일 기록: (東萊府使李元禎三 月初六日成貼狀啓:) “金明國段, 下送有弊, 以該曺所貿畵綃, 自此繪畵以送, 以爲便當, 尺量長廣及綵色與否, 使譯官詳問於 差倭, 處以爲依請起畵之地事, 關是白乎等用良.”
83)『春官志』下, 『通信使節目講定別軍』, “先年入來 加蓮潭者潭送可也”
84) <表7>은 현재 수행화원의 작품의 소장 혹은 도록에 담고 있는 자료에 의거해 제작한 목록이므로 이후 수정 변경 가능예 정이다. <表7>의 제작이유는 김명국 선화를 비롯한 작품 연구에 있어 꼭 필요한 목록표이다. 그런데 아직 정확한 작품 수도 불명확하다. 물론 유홍준이 『화인열전1』, 39쪽에서 13점으로 기록한 바 있으나, 이는 辛基秀, 『朝鮮通信使 繪圖 集成』, 東京, 講談社, 1985 도록의 논문인 요시다 히로시(吉田寛)의「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회화」, 138-145쪽을 통해 기술된 것으로 16년 전 기록이다. 이외 정확한 수치 기록이 없으며, 현존한다는 13점의 작품명도 연구자에 의해 거 론된 바 없다. 다만, 김명국의 작품을 유홍준은 30여점으로 홍선표는 40여점으로 기술할 뿐이다.
1636년 사행시 제작된 日本, 京都 高麗 美術館 所藏의〈鷺圖〉(113.3×40.6㎝, 紙本墨書)는 화조화로 목록에서 제외한 다. 목록에 포함된〈隱士圖〉는 현재 그림 속 畵題로 인해 김명국 말년 작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연세대 이광 호교수의 화제풀이에 있으며, 이후 유홍준에 의해 그림풀이가 되어 김명국의 말년의 작품이 되었다. 화제의 내용은 죽음 을 앞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將無能作有 畵貌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김명국의 병자․계미통신사행 활동작품 분석
117
가 그려 남긴 선화의 수는 가름할 수 없다. 그야말로 선종에서 말하는 禪은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實로 있는 것도 아니다할 것이다.85)
<表7> 사행시 남긴 禪畵 15점의 作品 目錄
作品明 規格 材料 所藏處
1636
[壽老圖] 88.8×31.2㎝ 紙本墨畵 日本, 大和華館
[竹圖]․[蘆葉達磨圖]․[梅圖] 각96.7×39.1㎝ 絹本墨書 日本, 東京 藝術大學 [達磨圖] 83.0×57.0㎝ 紙本水墨 韓國, 國立 中央 博物館
[壽老曳龜] 52.7×100.5㎝ 紙本墨畵 韓國, 澗松美術館
[박쥐를 날리는 신선] 25.0×34.0㎝ 紙本墨畵 北韓, 平壤朝鮮美術博物館
〈隱士圖〉 60.6×39.1cm 紙本墨畵 韓國, 國立 中央 博物館
1643
[達磨圖] 紙本墨畵 日本, 個人
[達磨圖] 紙本墨畵 日本, 個人
[達磨圖] 84.4×37.8㎝ 紙本墨畵 日本, 尼ケ崎市博物館準備委員會
[蘆葉達磨圖] 97.6×48.2㎝ 紙本墨畵 韓國, 國立 中央 博物館
[壽老圖] 88.8×31.2㎝ 紙本墨畵 日本, 金龍斗
[壽老圖] 89.0×27.2㎝ 紙本墨畵 韓國, 個人
[布袋圖] 90.1×37.3㎝ 紙本墨書 日本, 辛基秀
[布袋圖] 紙本墨畵 美國, New York Brooklyn Museum
[鐵拐圖] 20.0×29.5㎝ 紙本墨畵 韓國, 澗松美術館
김명국은 조선중기 진보적인 그림으로 활동한 화원이었다. 진보적인 절파화풍은 단필하게 그려내 는 일본의 선화와 맞아떨어져 오히려 일본에서의 그의 그림은 대접을 받았다. 김명국을 평가한 화론 가 들은 모두 그의 일본 활동을 기본으로 거론하고 있다. 이는 일본사행 활동 시 남긴 김명국의 선 화에 있으며, 그를 神筆로 기록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본고는 김명국이 사행시 남긴 선화 15점 중 1/3의 수치를 보이는 [달마도]를 분석대상으로 한정하 고 대표적인 4점을 살펴보았다. 김명국의 나머지 선화 작품도 순차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며, 선화를 그려 남긴 화원의 선사상연구가 진행되길 바라는 바라며, 본 연구자의 小考를 마치고자 한다.
85) 소진홍, 「達摩의 선종과 般若心經講說에 대한 소고」, 한국사상과 문화 제18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02) 318-319쪽.
조선후기 동래지역 도화서 파견화원과 재지화사
이현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
Ⅰ. 조선후기 회화제작기관과 화원
Ⅱ. 조선후기 동래지역 도화서 파견화원
Ⅲ. 조선후기 동래지역 재지화사
Ⅳ. 조선후기 지방기록화 제작의 증가와 그 사회적 배경
조선후기 동래지역 도화서 파견화원과 재지화사
121
조선후기 동래지역 도화서 파견화원과 재지화사
이 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