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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과 서양화 인식

Dalam dokumen 속표지 (Halaman 92-96)

조선후기 연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연로에서 본 것 중 인상에 남는 것을 물으면, 반드시 언급 되는 것은 멀리서 보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천주당의 벽화였다. 18세기 조선 사절 대부분은 호 기심을 자극하는 천주당에서 벽화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이한 의기도 보여주고 서양 물품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여기서는 연행록에 나타나는 조선후기 천주당을 찾 은 연행사절의 서양화 접촉사례를 통해 그에 대한 인식변화를 살펴보려 한다.

1. 1712년 金昌業(1658-1721)

西學 관련 서적이 조선에 유입된 것은 이미 宣祖(1568-1607) 말년부터였으나, 조선 사신이 연경 에 가서 천주당을 구경한 것은 17세기 말 이후로 1695년 동지사행 부사로 연행했던 洪禹鼎(1660-?) 이 그의 숙부 洪受疇(1642-1704)를 따라 입연하였다가 역관 申之淳(1666-?) 등과 함께 조선사절이 가기 어려운 五龍亭과 天主堂을 가볼 수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지순은 1712년 동지연행에도 別加定으로 동행하였으므로 당시 김창업이 天主堂을 찾았을 때도 안내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업은 남당의 교당 북벽에 걸린 像을 보았다. 김창업 일행이 보았던 서양화는 그 상이 모두 걸려 있었다고 표현한 점에서 전통과 절충한 건축 양식의 교당 내에 벽화가 아닌 성화를 따로 제작하여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형상이 火珠를 갖고 있다고 했는 데, 이는 서양 성화에서 보이는 두광 형태의 아우라로 추정되며, 머리를 풀고 한쪽 어깨에 옷을 걸 친 예수 형상이었을 것이다.

2. 1720년 李器之(1690-1722)

1720년 告訃使로 연행한 부친 李頤命(1658-1722)을 따라 연경에 다녀온 李器之는 일암연기 9 월 22일 기록에서 남당의 堂制를 기술하였다. 당시 남당 건축은 멀리서 바라보면 3층 누각의 철종 과 해시계를 볼 수 있었고, 전면 5칸, 측면 7칸이며, 높이는 대략 10여 미터, 아래층 문은 5개, 중 층은 화려한 유리장식화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남당은 바로크 양식을 반영한 건 축 형태였을 것이다. 이기지는 당시 보았던 남당 벽화에 대해 「西洋畵記」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특히 벽화 속 코와 입의 입체감을 현격하게 차이를 두어 표현한 점이나, 손과 다리의 보드라 운 양감, 그리고 옷주름의 사실적 묘사까지 눈앞에서 작품을 대하듯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으로 천상에 떠있는 천사와 성인의 모습을 동양의 신선과 귀신에 빗댄 점이 흥미롭다.

이기지는 천주당 벽화 속 인물 묘사에 그치지 않고 서양서적 내 동판삽화의 건물 묘사에도 주의 를 기울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전체 건물을 화면에 모두 가득 차게 부감시점으로 묘사하였고, 건물

조선후기 연행을 통한 서양화법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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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특성에 따라 농담을 달리하여 명암과 원근을 표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동판삽 화가 조선에 유입되었다면, 건물도나 회화식지도의 구도 및 명암법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천주당의 선교사를 통한 서양화 유입과 관련하여 1720년 사행하였던 李頤命, 李器之 일행과 북경 천주당 소속 서양선교사들 사이 빈번한 내왕 기록을 일암연기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서양화 접촉이나 유입에서 조선사절단이 천주당을 방문하면 교당을 둘러보며 천주당 내의 성상화 뿐만 아니 라 서양선교사들의 유화 초상, 교당 서가에 있던 서양서적의 동판삽화 등을 접할 수 있었고, 地圖, 天文圖 그리고 단폭으로 된 서양화 및 동판화 등을 선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서양천주당을 묘사한 동판화나 지도와 함께 천주교 관련 서적을 주었는데, 그 의도는 중국에 온 조선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는 서양화와 지도를 매개로 천주교를 조선에 전파하려는 목적 이 컸다. 북당을 방문했을 때 선교사 피에르 빈센트(Pierre Vincent, 湯尙賢, 1667-1724)가 역관 鄭泰賢에게 조선에 가서 천주당을 건립하려는 뜻을 밝히며 山東에서 조선으로 가는 노정을 노골적으 로 묻기도 하였고, 프리델리가 서신을 통해 이기지에게 산동에서 조선으로 가는 해로를 물었던 점에 서 그들의 구체적 접근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 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 목적은 주로 천주교보다 서양 역법과 산술 등 서학지식 에 초점이 맞춰졌다. 조선사절이 흠천감 소속 서양 선교사들이 우거하였던 남당을 다른 천주당 보다 선호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중 하나이다. 흠천감 소속 선교사들은 청의 親王들조차도 출입이 엄금 된 관상대를 관할하였고, 1622년 이래 서양선교사들이 曆象의 일을 보던 時憲局에서 근무하였기 때 문에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아 서양역법과 관련한 의기와 서적을 구득하려는 목적이 컸던 것이다.

조선사절이 서양선교사들에게 받은 기념물품 중 선호하였던 것은 역서 외에도 세계지도였다. 수아 레즈와 프리델리가 법화사를 방문하여 전달한 전별선물 중에는 坤輿圖說 2권도 포함되었는데, 이 때 坤輿圖說 은 1674년 南懷仁이 제작한《坤輿全圖》에 대한 도설이다. 서방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 관련 圖說은 조선의 지식인이 中華思想을 벗어나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확장하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천주당에서 서양 원서로 된 동식물의 동판삽화를 접한 이기지는 10월 16일과 10월 30일에 걸쳐 중국인 장서가 趙華가 추천한 절강출신 화가 王璡에게 중국의 草木鳥獸蟲魚之屬을 設彩로 그리고 그 위에 이름을 적을 것을 주문하였지만, 서로의 일정이 촉박하여 조화를 통해 내년 봄에 조선 동지사 행이 귀환할 때 부쳐 보내줄 것을 제안하였다. 이기지가 천주당에 있는 한역서 뿐만 아니라 서양 원 서 체제를 모방하여 이를 중국인 화가를 통해 그릴 것을 주문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 연행사절을 통 한 서양의 백과사전적 자료의 유입은 조선후기 翎毛畵나 魚蟹圖에서 나타나는 사실적 관찰태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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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732년 李宜顯(1669-1745)

1732년 4월 李宜顯(1669-1745)은 인조반정 변무와 관련하여 사은겸진하사의 정사로 연행할 당시 청국 예부상서의 주선으로 북경 천주당을 구경하였다. 이의현은 당시 보았던 천주당 벽화에 대해 묘 사하였는데, 벽에 그린 벽화는 어두운 종교적 소재를 重彩로 그려 시왕전의 음귀를 운운하여 조선불 화 중 지옥시왕도를 연상한 듯하다. 또한 동당 선교사 프리델리가 보낸 물목 중에는 西敎 관련 한역 서 三山論學記 와 主制群徵 각 1책과 크고 작은 그림 15폭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델리가 보낸 물목에 포함된 그림 15폭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앞서 본 예와 같이 서양화법을 반영한 동판화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의현은 당시 사행에서 천주당에서 받은 것 외에도 직접 서양화 한 폭을 구입하였는데, 이는 그 의 서양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조선사절단은 천주당뿐만 아니라 琉璃廠이나 寺廟의 서화포에서 서화를 구입하였는데, 강남에서 출판되는 수많은 전적들뿐만 아니라 서양화법에 영향을 받은 회화 또는 채색판화가 활발하게 유통되 었다. 그에 대한 증거는 李瀷(1681-1763)이 근세에 燕京에 사신 간 자는 대부분 西洋畫를 사다가 마 루 위에 걸어 놓는 것이 유행이라 했을 만큼 이들 사절단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된 다량의 서양화가 바로 이러한 경로를 통해 구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경에서 판매되던 蘇州의 姑蘇版畵는 명암법과 서양투시법, 동판화의 섬세한 세부표현에 치중한 서양화법을 흉내 낸 중국 민간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연화 수 만장은 중국 내륙뿐만 아니라 일본 나가사키와 동남아시아까지 전파되었다.

한편 예수회 선교사들과 상인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廣東에서는 이미 18세기 行商 무역화가를 중심 으로 풍속 ․ 신앙 ․ 인물 ․ 화훼 ․ 鳥獸 ․ 典儀 등 중국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을 반영한 소재를 油畵 ․ 玻璃畵 ․ 水彩畵 ․ 水粉畵 등 서방 회화 기술과 재료를 취한 外銷畵가 대량 제작되어 새로운 문화중 심지가 되었다. 서경순은 유리창의 文繪堂 서화포에서 銀子 30錠을 호가하는 皇帝와 皇后의 초상을 보았는데, 이는 廣東 行商 무역화가를 중심으로 제작된 外銷畵의 유통망이 광동, 上海뿐만 아니라 북경까지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4. 1765년 洪大容(1731-1783)

1765년 연행한 홍대용은 흠천감정 할러스타인(Augustin F. Hallerstein, 劉松齡, 1703-1774)과 副監 고가이슬(Antonius Gogeisl, 鮑友管, 1701-1771)을 만나러 남당에 갔을 때 그곳에서 관찰한 천주당 벽화에 대해 기술하였다. 홍대용은 이때 본 벽화 중에서도 인물 묘사 보다 풍경 묘사에 관심 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냇물과 골짜기, 연기와 구름, 먼 하늘 空界를 채색으로 표현한 점에서 대 기 원근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홍대용은 동양 산수화와 달리 서양화에서는 하늘에 채색을 가한

조선후기 연행을 통한 서양화법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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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포착하였고, 더 나아가 서양 그림의 묘리를 算術에서 나온 기하학적 투시법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시대 인물들이 서양화에 대해 느끼는 감흥과 놀라움 일변도에서 벗어나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출입이 금지된 관상대를 오르지 못했던 홍대용은 남당에 있던 望遠鏡, 閙鍾, 羅經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고가이슬이 보여준 <觀象臺圖> 印本 1장을 통해 관상대 위에 儀器가 진열된 상황 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밖에 홍대용은 東堂을 방문하여 그곳 벽화에 대해 南堂만 못했으나, 벽화의 신기하고 교묘함은 보다 훌륭하다고 하였다. 또한 처음 문에 들어섰을 때, 북쪽 벽 중간에 채색 龕室을 만들어 세 점의 소상을 모셔둔 것으로 알았으나, 막상 가까이 가서 만져 보니 벽화였음을 언급하며 이를 ‘畫妖’라 표현하였다.

5. 1778년 李德懋(1741-1793)

1778년 6월 李德懋는 1775년 화재 후 새로 축성한 북경 천주당을 찾아 서양 바로크 건축양식임을 확인하였다. 그는 선교사의 부재로 아쉽게 본당 내부를 구경하지 못하고, 단지 작은 문 한 켠 북벽 에서 철사 줄에 목을 달아 매인 큰 개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그림 바로 밑에 실제로 살아 있는 개 몇 마리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며 그 사실적 표현에 놀랐다. 이러한 이미지는 앞서 1720년 이기 지가 남당에서 보았던 벽화와 유사한 소재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猛犬圖>와 같이 洋犬 한 마리가 굵은 쇠사슬로 묶여 기둥 밑에 웅크리고 있은 자세를 연상하게 한다. 그림은 유화적 채색법 과 두드러진 명암법에서 이색적 작품으로 당시 조선에서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작품의 효시로 평가받 던 李喜英(1756-1801)의 <犬圖>와 비교할 수 있다. 18세기 말에 서양화법을 반영하여 제작되었다는

<견도>의 표현력을 감안할 때, <맹견도>는 중국에서 유입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6. 1780년 朴趾源(1737-1805)

1780년 연행하였던 朴趾源 역시 1775년 남당의 화재로 인해, 다시 복원이 된 천주당 벽화에 그려 진 구름과 인물군상을 기술하였다. 박지원은 천주당 벽화 속 인물들이 자신을 꿰뚫어 보거나 귀에 대고 속삭인다며 공감각적 언어로 현장감 있게 기술하였고, 살진 살결을 만지면 따뜻하다든가, 위를 쳐다보고 있으면 구름 속에 매달린 인물들이 떨어질까 두 팔을 벌려 떠받드는 시늉까지 할 정도라며 벽화의 사실성을 특유의 감성으로 실감나게 전달하였다.

7. 1784-1785년 姜世晃(1713-1791)

1785년 청 건륭제의 千叟宴에 즈음하여 연행하였던 강세황이 정사 李徽之(1715-1785), 서장관 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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