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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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풍속화
이 태 호
제12기 박물관대학 - 한국의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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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두서와 조영석 이후의 풍속화는, 18세기 화가들을 통해 사대부의 생활상이나 일상의 민간생활 로 그 소재가 확산되면서, 단원 김홍도(1745-?)와 같은 대가를 낳았다. 김홍도로부터 긍재 김득신과 혜원 신윤복으로 이어져, 그보다 폭넓은 인간사와 세태의 변화를 담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영조 말 에서 정조 시절을 거쳐 순조 때까지, 이들에 의해서 조선후기 풍속화는 사실정신과 수준 높은 예술 성을 구가하며, 삶의 골계적 풍자와 해학미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당대의 변모하는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양반 사대부와 농민의 반상관계는 물론, 경아전이나 나장 같은 하급관료, 보부상 같은 민간인, 그리고 기생으로 보 이는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인간상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로 앞서 거론한 조선 후기 문예발전 속에서 새롭게 부상한 교양계층이기도 하다. 실제 이들의 문예향수는 판소리나 애정 소설, 연행문화의 성장에 후원이 되었다. 풍속화의 유행도 그러한 계층의 부상과 맞물려 있고, 경제 력을 갖춘 이들의 분방한 여성행각이 춘화라는 장르를 개척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김홍도가 조선후기 풍속화의 전형을 완성한데 이어, 신윤복이 그 매듭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주 지하다시피 김홍도가 농촌 생활상을 중심으로 서민층의 일상적 삶을 중심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신 윤복은 중세 말기의 변모하는 도회상을 드러내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女俗이나 노골적인 남녀의 애 정표현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끌어들였다. 대담하게 色情을 표출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우리나라 회화 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에로티시즘을 발산하고 있다. 당시 반상을 구분한 성리학 이념의 폐 쇄적 굴레에서 볼 때, 서울의 향락풍조를 중심으로 현실 사회상을 꼬집은 그의 풍자에는 사대부의 윤리관이나 체면치레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회의식까지 읽혀진다. 신윤 복은 현실 사회상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주제의식을 뚜렷이 한 것이다.
나아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신윤복에 관한 일화나 신윤복의 행적을 당시의 문헌에서 찾아내기 힘든 점은, 바로 유교사회에서 소외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이 성장한 서민 의식과의 만남은 그의 풍속화에 잘 나타난다. 기생과 한량, 별감이나 아전 등 하급 잡직 관료와 부유한 상인 을 비롯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계층을 주로 등장시킨 점이 한 증거이다. 또한 신윤복의 섬세한 묘사방식과 화사한 색채사용은 그 사람들의 생활감정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것이다.
신윤복의 그러한 사실주의적 서정은 18~19세기 사대부층이 선호한 文氣나 문자향을 내세운 수묵 위주의 寫意적 남종문인화풍과 상반되는 미의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윤복은 화원출신으로서 봉건 사회의 제한 속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고집한 새로운 작가의식의 싹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신윤복 풍속화는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근대사조와 가장 근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신윤복에 대하여는 고령 신씨로 아버지 신한평에 이어 화원으로 첨사(僉使)를 지냈다는 사실 정도 만이 알려져 있다. 아버지 신한평의 출생연대(1726)와 70대까지 공적인 궁중기록화 작업에 참여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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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미루어, 신윤복은 김홍도보다 후배로 김득신과 거의 동년배쯤으로 짐작된다.
신윤복은 아호를 자신의 그림처럼 성정의 아름다움에 비유되는 의미의, 향기가 짙은 난초 밭이라 는 ‘蕙園’이라 했고, 특히 자를 삿갓 쓴 사람이라는 ‘笠父’라 한 점이 주목된다. 혹 ‘笠’자를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애정소설 肉蒲團 의 저자인 李漁(1611-1680)의 아호인 ‘笠翁’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다. 이어는 명나라 말기 시인이자 극작가로 그 스스로 애정행각을 즐긴 문인이다. 그의 대 표작인 육포단 은 자신과 유사한 재능이 뛰어난 청년 학자가 여섯 명의 여성과 벌이는 성체험을 사 실적이고 세밀하게 그린 것으로, 18-19세기 중국과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색적인 소설이었다.
조선후기 패관잡설의 유입과 함께 국내에도 소개되었을 가능성과 동 시기 인접 국가에서 널리 읽힌 점을 염두에 두면, 신윤복의 예술세계를 그렇게 자극시켰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다.
그의 연대가 밝혀진 작품도 드물어 더욱 활동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신윤복의 풍속화와 풍속 화적 성격의 그림은 대부분 19세기 초의 작품들이다. 주제와 형식적 특징상 김홍도와 아버지 신한평 의 영향이 남아 있는 평범한 가사일의 女俗그림과 신윤복의 개성미가 물씬한 도회시정을 담은 그림, 기생의 초상화로 보이는 미인도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신윤복의 진면목은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풍속도첩》(간송미술관 소장)을 통해 엿볼 수 있 다. 30점으로 꾸며진 《혜원풍속도첩》은 기방풍속에 두세 쌍의 행락과 남녀의 밀회가 중심이며, 승 려가 끼거나, 색정을 돋우는 女俗장면, 무속, 주막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봄가을이 많고 야밤풍경이 설정된 점은 유흥과 남녀의 정념을 태우기 좋은 때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화첩 풍속도들의 특 징은 주제에 어울리는 배경으로 분위기를 돋운 것이다. 연못, 깊은 산곡, 강변, 어스름한 골목, 폐 가, 우물은, 물론 진달래와 국화 등으로 시절 감각을 맞추었다. 또한 이들 풍속도들이 내뿜는 감명 과 그림을 읽는 재미는, 화폭 하나하나가 도회생활상의 단편적인 주제들이면서도 세상사와 인간의 제 유형을 정확히 꼬집어 낸 점에 있다. 절묘하게 등장인물의 심리를 꿰뚫는 탁월한 관찰력은 놀랄 만하다. 그만큼 신윤복이 인간을 깊이 탐구한 증거이며, 화면 속의 인물들과 정서적으로 소통할 만 큼 충분히 답사한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 등장한 남정네들은 신윤복의 자화상 격이고, 그 자신도 기 방에 즐겨 드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윤복은 남녀의 성정을 노출시킨 소재나 기방의 유흥과 여성 생활상을 낱낱이 포착하여 김홍도․
김득신과는 또 다른 회화사적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性문화가 개방화하는 추세에서 당대의 도회 분위기를 예시한 것으로, 여성이 에로스 문화의 주요 대상으로 등장해 있음을 보여준 다. 조선시대 사대부적 윤리관에 비추어 보면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것이다. 반면에 그러저러한 행 색의 양반층을 향하여 ‘당신들도 인간이다’라는 유교사회의 허위의식에 대한 신윤복의 풍자적 야 유가 실려 있는 듯하다.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또 그림에 자신의 낙관을 분명히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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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은 예술적 소신을 확고히 밝힌 신윤복의 근대적 작가정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의 풍아한 그림은 조선인 바탕에 깔린 삶의 멋과 정서를 일깨워 지금도 변함없는 감흥을 일으 킨다. 그 감명은 인물묘사력, 색채감각 등 신윤복이 꾸준히 추구한 사실적 창작태도의 견실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대회화의 여명을 알리는 성과이다. 이와 함께 신윤복 풍속화의 또 다른 가치는 문 화사료로써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길이가 짧아져 젖가슴이 드러난 저고리나 다양한 남성 복의 모양새 등 치밀하게 그린 의상은 각 계층과 노소성별의 유행 복식을, 삼현육각을 비롯한 2~3 인조의 소규모 악단은 민간의 춤과 음악문화를 추정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신윤복류의 풍속도는 그 이후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쪽으로 더 이상 진 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린 남녀인물의 도상과 화풍은 19세기 춘화의 격조를 높이는데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