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칸트의 보편화가능성의 원리의 한계에 대한
3. 도덕적 자율성에서 정치적 자율성으로
칸트의 자율성의 정치적 원리로서의 재정식화
1) 칸트의 정치 철학에서 보편화가능성의 원리와 시민들의 합의
칸트는 도덕을 규범 일반을 포함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체계로 규정하
고, 이러한 도덕의 개념으로부터 정치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칸트에 따르 면 도덕은 “의무 일반의 체계”(VI: 242), 혹은 “우리가 그에 따라 행위해 야만 한다는, 무조건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법칙들의 총체”(VIII: 370)로서, 좁은 의미에서의 도덕(덕의무)만이 아니라 법과 권리(법의무)의 문제까 지 포함한다(VI: 239). 따라서 칸트의 정치철학에서 정치의 영역은 그것 이 규범적인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 도덕에 종속되는 형태를 갖는다.45) 이에 따라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식화된 개별 주체의 도덕적 자율성 은 칸트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서 제시하는 시민적 공화 정체, 즉 민주 주의 정체의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해명하기 위한 기초의 역할을 하 게 된다.
칸트는 정치의 원리를 도덕의 원리와 양립시키는 ‘도덕적인 정치가’를 상정하고, 그 혹은 그녀가 따라야할 원리로서 보편 법칙의 정식, 즉 “너 의 준칙이 (목적이야 무엇이 됐든지 간에)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네가 의욕할 수 있게끔, 그렇게 행위하라”(VIII: 377)를 제시한다. 칸트의 보편 법칙의 정식은 도덕의 원리인 동시에 도덕적인 정치의 원리이기도 한 것 이다(Neiman, 1997: 119;나종석, 2002: 40-41). 하지만 도덕의 영역과 정 치의 영역에서 보편 법칙의 정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연 적 인격체로서의 개별 주체의 의무에 대한 판정이 문제가 될 경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는 보편 법칙의 정식과 동치 관계에 있는 실천적 판단력의 규칙으로서 자연 법칙의 정식을 도입한다. 자연 법칙의 정식에 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합치라는 원리는 배면으로 사라지고 그 대신 준칙이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상상될 경우 발생하는 모순의 개념이 핵심을 이루게 된다(Allison, 2011: 257). 반면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시민들에 의한 공통의 규범적 질서의 확립이 문제가 될 경우, 자연 법칙 의 정식에 따라 독백론적으로 보편화가능성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 칙수립적 의지로서의 모든 시민들의 합일된 의지라는 근본 원리가 전면
45) “참된 정치는 먼저 도덕에 경의를 표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 다. 비록 정치가 그 자체로는 어려운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와 도덕의 합일은 전혀 기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가 상충하자마자, 정치는 풀 수 없는 매듭
에 등장하게 된다. 칸트는 도덕적인 정치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 다.
이러한 일[도덕과 정치의 합치]은 바로, (한 국민 중 에, 또는 여러 국민들 상호 관계 중에 있는) 선험적으 로 주어진 보편적 의지가 있고, 이 의지만 인간들 사 이에 권리 있는/법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인의 의지의 통합
〔합일〕은 그 실행에서 일관성 있게 밟아질 때에만, 자연의 기제에 따라서도, 동시에, 목표한 결과를 만들 어내고, 법 개념에 효력을 마련해주는 원인이 될 수 있다(VIII: 378).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보편적 의지’는 무엇이 합법적 (recht)인가의 기준이 되는 반면, 법 개념이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만인 의 의지의 통합이 경험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칸트의 정치 철학에서 모든 이들의 의지의 합치라는 원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헌법의 차원이다. 칸트는 공동의 헌법 하에서 의 개인들의 시민적 상태를 “서로 간에 교호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 데 법적인 것을 분유하기 위해 그들을 합일시키는 의지 아래서의 법적 상태”(VI: 311)로 규정하고, 자연 상태로부터 이러한 시민 상태가 산출되 는 것을 설명하는 모델로서 원초적 계약의 개념에 입각한 사회계약론을 제시한다. 다른 하나는 입법의 차원이다. 칸트에 따르면 국가 안에서 법 칙수립적 권력(입법권)은 오직 국민의 합일된 의지에만 귀속된다(VI:
314). 이러한 입법권의 합당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공 법의 초월적 원리로서의 공개성(Publizität)과 시민들의 이성의 공적 사 용의 개념이다.
칸트에 따르면 원초적 계약은 국가 혹은 시민적 헌정 체제를 설립하는 계약으로서(VI: 315), 다른 모든 계약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유형 을 이룬다(VIII: 289).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성립할 필요가 없
으며, 이성의 순전한 이념이지만 합법성의 시금석으로서 의심할 바 없는 실천적 실재성을 갖는 것이다(VIII: 297).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원초적 계약의 근거는 각인의 법칙수립적 의지(VI: 316)로서, 원초적 계약 자체 는 만인의 일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간주될 수 있다(XXVII: 1382). 그 것이 설립하는 시민 상태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본질적인 법/권리적 속성을 부여하는 바, 첫째는 자신이 동의한 법률 외에는 어떤 법률에도 따르지 않을 법률적 자유이며, 둘째는 법적으로 자신을 구속할 도덕적 능력을 가진 자 외에는 어떠한 상위자도 인정하지 않는 시민적 평등이고, 셋째는 시민적 자립성, 즉 법적 사안들에 있어서 어떠한 타인 에 의해서도 대표되어서는 안 되는 시민적 인격성이다(VI: 314).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세 가지 원리는 하나의 국가 설립이 외적인 인권의 순수 이성원리 일반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는 선험적 원리들이다 (VIII: 290). 말하자면 원초적 계약은 시민의 불가침적 인권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헌정 체제의 확립에 대한 하나의 사회계약론적 모델을 제시하 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VIII: 380).
반면 공법의 초월적 원리로서의 공개성은 이미 시민적 헌정 체제로서 확립된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민들의 입법권의 행사와 연관된다. 칸 트에 따르면 공법(公法)이란 “법적 상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일반적 공 포를 필요로 하는 법칙〔법률〕들의 총체”(VI: 311)로서, 그 내용을 추상 하는 경우 남는 공개성의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공법의 초월적 정식 이 성립하게 된다. “타인의 권리와 관계되면서, 그 준칙이 공개성과 화합 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옳지 않다/부당하다/불법적이다.”(VIII:381). 이것 은 법칙의 순전히 보편적 합법칙성의 형식만을 고려함으로써 도덕과 정 치의 합치를 보장해주는 원리로 이해된다(VIII: 386).
이러한 공개성의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시민들의 이성 의 공적 사용의 개념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 계몽의 원리를 이룬다고 본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인간들 사이의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VIII: 37)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법칙수립적 주 체로서의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어떤 것이 국민을 위한 법률로 결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시금석은 국민이 스스로에게 그런 법률을 부과하는가에 달려 있다.”(VIII: 39) 모 든 시민들이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법률에 대해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 만장일치는 아니더라도 의견의 상당한 일치에 이 르게 되면 좀 더 나은 생각에 따라 새로운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지속적 인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바, 이것은 바로 시민들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 사용의 관념은 국민 주권의 합당 한 행사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원리, 즉 인권과 국민 주권은 칸트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제시하는 시민적 공화 정체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게 된다. “인간 의 자연적 권리와 합치하는 정치 체제의 이념, 즉 법(Gesetz)에 종속되 는 자들은 전체로서 동시에 법을 부여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이념은 모 든 국가형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순수 이성 개념을 통해 그 이념에 따라 사유된 정치적 조직체는 플라톤적 이상(예지적 공화국)으로서 공허 한 망상이 아니라 모든 시민적 정치 체제 일반에 대한 영원한 규범이며, 모든 전쟁을 멀리한다. […] 그러므로 그러한 정치 체제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다.”(VII: 89) 이러한 이념은 현대 입헌 민주주의의 이념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Beiser, 1992: 33-34; Gerhardt, 1995: 89; Gaubatz, 1996: 137; Maliks, 2009: 427; Korsgaard, 2009: 183).
2) 롤스의 정의론에서
원초적 계약에 입각한 자율성의 재정식화
롤스는 자기 입법의 절차를 통해 타당한 규범을 산출하고 정당화할 수 있으려면 자율성을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배경으로부터 분리하여 경험 적 이론의 틀 안에서 재정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TJR
: 226-227). 왜냐하면 보편성이라는 법칙의 순수한 형식에만 의존하여 규범을 산출해내 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TJR
: 221). 이것은 롤스가 모든 경험 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선험적 원리에만 의존하는 칸트의 윤 리형이상학 정초의 자기 입법의 모델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 다. 선험적 원리만으로는 합당한 정의관을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 론은 경험적 사실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롤스의 생각이다(TJR
: 44). 보편성이라는 법칙의 순수한 형식에 머무를 것이 아 니라 경험적 사실들을 일반화하여 실천 이성의 원리에 구체적인 맥락을 부여하면 보편성이라는 형식적 원리로부터 실제로 타당한 내용적 규범들 을 산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칸트의 자율에 대한 롤스의 재정식화의 핵 심을 이루고 있다. 즉 칸트에게서 순수한 일반성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 는 보편화가능성의 원리를 정의론의 관점에서 적절하게 경험적인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실제로 타당한 규범들을 산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롤스는 칸트의 도덕 이론의 ‘진정한 힘’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Kain, 1999: 113-114). 이것은 칸트에 대한 헤겔의 공허한 형식주의 비 판에 대한 롤스의 답변이다(TJR
: 221). 경험적 이론의 틀 안에서 재정식 화될 경우 칸트의 자율성은 공허한 형식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로 타당한 규범을 산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46)롤스의 정의론에서 칸트의 자율성을 경험적 이론의 틀 안에서 재정식 화하는 작업은 계약론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것은 칸트적인 형태의 사회계약론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47) 롤스의 원초적 계약 (original contract)은 칸트의 원초적 계약(contractus originarius)의 재정 식화로서,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 갖는 가상의 합의 장치로서의 특성이 이성의 순전한 이념으로서의 칸트의 원초적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46) 롤스의 이러한 생각은 헤겔의 공허한 형식주의 비판에 대한 칸트주의자들의 대 응 방식의 한 가지 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Benhabib, 1990:
335; 1992a: 27; Freyenhagen, 2011: 100 참조.
47) “지금까지 내가 시도해온 것은 로크나 루소, 그리고 칸트에 의해 제시된 사회계 약의 전통적 이론을 보다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일이었다. […] 결과적으로 도달 된 이론은 그 성격에 있어 지극히 칸트적인 것이다.”(TJR: xviii) 이와 관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