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반성적 평형의 정합론적 정당화 논변
3. 하버마스-롤스 논쟁(1-2)
정치적 정의관의 합당성과 이성의 공적 사용
1)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하버마스에 따르면 ‘정치적 전회’ 이후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정당화 논 리의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그것이 원초적 입장을 강한 해석에 따라 순 수 절차적 정의의 사례로 간주하는 정의론의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을 갖는 인격의 관념을 정의관의 구성 및 정당화의 기초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이에 따라 롤스에게는 이제 세 가지 과제가 부과된다. 첫째, 도덕적 인격의 관념은 칸트적 절차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롤스는 이러한 인격의 관념이 민주주의의 공 적 문화에 뿌리박혀 있는 직관적인 관념이라는 주장을 통해 이에 대응한 다. 둘째, 실질적인 규범적 내용을 갖는 인격관이 어떻게 합당한 다원주 의의 현실 하에서 모든 시민들에 의해 수용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롤스에 따르면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포괄적 교설에 대해 자립적인 정치 적 정의관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합당한 포괄적 교설의 관점에 서 중첩적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셋째, 정치적 자유주의 의 정당화 기획이 정의관에 어떠한 인지적 내용을 귀속시키는지 설명해 야 한다. 롤스는 이에 따라 포괄적 교설의 진리(truth) 개념과 구분되는 정치적 정의관의 합당성(the reasonable) 개념을 새롭게 도입한다.
롤스는 이러한 세 가지 요구를 만족시키는 정의관을 ‘정치적(political)’
이라는 개념을 통해 규정하는 바, 하버마스는 롤스가 ‘정치적인 것’의 개 념을 통해 정의관의 타당성과 사실적 수용의 차원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본다(
RPUR
: 119-126). 정의관의 인지적 내용에 대한 롤스의 이 러한 애매한 태도는 중첩적 합의의 관념에 반영되어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롤스는 중첩적 합의에 대한 기능주의 해석을 배제하기 때문에, 중첩적 합의가 정의관의 타당성을 근거짓는 데 관여하는지 아니면 정의 관의 안정성 문제에만 연관되는지가 불분명하다.하버마스는 합당성의 개념 또한 규범적 타당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원주의 하에서 계몽된 관용의 반성적 자세를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롤스는 합당성을 일단 도덕적 인격의 속성으로 도입한다. 정의감을 갖고 협력의 공정한 조건으로서 원 칙과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기꺼이 준수할 태도를 갖는 사람들은 합당 성을 갖춘 것으로 간주된다(
PL
: 49). 이러한 합당성의 개념은 실천 이성 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옳음 또는 규범적 타당성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하버마스에 따르면 롤스는 진리의 개념을 포괄 적 교설에 귀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를 거부하고, 그 대신 포 괄적 교설들의 합당한 다원주의라는 현실 하에서 자신의 포괄적 교설을 성찰적 관점에서 파악하게 된 시민이 정치적 정의관을 수용하고 공적 이성의 제약에 따르려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롤스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정당화 논리의 이러한 불분명한 부분들을 ‘정치적’이라는 규정을 통해 회피할 것이 아니라, 칸 트의 자율성에 대한 일관된 절차주의적 해석을 통해 공정으로서의 정의 의 인지적 내용을 근거지을 필요가 있다. 정의론의 정당화 논리의 문제 점은 칸트의 자율성에 기초하여 정의관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롤스가 칸트의 자율성을 여전히 독백론적인 관점에서 재정식화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2) 공적 정당화의 개념에 기초한 롤스의 반박
롤스는 공적 정당화의 개념에 기초하여 하버마스의 이러한 비판을 반 박한다. 공적 정당화의 개념은 합당한 중첩적 합의, 올바른 이유에서의 안정성, 그리고 정당성(legitimacy)의 세 개념과 연관된다(
RH
: 144-150).롤스는 먼저 하버마스가 중첩적 합의를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 치적 정의관에 대한 중첩적 합의는 현존하는 이해 관심과 요구 주장을 일별하여 그 안에 존재하거나 혹은 잠재되어 있는 사실로서 합의를 도출 해내려는 것이 아니다. 적정 수준의 정당화의 단계에서 정치적 정의관은 현존하는 포괄적 교설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립적인 관점으로서 구성된 다. 그것은 사회의 합당한 시민들이 수용하는 합당한 포괄적 교설들이 그것을 지지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합당한 중첩적 합의를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롤스에 따르면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공적 정당화가 이루어질 경 우 올바른 이유에서의 안정성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음의 세 가 지를 특징으로 한다. 첫째, 사회의 기본구조는 가장 합당한 정치적 정의 관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규율된다. 둘째, 이러한 정치적 정의관은 사회 내의 모든 합당한 포괄적 교설에 의해 중첩적 합의를 통해 승인받았으며 이 정의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소수에 머무른다. 셋째, 공적
인 정치적 토론은 헌법의 본질적 요건 및 기본적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 여 항상 혹은 거의 항상 가장 합당한 정치적 정의관에 기초하여 합당하 게 결정될 수 있다. 롤스에 따르면 올바른 이유에서의 안정성에 따른 사 회 통합은 가장 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정치적 정의관은 가장 합당할 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모든 합당한 포괄적 교설에 의해 승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관에 대한 공적 정당화가 완료될 경우 민주적 의사결정은 정당성 의 개념에 기초하게 된다. 롤스에 따르면 정치적 생활에서 만장일치란 거의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수결 절차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 한 절차는 정당성의 자유주의적 원칙, 즉 헌법의 본질적 요건이 자유롭 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모든 합당한 시민들이 지지할 것으로 합당하게 기 대될 수 있는 그러한 헌법에 따라 정치권력이 행사될 경우에만 정당하다 는 원칙을 따르게 된다. 합당한 중첩적 합의를 획득한 정치적 정의관은 정당성의 자유주의적 원칙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시민들은 비록 개별 사 안에 있어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정당성의 개념 에 따라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
롤스는 정치적 정의관의 공적 정당화에 대한 이러한 해명을 기초로 하 버마스의 비판에 답변한다. 롤스에 따르면 합당한 중첩적 합의는 공정으 로서의 정의의 정당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그것이 올바른 이유에서의 안 정성을 확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정의관의 안정성 확보 가 단순한 사실적 수용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합당성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합당성의 개념과 직접 연관된다. 롤스는 합당성 개념의 두 가 지 특징, 즉 공정한 사회적 협동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준수하려는 자발성과, 판단의 부담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 는 자발성이 서로 분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롤스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실천 이성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전자가 실천 이 성에 의해 모든 시민이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바를 확정하는 것이 라면, 후자는 실천 이성을 통해 도달되는 이성적 합의의 한계를 확정하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합당성의 개념은 정의관의 인지적 내용 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용에 기초한 반성적 태도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 다.
3) 정의관의 정당화와 이성적 합의의 원리
하버마스는 롤스의 반박을 수용하여 정치적 자유주의의 정당화 논리에 대한 그의 비판을 좀 더 예리하게 재구성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칸트 의 자율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합당성 과 진리 사이의 분업을 통해 정당화의 부담을 해소하려는 롤스의 시도는 시민들의 이성의 공적 사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직관적인 결론 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칸트의 자율성에 기초한 정당화의 대안을 제 시하려는 롤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하며, 칸트의 자율성을 일관된 절 차주의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이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결론이다.
하버마스는 정치적 정의관의 3단계 정당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이러 한 주장을 논증해나간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모든 시민들 이 공유하는 ‘도덕적 관점(moral point of view)’, 그리고 그에 따른 이성 의 공적 사용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 각인의 비공적 관점에서 수 행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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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123).1단계인 적정 수준의 정당화의 단계에서 시민들은 헌법의 본질적 요건 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에 대해 시민 사회에 있는 모든 시민의 관점에서 가장 합당한 답변을 제시하는 정의관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면서 일종의 보편화가능성의 검사를 수행한다. 그런데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 과정에 서 이성의 공적 사용이 없이 각인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편화가능성의 검 사를 수행하기 때문에, 각인에게 고유한 선입견과 각자의 세계관에서 구 성되는 배후과정이 결과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1단계에서의 정 의관의 평가는 황금률과 유사한 방식으로, 즉 각자가 자신의 관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