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반성적 평형의 정합론적 정당화 논변
2. 넓은 반성적 평형에서 정합성과 규범적 이유들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반성적 평형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 서의 ‘너와 나의 관점’에서 정의관의 합당성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
PL
: 28). 곤혹스러운 것은 원초적 입장이나 중첩적 합의에 비해 반 성적 평형에 대한 롤스의 설명은 매우 간략하여 논의할 만한 내용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반성적 평형에 대한 가장 정치(精緻)한 해석 으로 생각되는 대니얼스(N. Daniels)와 스캔론(T. Scanlon)의 해석을 참 조하여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스캔론은 롤스의 반성적 평형이 세 단계를 거쳐 성립한다고 본다 (Scanlon, 2002: 140-141). 첫 번째 단계에서는 정의에 대한 숙고된 판단 (considered judgment)들이 선별된다. 이러한 판단들은 우리의 실천 이 성의 능력이 거의 완전하게 행사되며 그것을 왜곡시키는 요소들의 영향 이 없는 조건에서 내려지는 판단들인 것으로 추정된다.54) 두 번째 단계 에서는 선별된 숙고된 판단들을 해명하는 원칙을 구성해낸다. 여기서 숙 고된 판단을 ‘해명하는(explicate)’ 원칙이란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을 갖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시민에 의해 구체적인 규범적 문제에 적용될 경우 숙 고된 판단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의감에 부합하는 판단을 산출해 낼 수 있는 원칙을 의미한다(Rawls, 1951: 184).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구 성된 원칙과 숙고된 판단 양쪽을 지속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우리의 숙고 된 판단에 부합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규범적 문제들에 적용될 경우 합당 한 판단을 산출해낼 수 있는 원칙을 구성해낸다. 일반적 신념, 원칙 그리 고 특수한 판단들이 서로 정합적으로 상호 지지관계에 있는 이러한 상태 가 반성적 평형이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 중 어느 하나가 정당화의 전체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않으며, 어떠한 요소든 개정 가능성을 갖 는다는 점에서 반성적 평형은 비정초주의적(non-foundationalist)인 정당 화의 방법이다(
JFR
: 31-32). 또한 반성적 평형은 우리가 이미 도달해있 거나 앞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 목표로 서 무한정하게 지속되는 검증의 과정으로 제시된다(PL
: 97).스캔론에 따르면 반성적 평형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Scanlon, 2002: 142). 하나는 기술적(descriptive) 해석으로, 이 경우 반성적 평형의 목표는 특정 인물 혹은 집단이 갖는 정의관의 내용을 최 소한의 수정을 가하면서 일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하나는 심의적(deliberative) 해석으로, 이 경우에는 단순히 현존하는 정의관을
54) 숙고된 판단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에 대해서는 Rawls, 1951: 181-183; Scanlon,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타당한 판단을 산출해내는 것이 반성 적 평형의 목표가 된다. 스캔론에 따르면 반성적 평형이 기술적 해석의 방식으로 이해될 경우 그것은 정당화 논리로 간주될 수 없는 반면, 심의 적 해석의 방식으로 이해된 반성적 평형은 유일하게 옹호 가능한 정당화 의 방법으로서 그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Scanlon, 2002: 149).
반성적 평형에 대한 스캔론의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각각 좁은 반성 적 평형과 넓은 반성적 평형에 상응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롤스에 따르 면 반성적 평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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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1). ‘좁은(narrow)’반성적 평형은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그가 숙고된 판단에 최소한의 수정을 가하면서 반성적 평형을 이루는 하나의 정치적 정의관을 발견하 는 경우에 성립한다. 이러한 반성적 평형이 좁은 이유는 그가 숙고된 판 단에 최소한의 수정만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안이 되는 정의관 및 그 에 대한 논증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넓은(wide)’ 반성적 평 형은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그가 대안이 되는 정의관 및 그를 위한 다양한 논증들의 힘을 고려하여 도달하게 되는 반성적 평형을 가리킨다.
넓은 반성적 평형이 공적 정당화의 단계로 나아갈 경우 ‘일반적이고 넓 은(general and wide)’, 혹은 ‘완전한(full)’ 반성적 평형이 된다. 이 경우 모든 시민들이 하나의 공적 정의관에 대한 넓은 반성적 평형에 도달하여 중첩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공적 이성이 성립한다.
롤스는 넓은 반성적 평형의 단계에서 여러 대안적인 정의관들과 관련 하여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 지 않는다. 반성적 평형에서 고려되어야 할 근거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 지 알아보려면 반성적 평형에 대한 대니얼스의 해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 다. 대니얼스는 넓은 반성적 평형을 숙고된 판단, 정의의 원칙, 그리고 유관한 배경 이론(background theory) 사이의 정합성을 산출해내는 것으 로 이해한다(Daniels, 1979: 258). 이러한 배경 이론으로는 절차적 정의 이론, 인격 이론, 사회에서 도덕성의 역할에 대한 이론 등이 있으며, 정 의관의 실현 가능성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여기에 더하여 일반 사 회 이론과 도덕 발달 이론에 의한 검증을 포함해야 한다(Daniels, 1996:
51).
2)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기술주의 비판
넓은 반성적 평형이 정의관의 타당성을 근거지을 수 있으려면 그것은 정의관에 대한 시민들의 규범적 믿음을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요 소들의 개정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여러 가지 고려사항의 상호지지 및 일 관된 관점의 구성을 통해 정의관에 대한 정합론적 정당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반성적 평형이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현재 갖고 있는 숙고된 판단의 내용을 일관되게 해명하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정당화의 논리가 아니라 분석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정당화 논리에 대한 주요 비판들, 즉 기술주의 비 판과 상대주의 비판, 그리고 인격관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비판은 이 지 점을 문제삼는다. 이 세 가지 비판은 하나의 쟁점으로 수렴하는데, 그것 은 반성적 평형이 숙고된 판단에 의존하여 정의관에 대한 현존하는 합의 를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당화의 힘을 산출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 이다.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기술주의 비판(descriptivist critique) 의 핵심은 롤스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받아 들여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 대신 시민들이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혹은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Hedrick, 2010: 32-33). 우리가 믿 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너 무 적게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롤스는 현실적인 것이 곧 이성적인 것이 라는 잘못된 헤겔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Hedrick, 2010: 47).
헤드릭의 비판은 일차적으로 중첩적 합의의 관념을 겨냥하지만, 그것 은 반성적 평형에도 적용될 수 있다. 대니얼스의 넓은 반성적 평형의 도 식을 따를 경우 그것은 판단, 원칙, 배경 이론 사이의 정합성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정합성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요소들에 대한 약간의 수정이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롤스는 이것이 한갓 사실성을 넘 어 규범적 정당화의 힘을 갖는다고 볼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 하지 않는다.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실제의 합의에 호소하고 있다 는 점에서 규범적 정당화를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 점에서 반성적 평형에 대해서도 유효하다(Raz, 1990: 46; Hampton, 1993: 309-312;
Song, 2012: 167).
반성적 평형이 상대주의로 귀결된다는 비판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 있 다. 이러한 비판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반성적 평형의 수렴 가능성을 부정한다. 숙고된 판단은 각인마다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숙고된 판단에서 출발할 경우 각각 내적으로 정합성을 갖지만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반성적 평형들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 우 반성적 평형은 일종의 직관주의가 된다(Singer, 1974; Brandt, 1979;
Hare, 1989; Phillips, 1994: 38). 다른 하나는 반성적 평형의 수렴 가능성 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여전히 일종의 상대주의로 귀결된다고 본 다. 민주주의의 공적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는 근본 관념 및 숙고된 판단 에서 출발하는 롤스의 반성적 평형은 현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 들의 공통의 규범적 확신을 정합적으로 재구성할 뿐, 이러한 확신의 인 지적 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O’Neill, 1989d: 211;
Kappel, 2006: 145-146).
롤스가 칸트적 구성주의를 내세운 이후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정당화에 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격관의 수용가능성 또한 이와 유사한 비판 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갈래의 비판은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을 갖는 합 리적이고 합당한 인격의 관념이 민주주의의 공적 문화에 내재된 직관적 관념이라는 롤스의 주장을 문제 삼는다. 미국 사회를 기준으로 보면 그 것은 대부분의 시민들에 의해 수용되는 관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수용 될 가능성 또한 없다는 것이다(Galston, 1982: 515-516; Klosko, 2009:
31). 왜냐하면 도덕적 자율성과 인격적 자율성이라는 두 가지 능력을 특 징으로 하는 롤스의 인격관은 칸트적이라는 점에서, 포괄적 교설들에 대
해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Doppelt, 1998: 426; Taylor, 2011: 250). 다 른 한 갈래의 비판은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인격관 중 롤스가 제시하 는 인격관을 수용하여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문제 삼는다. 여러 대안적인 인격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롤스의 인격관은 언 제든 임의적인 것으로서 거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Brink, 1989: 317;
Wall, 1998: 58-59; Talisse, 2009: 71; Guyer, 2013: 184).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이러한 세 가지 비판은 반성적 평형이 한갓 사실로서의 정합성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동일한 논점으로 수렴 된다. 이에 대해 로티는 사실성과 우연성 넘어서는 정당화가 왜 필요한 가라고 반문한다.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철저하게 역사주의적이 고 반보편주의적인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바, 이것은 사실성과 우연성 을 넘어서는 정당화는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반형이상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Rorty, 1991: 180). 그러나 하버마스가 지적 하듯이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처음부터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의 규범적 자기 이해에 대한 한갓 사실적 기술로서 제시된 것이라면, 정치 적 정의관의 안정성의 문제 및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중첩적 합의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FG
: 85). 그 경우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시민들이 이 미 받아들이고 있는 정의관을 분석적으로 도출한 것이기 때문에, 정의관 의 사실적 수용의 문제는 제기될 필요가 없다. 사실적 수용에 대해 독립 적인 절차에 의해 구성되고 타당성이 근거지어진 정의관의 경우에만 수 용가능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롤스가 의도적으로 사실성 에 머무른다는 로티의 해석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그렇다면 롤스는 세 가지 비판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 반성적 평 형이 비정초주의를 따르고 있고, 숙고된 판단은 개정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들은 설득력이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Daniels, 1979: 267;
Nielsen, 1993: 326; Scanlon, 2002: 14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앞서의 세 가지 비판은 좁은 반성적 평형의 경우에만 타당하다. 넓은 반성적 평 형은 숙고된 판단을 포함한 모든 구성요소들을 개정가능한 것으로 다룬 다. 실천 이성의 요구를 체화한 반성적 평형은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